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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진격의 대학교>에 제기된 문제점들을 바탕으로 구성한 2025년 가상의 상황입니다. 등장하는 고유명사와 설정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 대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만약 무언가가 떠오른다면 이는 기막힌 우연의 일치입니다. - 기자 말

"취업률을 다 깎아 먹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낙성대학교가 대학 평가 1위를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신촌대, 안암대를 보세요. '인문학부'를 아예 없애고 '창조학부'를 신설했잖아요."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진격의 대학교>
▲ 책표지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진격의 대학교>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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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부총장이 입을 뗐다. 그는 정작 식품영양학과 교수였지만 평소 '법인세가 과도하다'며 종편에 출연하는 단골 논객이었다. 다음 총선에서 여당의 비례대표 앞 순번이 유력하단 소문이 돌았다. 대기업에서 맡기는 연구용역도 모두 그의 차지였다. 그 때문인지 발언에 힘이 실렸다.

총장은 고민했다. 이미 융합이란 이름으로 상당수의 순수학문이 사라졌다. 어학만으로는 장사가 안 되니 '국제비즈니스랭기지학부', 행정학만으로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니 '5급공무원학부', 이제는 그마저도 힘드니 '심리철학힐링학과'를 아예 없애자는 논의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다.

교양 과정은 취업에 필요한 스킬을 습득하는 시간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강사는 '스피치컨설턴트'니, '자소서전문가'니 학문보단 배경으로 채용했다. 이런 강의의 평가가 높으니, 자연히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은 강의들은 도태됐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취업 27종 세트'에 적합한 강의들이 살아남았다. 20년 전만해도 '3종'에 불과하던 '취업세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교양 강의에서는 '기업에 따라 8:2가르마냐, 9:1가르마냐, 회색 양복(물론 강사는 이를 세련되게 '챠콜그레이'라 칭한다)이냐, 남색 양복이냐'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 알려줬다. 취미는 활동적인 기업에는 적당한 '야외활동'을 쓰는 법, 혹은 연구원에 지원하는 이들에겐 '뮤지컬 감상이나 독서'를 권했다. 1년 성인 독서량이 5권도 안 된다지만, 강사는 친절히도 최근 베스트셀러였던 <혁신을 넘어 창조경제> <다시 새마을운동이다> 따위의 책 줄거리까지 설명해준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교양 강좌로 조사된 '자소서로 취업 엎어치기'에서는 꼭 '시민단체 참여 경력은 숨길 것'을 첫 시간에 알려준다. 기업에서는 튀는 인재를 싫어한다는 이유다. 그런데 철학과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 이런 경향에 부합하지 않는단 평가도 뒤따랐다. 여러모로 철학과는 대학에서 쓸모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기준을 효율성의 잣대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마이너스일 뿐이다.

"나는 경영학과 학생이다. 내가 현재 듣는 수업 중에서 그나마 인문학에 가장 근접한 것은 '교육학개론'이다. 처음에는 순수한 이유에서 듣고자 했다. 경영학이 좀 삭막하니까, '교육'이라는, 수치화할 수 없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학문을 접해보고 싶은 나름의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몇 번 수업을 듣고 나니 회의감이 밀려왔다.

어느새 '이걸 배워서 어디에 써먹지'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교육학 본연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노력은 사라졌다. 자소서에 이 과목을 통해 깨달은 바를 경영학과 '융합'이라는 말을 섞어가며 쓸 궁리나 하고 있었다. 수업에서 튀어나오는 심리학 이론과 유교사상에 대해 듣고는, 저런 걸 '활용하면' 인문학적 교양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 <진격의 대학교>에서

'훈민정음'도 영어로, 기업총수에겐 '명예박사'를

서울지역대학생교육대책위 소속 학생들이 지난 2014년 3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정부의 대학구조개혁제도와 대학재정문제, 학사관리제도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 서울지역대학생교육대책위 소속 학생들이 지난 2014년 3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정부의 대학구조개혁제도와 대학재정문제, 학사관리제도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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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사라지는 학문이 있는 반면 필수 이수해야 하는 학문도 생겼다. 낙성대는 학과를 불문하고 재학생 모두가 '기업에서 바로 써먹는 회계'를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한 기업체 총수의 "둘산대 애들 뽑아놓으니 숫자는 좀 알더라"란 한 마디에 모든 대학에서 앞 다퉈 필수 과목으로 '회계'를 개설했다. 낙성대도 이런 기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영어 강의도 인기다. 모든 학과에서 영어 강의가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제국문학과'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영어로 풀어 강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불어'든 '독일어'든 할당된 영어 강의 시간에는, 해당 언어를 영어로 강의해야 한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5급공무원학부'의 '현대한국사회론' 시간에 영어가 유창한 학생이 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교수는 당최 '후뤄얄'이란 발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Pardon?"이라고 묻자 갑자기 학생은 한심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교수님, Royal이요, Royal! R, O, Y, A, L!" 강의실은 학생들의 키득대는 소리로 가득했다.

대학이 사회의 교육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대학이 사회의 교육적 가치를 올바른 쪽으로 이동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은 '영어만 했더니 대학 가서 죽도 밥도 안 되더라!' '영어가 다가 아니더라!'는 '미담'을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 그럴 때 사회도 대학에 존경을 표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 <진격의 대학교>에

현재 대한민국에서 낙성대학교가 그나마 철학과의 맥락을 '심리철학힐링학과'로 잇고 있는 유일한 대학이었다. 이제 철학은 하나의 학문이라기 보단 '동네 문화센터 시민강좌'나 '길거리 인문학 특강'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물이 됐다. 철학책을 보는 사람은 '세상물정 모르는 샌님'이란 모멸의 말을 들어야 했다.

대학은 자신들에게 '취업률'이란 선물을 준 기업총수들에게 앞다퉈 '명예박사'를 수여한다. 낙성대도 얼마 전 '어륀지어학관'을 지어 기증해준 기업 총수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일부 학생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수여식을 마무리했다.

사실 총장도 이미 철학과가 오래 전에 사라졌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졸업생과 재학생을 비롯한 학생들과 몇몇 시민단체가 물고 늘어지니 섣불리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기업'에서 '대학 산업군' 1위와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의 CEO'를 다른 대학에 빼앗기고 말았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 '철학과'는 사라졌다

지난 2010년 4월 8일 오전 중앙대학교 학생 2명이 한강대교 남단 첫번째 아치에 올라 '중앙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가 적힌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1시간 가량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지난 2010년 4월 8일 오전 중앙대학교 학생 2명이 한강대교 남단 첫번째 아치에 올라 '중앙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가 적힌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1시간 가량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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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각 학과장들이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철학과! 취업률 까먹는 학과는 없애야 한다, 이기야."

얼마 전, 전직 대통령을 비하하는 시험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교수였다. 당시 '애국보수'를 자처하는 한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 교수를 '시대의 지식인'으로 칭송하는 글이 자자했다. 이런 자부심 때문인지, 이 교수는 현실에서도 '나만의 화법'이라며 해당 커뮤니티의 말투를 종종 써오곤 했다.

10년 전, 어떤 책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세월호가 침몰하자 기성세대는 책임감 운운하며 비통해했다. 하지만 몇 달도 지나지 않아 '경제를 살릴 골든타임에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는 해괴한 논리로 무장했다. '성장'에 대한 맹신이 빚어낸 최악의 결과를 눈으로 보고도 또다시 '경제저울'을 끄집어내는 이들이 놀랍고 끔찍하지 않은가? 지금이야말로 대학의 역할이 막중하다. - <진격의 대학교>에서

세월호 참사 1년 후, 대한민국을 '메르스'가 강타했다. 이 책이 메르스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섭도록 똑같은 일이 재현됐다. 후에 대학 문제에 대해 당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희망찬 교육이라는 것과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정부가 확실하게 우리 모두 힘써서 청년들이 밝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사회생활을 할 때 가장 큰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을 이렇게 돼서 그것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투명하게 이제 대학이 다시 서야하는 이유는 내가 분명히 알겠다."

당시 국민들은 이를 '취업사관학교가 된 대학 문제에 대해 심히 공감하고 있으며 이를 바로잡겠다'로 해석했지만 이는 오해였다. 결국, 2025년 대한민국에서는 '선비들의 학문'이란 철학과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기업가정신학과'가 신설됐다.

덧붙이는 글 | <진격의 대학교> (오찬호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015.04 / 1만 4500원)



진격의 대학교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오찬호 지음, 문학동네(2015)


태그:#진격의 대학교, #오찬호,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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