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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2012년 12월 18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박정희, 육영수 사진을 들어보이며 박 후보를 응원하고 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2012년 12월 18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박정희, 육영수 사진을 들어보이며 박 후보를 응원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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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0대를 대상으로 하는 여론조사는 없는 거죠? 투표권이 없으니, 아이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도 없다고 여긴 걸까요?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라면 모를까, 알 건 다 아는 고등학생 정도는 투표권도 없는 마당이니 여론조사 대상엔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든 대통령도 미래 세대인 우리들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겠어요?"

매일 아침 교실보다 도서관을 먼저 찾아오는 경준(가명)이가 말을 걸어왔다. 이태 전 시도 교육감 선거가 한창일 때, 자신들의 학교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선거인데도, 되레 어른들만 투표하는 건 잘못됐다며 목청을 높였던 아이다. 책임지지도 않을 어른들이 수백 만 아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셈 아니냐며, 교사인 나를 참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조간신문에 난 대통령 지지율 분석 기사를 읽은 듯하다. 언제부턴가 여론조사 관련 기사는 날씨 정보 마냥 모든 신문의 정기적인 꼭지로 자리를 잡았다. 여론조사 결과는 늘 1면 머리기사로 실리고, 포털에서도 늘 검색어 순위의 상위권에 배치되니, 아이들도 시나브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아예 대통령 지지율 등락 수치를 구구단 외듯 꿰고 있는 아이도 있을 정도다.

여론조사 관련 전화를 받아본 사람이면 안다. 특히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도중 걸려온 전화는 응대하기는커녕 애먼 수화기에 대고 버럭 화를 내기 일쑤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데 한 주가 멀다 하고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걸 짜증내던 나 같은 사람들도, 요즘 들어선 재미라도 붙인 듯 여론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아이들끼리도 화제가 되니 말이다.

경준이가 특별히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아이는 아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축구와 게임을 좋아하고 '수능 대박'을 꿈꾸는 평범한 고3이다. 조금 남다른 점이 있다면, 신문 사랑이 유별나다는 것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껏 만난 아이들 중 신문을 밑줄 그으며 정독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더욱이 고3이 '한가하게' 신문에 빠져있다면, 필경 주위로부터 '대포자(대학포기자)'라며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아무튼 매일 아침 신문 읽기는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됐다. 비록 지난 3년간 모의고사 점수 올리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됐을지는 몰라도, 신문은 자신에게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살아있는 지식과 세상을 보는 눈을 주었다며 뿌듯해했다. 그런데,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언론사들의 여론조사에도 저의가 숨어있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진짜 여론을 조사하는 게 아니라, 여론조사라는 이름으로 여론을 그들의 입맛대로 끌고 가려는 것 같아요. 여론을 조장한다고나 할까요. 그럴듯한 분석을 내놓으며 자신의 입맛대로 추이가 나올라치면, 그제야 '민심은 천심이고, 여론이 곧 민심'이라며 설레발을 치는 거죠. 대다수 사람들은 가엾게도 그들의 장단에 맞춰 덩달아 춤을 추는 거고.

더욱 큰 문제는 여론조사가 마치 스포츠 중계 마냥 상품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것과, 힘 있는 언론사들과 전문가입네 하는 여론조사 기관들이 하나같이 권력에 빌붙어있다는 거죠. 뉴스를 오로지 종편 방송을 통해서만 얻는 할아버지 세대의 꿈쩍이지 않는 대통령 지지율은 사실 그들에게 휘둘린 결과 아닐까요? 까놓고 말해서, 그들의 가엾은 '먹잇감'인 셈이죠."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욕설과 은어를 넘나드는 그의 말을 여기에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내용만 빼고 들으면 '일베'의 언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편으론 '다행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놀랍게도', 수치로만 놓고 보면 할아버지 세대 대부분은 대통령'빠'라면서도 그들을 이해 못할 건 없다고 했다. 그들 역시 종편과 여론조사 때문에 우리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피해자라는 거다.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누기 전엔 여태껏 단 한 번도 여론조사에 대해 일말의 관심을 가져본 적 없었다. 혹 전화가 걸려오면 귀찮아 바로 끊었고, TV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내보낼라치면 채널을 돌려버리기 일쑤였다. 고백하건대, 이 땅 어르신들의 '확고부동한' 지지율이 무너지기 전에는 대통령의 일방통행을 멈추기란 백년하청이라고 그저 게으르게 여겨왔을 뿐이다.

그의 말마따나, '한결같은 패턴'을 보이는 여론조사를 이제 그만 보여줄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스포츠 중계도 이변이 있어야 눈이 가는 법, 추이와 결과가 너무도 빤한데 모든 방송사들이 낡은 레코드 마냥 틀어대는 건 전파 낭비 아닐까. 도리어 여론조사 결과가 시나브로 옅어지고 있는 세대와 지역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진 않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세월호 참사와 코미디가 따로 없던 인사 파동, 최근의 메르스 사태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은 추락했다가도 '예상대로' 늘 오뚝이처럼 40% 언저리에 복귀하곤 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 흑사병이 돌고, 핵전쟁이 난다 해도 변함없을 거라고 말한다. 배우자에 대한 영원한 사랑은 의심해도, 대통령에 대한 그들의 지지는 영원할 거라고도 확신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정작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이 땅의 20대와 30대의 10%대 지지율 또한 '콘크리트'라는 사실이다. 조금 섣부를지는 모르나,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라는 50대와 60대의 지지율 못지않은 '맹목성'을 보인다. 머지않은 때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청년 세대에 의해 철저히 '배척당한' 지도자로 역사에 낙인찍히지 않으려면, 그들의 성난 민심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극과 극'을 달리는 지지율은 사회 통합의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경제적 양극화만큼이나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온갖 갈등이 첨예한 우리 사회에서, 같은 40%라도 세대를 넘어 고르게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바람직하리라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도 입만 열면 '국민 통합'과 '애국심'만을 외치는 대통령의 언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준이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10대의 지지율이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투표를 통해 정치적 호불호를 표시할 수 없는 아이들은, 그들이 누려야 할 모든 권리가 어른들의 손에 달려있음을 깨달아가고 있다. 그가 시도 교육감 선거 때 더욱 절실히 느꼈던 것처럼, 투표권이 없다는 체념은 미래 세대인 그들에게 우리 사회에 대한 무력감과 냉소를 부추긴다.

그는 10대의 대통령 지지율이, '일베충'들처럼 개념 없이 장난치는 게 아니라면, 기껏해야 5%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에게도 어린 일가 친인척과 '사돈의 8촌'은 있을 것 아니냐며 나름 후하게 준 수치란다. 그렇게 낮을 거라고 보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뭘 해도 '촌스럽다'는 거다. 세간의 지적대로,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아니면 독선과 아집, 불통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영화 속 국기 하강식 장면에서 뜬금없이 애국심을 떠올리고, 최근 빨간 코팅 장갑 끼고 가뭄 논에 소방 호스 들이대는 퍼포먼스를 두고는 '쪽팔리다'고까지 말했다. 애국을 독점하며 '대한민국과 결혼했다'고 말하는 대통령의 말에 어른들이야 환호할지는 몰라도, 10대들의 하나같은 반응은 '이건 뭥미'라는 거다. 요즘 아이들에게 대통령은 조롱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0대 중에서 이름 뒤에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애써 붙이는 아이도 없지만, 또래들 중 누군가 그랬다면 따돌림을 안 당하면 다행일 정도라고 한다. 일전 수업시간 좋든 싫든 국가 원수로서 호칭에서도 예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가, 외려 아이들로부터 '박(근혜)빠'냐며 놀림을 당한 적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특정 동물에 빗대 부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최고 지도자에 대한 조롱을 그저 어린 아이들의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눙치기에는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다. 아이들이 담임교사를 '꼰대'나 '담탱이'라 부르며 뒷담화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 정치를 넘어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신호이며,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이 시나브로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징후다.

이럴진대, 허구한 날 애국심만 부르대는 대통령의 '훈화'를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비록 뒷담화일지언정 '너나 잘 하세요'라며 비웃을 게 틀림없다. 기성세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애국'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조차 어색해하는 세대다. 태극기 게양을 생활화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무궁화를 심는다고 없던 애국심이 생겨날 리 만무한데, 그런 '촌스러움'이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다.

오늘도 스팸처럼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오고, 내일이면 모든 언론에서 호들갑 떨며 대통령 지지율 추이를 중계할 것이다. 지금껏 여론조사에서 늘 배제돼온 아이들이지만, 경준이의 말처럼, 과연 대통령은 그들의 생각을 궁금해 하기는 할까? 죽비마냥 나를 일깨워준 그에게 고맙다. 이쯤 되니 그 또래에게 여론조사 대상을 넘어 투표권을 줘도 좋다 싶다.

○ 편집ㅣ이준호 기자



태그:#대통령 지지도, #여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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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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