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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윤양이 하버드·스탠퍼드 두 곳에서 '동시 입학' 특별 제안을 받았다고 보도한 6월 2일자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 화면 캡처
 김정윤양이 하버드·스탠퍼드 두 곳에서 '동시 입학' 특별 제안을 받았다고 보도한 6월 2일자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 화면 캡처
ⓒ 워싱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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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왜들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한낱 고3 유학생의 거짓말에 놀아난 '기레기'들보다 허구한 날 '엄친아', '엄친딸'과 비교하며 달달 볶아대는 우리 엄마가 더 미워요. 엄마 눈엔 그런 기사만 보이나 봐요."

수업을 시작하려니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대뜸 '천재 소녀' 이야기를 꺼냈다. 기사가 난 후 집에서 기막힌 일을 겪었다는 거다. 엄마가 여기저기서 관련 기사 스크랩한 것을 읽어보라며 보여주시더란다. 그 덕분에(?)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의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유학생 비율, 진학 코스와 유학비용 등을 줄줄이 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나중에 더 들어보니, 그날 그의 어머니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두 대학의 큼지막한 교표를 그의 방 책상 양 옆에 붙여놨단다. 원래 거기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이라는 중학교 시절부터 품어온 자신의 좌우명을 걸어둔 자리였단다. 그걸 본 직후 '엄마 아들, 그런 천재 아니'라며 화를 냈다는데, 며칠 뒤 서울 사는 고모로부터 엄마가 스크랩한 것과 똑같은 '정보'를 받아들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단다.

"하버드·스탠퍼드가 '메르스'보다 셀 줄은..."

"하버드와 스탠퍼드가 '메르스'보다 셀 줄은 정말 몰랐어요. 거짓으로 들통이 날 때까지 며칠 동안은 '천재 소녀'가 모든 방송과 신문의 주인공이었잖아요. 그 학생 아니었으면,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고등학교 이름도 저희가 어찌 알았겠어요. 미국에선 학교명에 대통령 이름도 가져다 쓴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어쨌든 사회 공부 제대로 한 셈이네요."

"우리나라에서 학벌의 힘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 같아요. '메르스' 감염 위험 때문에 병원엔 안 가도, 서울대 입시 설명회에는 꼭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하물며, 하버드와 스탠퍼드라고 하니, 거기는 '천상의 대학'이고, 거기에 합격한 아이들은 기사의 제목처럼 단숨에 '천재'로 등극하는 거죠."

"또 하나의 '일베 현상'일 뿐이에요. 아무렴 그게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이라는 걸 몰랐겠어요. 수많은 언론들이 카메라 들이대고 관심을 보여주니 그도 더 신이 나서 날뛴 거잖아요. 그도 그지만, 세월호 참사 때 연이은 오보로 '기레기'라는 조롱을 들었으면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언론이 더 큰 문제라고 봐요."

"요 며칠간 우리나라를 들었다 놨다 한 그 여학생을 두고 '관심병 환자'네, '유학생 일베'네 욕들 하지만, 저는 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둔하자는 건 아니지만, 오랜 시간 주위로부터의 과도한 기대가 불러온 일탈이 아닐까 싶어요. 제 주변에도 그런 스트레스를 겪는 친구들이 적지 않거든요."

수업시간 느닷없이 '천재 소녀'가 도마 위에 올랐고, 아이들의 이야기는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런데 놀라운 건, 비난의 화살이 언론들 앞에서 대담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그 '천재 소녀'에게로 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개 '용인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며 그도 어쩌면 피해자일 수 있다'고 두둔하는 아이도 있었다.

"남미나 동남아의 대학이었어도 저랬겠나"

대신, 사실 확인이라는 언론의 기본적 사명조차 망각한 '기레기'들에 대한 조롱과 학벌 앞에 사족을 못 쓰는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가 쏟아졌다. 한 아이는 세월호 참사가 수백 번 일어나고, '메르스'가 수천 번 창궐해도 그들을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이미 대한민국에 대한 희망을 접은 지 오래라고 말하는 '시크'한 아이도 더러 있었다. 그들에게 분노는 절망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이 기자였다는 한 아이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표현을 써가며 우리나라 언론을 나무랐다. 모든 언론의 '조중동'화. 그가 내린 한 줄 평이다. 시청률 경쟁 때문인지 지상파 방송조차 시나브로 종편을 닮아가더니, 요즘엔 종편보다 더 종편 같은 방송이 됐단다. 작년 세월호 참사 직후 기자직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는 그는 이젠 그 미련조차 버렸다고 했다. 한 번 '기레기'는 영원한 '기레기'일 뿐이라고.

그러나 '기레기' 언론의 호들갑이 일을 키운 건 맞지만, 철옹성 같은 학벌 구조가 깨지지 않는 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계속될 것이라고 아이들은 이구동성 말했다. 한 아이는 미국의 하버드와 스탠퍼드가 아니라 남미나 동남아의 대학이었어도 저랬겠느냐며, 만약 거짓말을 한 그가 '관심병 환자'라면 우리나라 기성세대 대부분은 '학벌 중독증 환자들'이라고 못 박았다. '메르스'보다 더 전염성이 강하고 세대를 뛰어넘는 위험한 불치병이라면서.

여전히 서울대 합격자 수로 명문고인지를 판가름하고, 명문고에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자녀의 능력과 수준, 흥미와 적성에 대한 분석이나 이해는 접어두고, 일단 명문고에 들어가면 덩달아 자녀도 서울대에 근접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하고도 황당한 믿음 때문이다. 2천여 년 전 '맹모삼천지교'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해석된다.

'모든 게 다 너를 위해서'라며 둘러대지만, 기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자녀의 학벌에 '올인'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과거에는 부모의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서라고 했다지만, 지금은 자녀의 최종 학력이 부모 세대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시대다. 학벌이 더 이상 입신양명을 보장해주지 않는 요즘, 단 한 가지 이유만 남아있을 뿐이다.

'명문대 재학생' 제자의 한마디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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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들은, 저 옛날 봉건 시대 남편의 벼슬을 따라 부인의 직함이 정해지듯, 자녀의 학벌에 따라 부모의 위상이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 담임교사 시절 만난 한 학부모는 '자녀를 서울대에 보낸 부모'라는 소리 한 번 들어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 말할 정도다. 평범한 부모로서 그는, 서울대 합격이야말로 자녀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 아니겠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명문대 합격 현수막이 가문의 이름으로 동네 어귀마다 내걸리고, 당신들의 살아온 삶보다 자녀의 학교생활과 성적이 그들 대화의 주요 이야깃거리가 되는 곳이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멀쩡한 자기 이름 대신 누구누구의 엄마, 아빠로 불리는 건 그래서 더 당연해 보인다. 그러는 사이 자녀들은 가랑비에 옷 젖듯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며 자라난다.

더욱이 끝내 가닿지 못할 학벌을 향한 그들의 맹목적인 집착은 되레 이미 우리 사회의 '괴물'이 된 학벌 구조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교육은 신분 이동의 사다리로 기능하기는커녕 계급 재생산의 도구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모두가 명문대에 목매다는 사이, 학벌은 눈먼 사회적 합의이자 기득권을 유지시키려는 일종의 '증명서'가 됐다.

무엇보다도 학벌 구조의 가장 큰 병폐는, 대학입시를 공부의 종착역으로 삼게 했다는 점이다. 오매불망하던 명문대에 합격한 이상 더는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입시란 별도의 갱신이 필요 없는 '평생 인증'이거나, 일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 글씨' 둘 중 하나다. 공부하기 위해 대학 간다는 아이는,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다.

진도는 못 나갔지만, 잠자는 아이 하나 없는 수업다운 수업을 마치니, 머리를 짧게 깎은 졸업생 제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휴가 나와 잠깐 학교를 찾아온 거란다. 방금 전 '천재 소녀'를 주제로 아이들과 난상 토론을 벌이다 왔다고 하니, 다 부질없다며 후배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다. 그런 그도 동기들 중 몇 안 되는 명문대 재학생이다.

"후배들이 보기엔 'SKY(서울대, 고대, 연대를 일컫는 영문 이니셜)' 다닌다고 하면 대단해 보이겠지만, 남들 앞에 '가오' 세우는 것도 길어야 4년이죠. 요즘 같은 시대에 졸업하면 처지가 '도찐개찐'이에요. 솔직히 말해 차이라면, 명문대 나온 백수와 '지잡대' 출신 백수 정도랄까요? 그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부모님도 자녀가 명문대 나와 놀고 있다는 걸 되레 부담스러워 하게 될 거라고 들려주세요. 선생님도 잘 아시면서."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천재 소녀, #학벌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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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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