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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경북 김천시 호동마을에서 나고 자라셨다. 술주정뱅이 할아버지 행패에 학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맨날 일만 죽도록 하다가 도피하다시피 금오산 기슭 산골마을의 찢어지게 가난한 울 아버지에게 시집을 가셨다.

하지만 엄마에게 닥친 또 다른 현실 역시 그리 녹록지 않았다. 농사지을 땅 한 평 없고, 오랜 지병으로 병석에 누워계신 시아버지.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 탓에 초등학교만 나와 어릴 때부터 똥장군을 짊어지고 남의 밭에 거름을 주는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나의 형님이 태어나자마자 군대에 가셨다. 엄마에겐 몸조리를 할 틈도 없었다. 집에 먹을 것도 없던 터라, 엄마는 핏덩이인 형님을 등에 업고  남의 농사일을 해서 근근히 하루하루 연명했다. 아버지가 제대하고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곳에선 도저히 먹고 살기도 힘들고 자식교육도 힘들다고 생각하셨는지 과감히 고향을 떠나셨다. 손수레 하나에 단출한 살림 몇 개만 싣고, 엄마는 핏덩이인 나를 안고 형님을 등에 업고 야밤도주하다시피 도시근교의 비교적 큰 동네였던 지금의 호동으로 무작정 오셨다.

공부에 한이 맺힌 아버지는 자식들만큼은 도시의 학교에 보내 공부시키실 생각이셨다. 호동에 살고 계셨던 이모님 집에 방 한 칸 빌려 기거하면서 남의 농사일부터 시작해 악착같이 살아오셨다. 그래서 지금의 집이 있는 곳, 당시는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이었지만 그곳에 집 지을 땅부터 마련하셨다.

아버지는 낮엔 농사일을 하고 밤엔 리어카를 끌고 금오산 기슭까지 올랐다. 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아버지는 집 지을 나무들을 베어 실어 나르고 흙벽돌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지금의 집을 손수 조금씩 조금씩 지으셨다. 집을 짓는 데 그 어떤 부분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부모님 두 분이 직접 다 하셨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먹고 살려고 얼마나 등골 빠지게 노력을 한 것일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 지을 땅을 사 집을 지은 뒤에도 집 주변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 그 결과, 집주변으로 아버지 땅이 3천평에 이르렀다.

'못 배운 한' 물려주지 않기 위해 평생 애쓰신 부모님

이 사진은 내가 10개월 때 기념으로 찍었다고 아버지의 필체로 글씨가 적혀 있다. 저 때면 아마 호동으로 온 직후, 입에 풀칠하는거 조차 힘들 때였을 텐데, 그땐 사진관에 가서 사진 찍는 것도 비싸서 엄두가 안 날 때였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사진을 남겨셨는지... 지금보니 지금과 같은 삶의 힘든 고비가 왔을 때 아마 보고 힘내라고 그러셨는듯. 십 원짜리 하나가 아쉬웠을 터인데 자식을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걸 바쳐 사신 부모님의 자식사랑이 담긴 사진. 부모님께 나는 세상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소중한 존재였을테니... 사진 한 장에 담긴 부모님의 피와 땀을 조금은 알기에 나는 나의 몸을 소홀히 하거나 내 삶을 함부로 살 수가 없다.
▲ 필자의 10개월 기념사진 이 사진은 내가 10개월 때 기념으로 찍었다고 아버지의 필체로 글씨가 적혀 있다. 저 때면 아마 호동으로 온 직후, 입에 풀칠하는거 조차 힘들 때였을 텐데, 그땐 사진관에 가서 사진 찍는 것도 비싸서 엄두가 안 날 때였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사진을 남겨셨는지... 지금보니 지금과 같은 삶의 힘든 고비가 왔을 때 아마 보고 힘내라고 그러셨는듯. 십 원짜리 하나가 아쉬웠을 터인데 자식을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걸 바쳐 사신 부모님의 자식사랑이 담긴 사진. 부모님께 나는 세상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소중한 존재였을테니... 사진 한 장에 담긴 부모님의 피와 땀을 조금은 알기에 나는 나의 몸을 소홀히 하거나 내 삶을 함부로 살 수가 없다.
ⓒ 백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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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초등학교밖에 못 나오셨지만 공부에 대한 한과 열망이 대단하셨다. 그래서 그 힘든 농사일을 하고도 밤이면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중고로 구한 중, 고등학교 교과서들을 글씨가 닳을 때까지 보셨다.

책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셨는지 책엔 절대 밑줄 하나 긋지 않았다. 책 한 장 한 장 넘기실 때에도 찢어질세라, 흠집날세라 귀중한 가보 다루 듯했다. 지금도 그 책들은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동네에서 아버지만큼 한자를 아는 이도 드물어서, 동네 사람들은 종종 관공서 일이나 한자 섞인 문서 같은 걸 아버지에게 들고왔다.

내가 6학년 때에야 집에 전기가 들어왔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부모님은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해, 자식에게 당신의 고통스런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그 살과 피를 갈아 땅에 뿌리며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사셨다.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그 바쁜 농번기에도 행여 자식들 공부에 방해될까봐 '농사 거들어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너희는 공부만 열심히 해라.' 하지만 난 부모님의 바람처럼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공부를 하라고 하셨는지... 그땐 몰랐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왜 저렇게 필사적으로 힘들게 고생하며 일하시는지... 부모들은, 어른들은 다 당연히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난 천벌을 받고도 남을 놈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난 제대로 잘 살지 못해 엄마를 눈물짓게 만드는 불효자식이다.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신 땅은 수십 년 동안 부모님이 흘린 땀과 피와 살이 스며들어 있는곳이다. 부모님은 땅을 팔아 형편이 어려운 자식들이 편히 살도록 해주고 싶어 하시지만 나는 앞서 말한 이유로 그 땅을 파는 걸 반대한다. 내가 굶을지언정 어찌 저 땅을 팔아 편히 먹고 살 수 있겠는가...

워낙 생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엄마는 골병이 들었다. 그래서 일흔이 되기도 전에 온몸이 다 고장나버렸다. 일을 천천히 꼼꼼하게 하고 남에게 일을 맡기지 못하며, 사전 준비와 정리에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아버지와 일이 밀리는 걸 두고보지 못하는 엄마의 성격상 아무리 농사일이 많아도 사람 한 번 쓰지 않았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장정 두세 명이 해야 할 일들을 수십 년 동안 해왔으니 그렇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두 다리의 무릎뼈가 다 닳아 걸을 수가 없어 인공관절 수술을 했다. 등뼈는 몇 번을 부러지고 내려앉아 수술만 수차례 했다. 이젠 병원에서도 더 손 댈 수 없으니 무조건 조심해야 한단다. 볼일 보러 집 밖을 나가도 10분을 채 걷지 못해 주저앉아 쉬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엄마의 불편한 거동을 해결할, 보조해 줄 도구를 찾게 됐다. 가장 간단하고 흔한 건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거였다. 하지만 이건 허리 아픈 덴 좋지만 다리 아픈 건 해결 안 되니 무용지물. 또 대표적인 게 의자형 전동스쿠터. 그러나 이건 인도에 장애물이 있거나 요철이 심할 시 차도로 다녀야 하는 위험성이 있었다. 더구나 작은 바퀴로 인해 전복의 위험이 많고 또 답답한 걸 싫어하는 엄마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와중에 내 눈에 띈 게 미국에서 걷기 힘든 노인들을 위해 개발되었다는 세그웨이였다. 딱 보니 안성맞춤이다.

평생 일하느라 무릎뼈가 다 닳은 엄마를 위한 선물

엄마가 간단하게 장보러 나갈 때 꼭 필요할 것 같아 착탈식 장바구니를 장착하였다.
▲ 장바구니 장착 엄마가 간단하게 장보러 나갈 때 꼭 필요할 것 같아 착탈식 장바구니를 장착하였다.
ⓒ 백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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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은 우리 아들
▲ 세그웨이 모델은 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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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이 선 뒤 물건을 좀 더 싸게 사기 위해 해외 직구를 했다. 물건을 받아 직접 시승해보고 아이들에게도 타보라고 했다. 직접 경험해보니, 뛰어난 안정성과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탁월한 주행능력이 맘에 들었다. 또 별도의 조작이 필요 없이 내 몸을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엄마도 쉽게 적응할 수 있어 보였다. 유모차 밀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단지 밑에 발판이 달려있어 발판에 올라서서 유모차 밀듯 앞으로 가고자 하면 자동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

단지 염려되고 걱정스러운 것은 노인들이 보기에 넘어질 듯 불안해 보이는 외관과 낯선 기계에 대한 울렁증, 선입견으로 인한 거부감이었다. 그래서 세그웨이에 대한 일체의 언급은 하지 않은 채 6월 28일
부모님께 갔다.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먼저 불편한 다리를 위해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의자형 전동스쿠터 이야기를 꺼내니, 역시나 싫다고 하신다. 그럼 미국에서 새로 개발된 이런 것도 있다는데... 라고 하며 준비해간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얘기했다. 반응은 괜찮은데 역시나 필요없다는 얘기...

"좋지만 저런 거 비싸고 괜히 돈 쓰지 마라."

그래서 내가 시승해보는 영상, 손주가 타는 영상을 보여주며 이미 샀고 차에 싣고 왔으니 한 번 타보시라고 권했다. 어린 손자가 쉽게 타고 다니는 영상을 보시더니 괜찮아 보인다며 일단 호감을 보이신다. 일단은 성공. 나머진 직접 타시는 동영상을 보시길...

[덧붙이는 말] 어제(1일) 점심 때 어머니가 세그웨이를 타고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공원까지 산책하고 왔다면서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해오셨다. 세그웨이를 가져다 드린 날에도 잠깐 타보셨지만, 내심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잘 적응하신다는 전화를 받고 나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맙고 감사하다.


○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세그웨이, #왕발통, #1인용 이동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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