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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
 수로왕릉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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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가야의 거리'

아침에 일어나자 날씨가 유난히 쾌청했다. 여행의 3대 요소는 날씨, 안내자(안내서), 잠자리라고 하는데 그 으뜸은 날씨다. 아무리 좋은 볼거리가 많아도 날씨가 심술을 부리면 기분을 잡치기 마련이다. 나 혼자 통영으로 가고자 차비를 차리는데 문자가 왔다.

"선생님, 아직 통영으로 출발하지 않으셨다면 오늘은 김해에서 보내세요. 오늘은 기온이 매우 높답니다. 이런 날 무리하게 여행하시면 탈이 납니다. 김해에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오늘 오전은 '가야의 거리'에 박물관을 둘러보십시오. 오후는 강의가 없으니 제가 다른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허황옥상
 허황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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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대 김성 교수가 보냈다. 손님은 주인의 말을 따르는 게 예의다. 나는 느긋하게 차비를 한 다음 가까운 밥집으로 가서 아침을 챙겨 먹은 뒤 김해 안내도를 들고서 '가야의 거리' 문화산책에 나섰다.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수로왕릉이었다. 이곳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무덤이다. 김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요,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김해 김씨는 우리나라 대표 성씨의 하나로 인구수도 가장 많고, 계파도 많기로 유명하다. 김해 김씨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숱한 이름난 신하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 조선시대 화가의 김홍도, 현대에 이르러 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 등 유명인을 일일이 거론키 어려울 만큼 많다.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2000여 년 동안 그 후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실 나도 처가가 김해 김씨 일문이니까 혈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물코처럼 연결돼 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8천만 겨레는 결코 남이 아니다.

수로왕릉을 둘러본 뒤 깨끔하고 고즈넉한 거리를 조금 걸으니 김수로왕의 비 김해 김씨, 허씨, 인천이씨의 시조모인 허황옥(許黃玉, 서기 33-189) 동상이 나왔고, 그 옆에 있는 김해민속박물관이 나그네의 발을 멈추게 했다.

베틀, 삿갓, 요강, 다리미, 갓, 낫, 멍석, 절구, 풍로, 체, 도리깨, 가마니틀, 지게, 옹기장군 … 등 생활기구들이 모두 내 눈에는 익었다. 내 어린시절 대부분 우리 집에도 있었던 생활기구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반 가정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골동품이 되고 말았다. 

김해민속박물관 내 베틀
 김해민속박물관 내 베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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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기구를 어떻게 썼을까, 그 시절을 살던 사람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런 의문이 들지 모르겠으나 그 시절은 그런 대로 불편을 모르고, 자그마한 일에도, 심지어 배가 부른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사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으로, 그 욕망을 좇으며 행복을 구하려면 끝내 행복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김해민속박물관을 나온 뒤 엎어지면 코 닿은 거리에 대성동고분박물관이 있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은 금관가야 최고지배층들의 무덤유적으로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토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고분의 장에는 목관묘와 목곽묘를 실제 크기로 재현해 전시하고 있었고, 교류의 장에서는 청동기와 철기, 토기 유물들이 금관가야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성동고분박물관 내 토기들
 대성동고분박물관 내 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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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

그곳을 둘러본 뒤 다음 국립김해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한 문학비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산 김종출 선생 문학비였다.

"작가는 무엇을 쓰든 간에 자기의 작가정신이 사회적 양심의 최후 보루이며, 스스로가 사회적 양심의 대변자라는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문학이 우리 사회에 있어서 더 뚜렷한 존재이유를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곱씹을수록 좋은 말씀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게 했다.

김종출 선생 문학비
 김종출 선생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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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은 김해시 구지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금관가야문화재를 집약 전시하고 있었다. 금동관, 금귀고리, 수정목걸이 등 왕족이나 귀족들의 장신구, 그밖에 토기들, 그리고 투구 등이 찬란했던 가야문화를 오늘날에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새 모양의 토기가 눈길을 끌었는데, 고대인들은 죽은이의 영혼을 이끄는 전달자로서 새를 신성하게 여겼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덤 속에 새를 본떠 만든 토기를 죽은 이와 함께 묻은 것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하게 한다는 믿음 때문으로 여겨졌다.   

새 모양의 토기
 새 모양의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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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금동관
 가야 금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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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곳을 둘러보자 곧 점심시간이었다. 가야대 김성 교수와 국립김해박물관 앞에서 만나 거기서 가까운 메밀국수집에서 마음의 점을 찍었다. 그런 뒤 김해시 외곽에 있는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으로 갔다. 그곳은 도자와 건축의 만남을 지향하는 세계 최초의 건축도자 전문미술관으로 지방도시에 이런 문화공간이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해의 문화지킴이 박경용 선생
 김해의 문화지킴이 박경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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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화선진국이란 국력과 문화, 경제력 등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나라나 도시는 마치 모래위의 성으로 경박하기 그지없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김해는 지방도시지만 문화의 도시로,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날 저물녘에 만난 귀빈은 김해문인협회 고문이요, 가인소극장 대표이신 박경용 선생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당신의 에세이집 <아, 가야>를 증정했고, 나는 졸작 <약속>을 답례로 드렸다.

그분은 당신 건물 옥상에다가 자비로 소극장을 운영하는 향토예술인으로, 말할 수 없는 존경심과 아울러 천년 가야문화만큼의 향기와 깊이를 느끼게 했다.

그날 밤, 그분의 안내로 가인소극장에서 공연하는 현부경, 조증윤 작 조증윤 연출의 <안녕, 엄마>라는 연극을 관람했다. 주제도 출연진의 연기도 무척 좋았다. 셋째 날은 찬란한 김해 가야문화에 듬뿍 취했다.

하루 종일 둘러본 김해는 하늘이 높고 맑은, 언저리 산수가 아름답고 정감이 가는 문화의 도시였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전경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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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해, #가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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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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