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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규의 책상은 마치 지옥 풍경 같다. 책상 전체에 빼곡하고 시커멓게 적고 그려놓은 온갖 단어와 그림들이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 책상 낙서의 흔적들 혁규의 책상은 마치 지옥 풍경 같다. 책상 전체에 빼곡하고 시커멓게 적고 그려놓은 온갖 단어와 그림들이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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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짓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이를테면 시험 기간이라서 공부할 작정으로 페이스북을 접었는데 평소 잘 하지 않던 블로그나 트위터를 기웃거리게 된다거나, 저녁형 인간인데 모처럼 아침을 알차게 보내고 나니 결국 오후에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거나 '뻘짓 총량의 법칙' 등으로 잡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말은 아무리 다른 일들로 눈을 돌린다고 해도 결국 딴짓을 하는 양은 동일하므로 해야 할 딴짓은 반드시 하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잠깐의 딴짓은 줄어들지 몰라도 그것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 바로 중학생 시절이 그 '딴짓 보존의 법칙'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딴짓 없이는 못 사는 시기가 중학생 시절이라고 해도 지나치다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만큼 저지르고 싶거나 꺼내고 싶은 무언가가 내면에 가득 차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 2013년 잡코리아 좋은일연구소가 전국 직장인 남녀 611명을 대상으로 딴짓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아주 흥미롭다.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 직장인의 97.1%가 '업무시간 중 딴짓을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회사에서 딴짓을 하는 이유(복수 응답)로는 나름의 휴식(67.2%)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이어 ▲ 업무가 손에 안 잡혀서(34.2%) ▲ 시간이 남아서(26.2%) ▲ 업무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16.3%) 등의 답변이 뒤따랐다.

중학생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들 역시 수업 중에 혹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등에 온갖 딴짓을 한다.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이 딴짓이 아닌 때가 없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어른들이 있을 터이다. 말 그대로 천태만상. 그 무수한 딴짓 중 가장 원초적인 아날로그 방식에 해당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낙서'다.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크게 표시나지 않고 은근히 즐기면 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 재미가 낙서만 한 것이 없다는 걸 이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부모 세대가 즐겨(?)했던 화장실 낙서 같은 것은 많이 사라졌지만, 교실 안팎이나 책과 공책, 신체 등을 이용한 낙서는 활활 타오르는 진행형이다. 부모 세대가 은밀하고 소심하게 낙서를 즐겼다면 이들은 전시회처럼 '보란듯이' 꺼내놓는다는 게 달라진 양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의 낙서 세상을 좀 들여다보자. 먼저 가장 흔하고 많은 '책상-교과서 낙서형'이다.

낙서, 학생의 내면 드러내는 기록장

민아는 책상에 낙서를 하긴 하는데 매우 화려하게 하기를 좋아한다.
▲ 민아의 책상 민아는 책상에 낙서를 하긴 하는데 매우 화려하게 하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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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빈(가명)이는 수업 시간마다 자주 낙서를 한다. 책상이며 교과서가 낙서로 가득 찼다. 때로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을 한없이 적기도 한다. 교과서와 책상은 금세 지저분하고 더러워지고 만다.

"왜 낙서를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책상도 지우면 되고, 교과서는 이번 학기만 지나면 버리는 건데…."

담임 선생님한테 책상을 깨끗이 사용하라는 지청구를 자주 듣지만 성빈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담임 선생님이 볼 때는 지우면 되고 안 볼 때는 다시 낙서장으로 활용하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낙서를 못하게 하는 게 기분 나쁠 뿐이다.

민아(가명)는 책상에 낙서를 하긴 하는데 매우 화려하게 하기를 좋아한다. 자유롭게 붙이고 뗄 수 있는 메모용지를 크기별, 색깔별로 활용해 무지갯빛 책상을 만들어 놓고 그걸 가꾸고 보기를 즐긴다. 알록달록 꾸민 책상을 보면 화장을 예쁘게 마친 후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민아의 말이다.

성빈이나 민아 정도면 그래도 봐 줄만 한데 혁규(가명)처럼 되면 상황이 좀 심란해진다. 혁규의 책상은 마치 지옥 풍경 같다. 책상 전체에 빼곡하고 시커멓게 적고 그려놓은 온갖 단어와 그림들이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수업 시간에 책을 펴놓고 앉아 있기보다는 엎드려 자는 일이 더 많았으니 책상으로서의 기능보다는 혁규의 마음을 드러내는 공간이 돼버린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워낙 낙서가 심해 몇 번 책상을 교체한 혁규의 낙서 중 일부를 살펴보면 '왜 살아' '나가 뒤져' '맨날 교무실 가냐?' '키 작아? O나 작아?' '쪼다야 븅신아'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써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혁규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괴롭고 힘든 일들이 가정과 학교 등에서 많(았)다는 것을, 혁규에게 무언가 큰 마음의 상처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도 남을 것들이었다.

결국 혁규는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판정을 받았고, 그로부터 한 달이 좀 지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고 말았다. 무슨 생각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혁규 부모의 선택이었다. 이처럼 책상 낙서는 딴짓을 넘어 학생의 내면을 드러내는 기록장이 되기도 한다.

"답답해, 나도 좀 살자"... 하소연 대신하는 낙서들

예은이는 책상 모서리에 ‘나도 좀 살자. 제발 숨이라도 쉬자’라고 적어 놓았다. 세상에서 다들 무서워하는 중2가 책상에 적어놓은 말로는 너무 끔찍했다.
▲ 수민(위), 혁중(왼쪽), 예은(오른쪽)이의 책상 낙서 예은이는 책상 모서리에 ‘나도 좀 살자. 제발 숨이라도 쉬자’라고 적어 놓았다. 세상에서 다들 무서워하는 중2가 책상에 적어놓은 말로는 너무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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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예은(가명)이의 책상에 적힌 낙서를 발견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 이를 테면 부모가 갑자기 이혼을 했다거나, 가기 싫은 학원에 억지로 밀어 넣는 엄마와 갈등이 커졌다거나, 친구들 사이가 틀어져서 외톨이가 됐다거나 하는 등등 -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예은이는 책상 모서리에 '나도 좀 살자, 제발 숨이라도 쉬자'라고 적어놨다. 얼핏 보면 시험에 지친 고3 수험생이나 대입 재수생 혹은 고시생 아니면 출구 없는 고단한 삶에 나가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어른의 독백 같았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아니, 세상에서 다들 무서워하는 중2가 책상에 적어놓은 말로는 너무 끔찍했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 같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예은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점심 먹고 함께 운동장을 거닐고 싶다고. 영문도 모르면서 예은이는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라면서 흔쾌히 동의했다.

운동장을 거닐며 예은이가 들려준 대답은 생각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예상했던 대로 학원 문제 때문에 엄마와 갈등이 커져서 매일 싸우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 학교생활이 별로 재미가 없다는 것, 친구 미령이와 좀 다퉈서 아직 서먹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 그런 정도였다. 혹시 말하지 않은 다른 사정이 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은이는 그날 이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은이의 낙서를 잊어갈 때쯤 다른 반 수민(가명)이가 노란색 접착식 메모지에 '답답해'라는 세 음절을 또박또박 큼지막하게 적어서 책상에 붙여놓은 걸 또 보고 말았다. 혼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이번에는 그냥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풀어달라는 구조 신호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종이에 적어 책상에 붙여 두는 것으로 해소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민이도 며칠 후에는 '답답해' 종이를 책상에서 떼어냈다.

남학생인 혁중(가명)이는 하얀 페인트를 칠한 교실 벽에 연두색 펜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는데 그걸 본 순간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혁중의 책상 옆 교실 벽에는 "내 아를 나아둬. -우리 아버지-"라고 적혀 있었다.

혁중이는 집안 사정으로 서너 달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새로 적응을 하는 데 힘들어 하는 중이었다. 두발과 복장은 물론 학교생활 전반을 두고 자신을 꾸중하는 엄하기만 한 담임 선생님과 갈등도 커질 대로 커진 상황이기도 했다. 속상하고 화도 난 김에 혁중이는 제발 자신을 좀 그냥 놓아두라는 메시지를 교실 벽에 남긴 것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아버지를 모셔다 놓았으니 이 절박한 호소 앞에 웃음이 터지는 건 당연지사.

애도 어른도 아닌 열다섯 살... 낙서 통한 수다와 고백

 낙서 대신 깨끗이 정리한 책상에 "0416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노란 스티커를 단정하게 붙여놓고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살을 빼야한다며 ‘간식 금지’ 아크릴판을 책상에 붙여놓은 녀석도 있다.
 낙서 대신 깨끗이 정리한 책상에 "0416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노란 스티커를 단정하게 붙여놓고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살을 빼야한다며 ‘간식 금지’ 아크릴판을 책상에 붙여놓은 녀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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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말고도 낙서 대신 깨끗이 정리한 책상에 "0416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노란 스티커를 단정하게 붙여놓고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살을 빼야 한다며 절대로 학교 매점에 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간식 금지'의 메시지를 담은 아크릴판을 책상에 붙여놓은 녀석도 있다.

몸에 문신이나 타투 같은 것을 새기기 좋아하는 유행을 좇아 팔이나 얼굴에 볼펜이나 형광펜으로 그림 등을 그리는 '문신형'도 있다. 승천하는 용을 그렸다면서 내미는 팔에는 미꾸라지조차 닮지 않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검은 펜의 흔적만 남아 있다거나, 친구의 얼굴을 손등에 그렸는데 정작 그 친구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거나 하는 일도 흔하다. 다쳐서 피가 난다며 내민 손등도 빨간색 펜으로 정교하게 그려 넣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기도 했다.

이렇듯 이들은 책상이나 교과서뿐만 아니라 교실 안팎의 모든 것, 심지어는 자신과 친구의 몸까지도 낙서의 대상으로 삼는다. 낙서라고 해서 반드시 글씨로만 하는 것도 아니며 그림이나 다른 부착물을 붙이는 것으로도 진화했다.

낙서를 일종의 수다요, 수런거림 그리고 고백이며 폭로라고 한다면 이들의 낙서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학교라는 제한되고 억압적인 공간과, 열다섯 살이라는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나이에 맞닥뜨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들에게는 끊임없는 수다와 고백, 폭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걸 통해서 그들 나름대로는 아프고 즐겁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하루 예닐곱 시간을 갇혀 있는 학교라는 공간이 이들에게 더욱 낙서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열린 듯 갇힌 공간에서 중학생들은 낙서로 서로 소통․공감하며, 수다를 떨기도 하고 억눌린 마음을 고백하거나 폭로하고 있는 것인지도. 부모나 교사 혹은 다른 어른들이 그걸 알거나 모르거나 전혀 상관 않고 말이다. 중학생들의 낙서를 공부하기 싫어서 하는 '딴짓'이라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에 문신이나 타투 같은 것을 새기기 좋아하는 유행을 좇아 팔이나 얼굴에 볼펜이나 형광펜으로 그림 등을 그리는 ‘문신형’도 있다.
▲ '문신형' 낙서의 흔적들 에 문신이나 타투 같은 것을 새기기 좋아하는 유행을 좇아 팔이나 얼굴에 볼펜이나 형광펜으로 그림 등을 그리는 ‘문신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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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중학생, #중2병, #낙서,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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