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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거실로 온다. 세 아이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다.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 있기는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 짧은 시곗바늘은 아직 오전 7시 전이다.

"얘들아, 엄마 간다."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를 확인한 아내가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한 마디 던진다. 아이들이 스프링처럼 일어난다. 눈을 비비고 비척거리면서도 끌리듯 현관으로 간다.

곧 애틋한 '이별식'이 연출된다. 엄마 빠이빠이. 얘들아 사랑해. 엄마 몇 시에 와? 일찍 올 거야. 정말이지? 그럼, 약속할게. 문이 열리고 아내가 사라진다. 오전 6시 45분쯤이다.

첫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한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와 막내는 7살, 5살이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한다. 중학교 교사인 나는 오전 8시 20분, 종합병원 수간호사인 아내는 오전 7시 10분이 출근 시각이다.

아내는 오전 6시 전후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 뒤 곧장 집을 나선다. 아이들과는 '이별식'에서 잠시 함께한다. 온 식구가 함께 아침을 먹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 오전 6시 전후로 일어나 수저 들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이 힘겹고 입이 까칠한 시간이다.

투정 부리는 막내... 언제까지 달랠 수도 없고

아이들 아침은 내 책임이다. 아이들 스스로 알아서 많은 것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첫째와 둘째는 일어나 세수하고 옷 입기까지 내 손을 빌리지 않는다. 두어 달 전부터는 5살짜리 막내도 언니, 오빠의 '알아서 스스로' 대열에 합류했다.

'학생'이 아니어서일까. 둘째와 막내가 가끔 투정을 부린다. 전날 잠자리에 조금 늦게 들어 기분이 안 좋거나, 제 엄마와 '빠이빠이'를 주고받지 못했을 때다. 막내가 심하다. 며칠 전에는 옷을 세 번이나 바꿔가며 입었다. 옷이 맘에 안 든다며 부리는 투정이었으나 실은 평소보다 몇 분 늦게 일어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턱걸이하듯 출근시간을 맞춘 그날은 종일 정신이 없었다.

지난 3월에는 현관문을 열어놓고 출근한 적도 있었다(!). 역시 막내가 '원인 제공자'였다. 제 엄마와 이별 장면을 연출하지 못한 날이었던 듯하다. 현관 앞에 주주물러 앉은 막내는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평소 잘 따르는 제 언니 말도 듣지 않았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는데 어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막내를 들쳐안고 승강기에 올랐다. 열어놓은 현관문을 그대로 둔 채로. 평소 큰딸이 전기 콘센트와 창문, 가스 밸브, 현관문을 꼼꼼히 챙긴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제 후배와 함께 등교한다고 다른 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먼저 집에 돌아온 큰딸에게서 문이 열려 있다는 전화를 받고는 내내 우울했다.

어린이집 갈 준비하는 막내
 어린이집 갈 준비하는 막내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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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바뀌었으니 알아서 잘 따라오라는 격

원래 아내 출근 시각은 오전 7시 40분이었다. 지금처럼 바뀐 건 올해 초부터였다. 병동 과장들의 근무 시간이 일찍 당겨지면서 병원 전체 근무 시스템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요구에 맞춰 회진 시간을 조정해 주자는 차원에서였던 모양이다.

근무 시간 조정 과정에서 직원들과의 협의는 없었던 것 같다. 맞벌이를 하는 직원들 각자의 개인사정은 거의 무시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직의 시스템이 바뀌었으니 알아서 맞춰가며 따르라는 식이었을 게다.

출근 시간이 당겨지더라도 퇴근 시간이 그에 맞춰 조정되면 그런대로 괜찮다. 그런데 시스템이 바뀌었으니 그에 발맞춰 일을 더 열정적으로 하자는 취지에서였을까. 오히려 각종 회의며 연수가 더 늘어났다. 아내 퇴근 시간이 '칼같이' 지켜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루 8시간 근무는 언감생심이었다. 오후 6시 전후 퇴근이 보통이었다.

아내의 노동환경... 참 열악하다

점점 열악해지는 보건의료노동자들의 노동환경(자료사진).
 점점 열악해지는 보건의료노동자들의 노동환경(자료사진).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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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같은 보건의료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열악하다. 국·공립병원과 동네의원 등 보건의료 사업장의 여성노동자들이 임신기간에 하루 평균 10시간 가까이(9.8시간) 일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보인다. 아내는 하루에 거의 12시간을 일했으니 평균 아래의 '악성' 조건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셈이다.

간호사 5명 중 1명은 근무하는 병원이 부서장 지시 아래 임신 순서를 정하는 '임신 순번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답했다는 믿기지 않는 결과도 있었다. 지난 2014년 10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2014년 3∼5월 국내 62개 의료기관의 노동조합 조합원 중 최근 5년 내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 조합원 1800여 명을 대상으로 모성보호 실태 등을 비롯한 근로 전반을 살핀 조사에서였다(<한국일보> 2014년 10월 10일자 "임신 순번도 정하는데 육아휴직은 그림의 떡" 기사 참조).

일 많이 하기로 정평이 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201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2163시간이다. 평균 1770시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멕시코(2237시간) 다음으로 길다. 통계치가 있는 1980~2007년까지 27년간 줄곧 노동시간 1위를 차지하다가 2008년부터 멕시코에 그 자리를 넘겨줬다고 한다.

노동 환경도 좋지 않다. 노동 현장에서 각종 재해로 죽는 노동자들이 10만 명당 20.99명으로 OECD 21개국 중 1위라고 한다. 하루 5명가량이 일을 하다가 죽는 셈이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노동조합은 조직률이 10.3%에 불과하다. OECD 33개국 가운데 30위로 거의 꼴찌다.

삶의 여유와 보람, 행복을 찾기 힘든 노동 현실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각종 지표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자살률(10만 명당 33.3명)은 OECD 회원국(평균 12.6명) 1위다. 무려 9년째다. 하루 40명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합계출산률(여성 1명이 가임기간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은 1.23명(2012년 기준)으로 OECD(평균 1.74명) 꼴등이다. 높은 자살률과 저출산 현상은 '대한민국호'가 더는 살아가기 힘든 곳임을 알려주는 증표들이 아닐까.

"한 달간 밤샘 할 수도 있어"

아내 말에 따르면 직장의 구인난이 심각하다고 한다. 인근 비슷한 규모의 병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와 열악한 근무환경,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인력관리 풍토 탓이 큰 것 같다. 인간적인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직장을 기피하는 건 당연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병원 경영진은 의사 영입이나 새 건물 들이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어제 저녁 퇴근해서는 한 달간 '밤샘' 근무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병동 하나를 새로 여는데, 간호 인력 수급에 차질이 있어 기존 고참 간호사들이 한시적으로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속으로 "간호사는 필요 없고 의사와 건물로만 환자 진료하나 보다"라며 병원을 조롱했다.

올해 들어 아내는 직장을 정리하겠다는 말을 부쩍 자주 꺼낸다. 병원 일이 갈수록 힘들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아내가 떠나더라도 그곳은 그럭저럭 굴러갈 것이다. 아내보다 유능한 후임자가 들어와 병동을 더 잘 이끌지 모른다. 하지만 아내에게 그다지 기쁨을 안겨주지 못한 병원이 다른 사람에게라고 특별한 성취감을 가져다 줄 것 같지 않다.

무수한 조직들이 탈없이 굴러가지만 그 조직들로 이루어지는 '대한민국호'의 승객들이 갈수록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내일신문>과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가 실시한 한 조사에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우리 국민 절반 정도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육박하고, 세계 13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나라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 싣습니다.



태그:#연간 노동시간, #보건의료노동자, #출퇴근 시간, #'대한민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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