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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세요!"

2013년 11월 4일 충청남도 아산시의 한 아파트 ㄱ동 1402호,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A씨(당시 47·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0여 분 뒤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조대는 1401호에 쓰러져 있던 B씨(당시 59·남)를 서둘러 병원으로 옮겼다. 검사 결과 B씨는 '그라목손'이라는 농약을 마신 것으로 드러났다. 자살에 많이 쓰여 판매 금지된 제초제의 일종이었다. 이후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넘나들던 B씨는 11월 9일 끝내 사망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발견된 농약이 담겼던 음료수병에는 B씨가 아닌 A씨의 지문만 묻어있었다. 수사당국은 내연관계였던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자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A씨가 B씨를 살해하려 했다고 봤다. 그가 B씨에게 사건 직전에 보낸 '당신 눈에 피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내가 죽을 것이니 기다리라' 등의 문자메시지가 범행 사실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증거로 제시됐다.

2014년 4월 16일 1심(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형사합의1부·재판장 손흥수 부장판사)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A씨의 살인혐의를 인정했고, 그에게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A씨는 판결에 불복하며 대전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그해 12월 10일 항소심(대전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원범 부장판사) 재판부는 1심 판결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난 14일 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 대법관)은 하급심과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원심과 1심이 유죄의 근거로 삼은 증거들 중에는 직접 증거가 존재하지 않고,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믿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A씨의 지문, B씨의 문자... 그녀는 정말 살인범일까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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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1·2심과 달리 B씨가 사망 전 가족 등에게 한 말에 주목했다. A씨에게 준 아파트와 자동차를 돌려받으라는 자녀들의 요구로 B씨가 A씨와 한창 다투던 2013년 10월 25일, B씨는 둘이 동거하던 아파트에서 가출했다. 이날 B씨는 동생에게 '미안해, 하루도 살기 싫어...(중략)... 나 없어지면 화장은 안 돼'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또 사건 당일 오전 아들과 함께 A씨를 만난 자리에선 이별 여부를 언급하지 않은 채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는 말만 하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재판부는 ▲ 그라목손은 생선 썩은 내처럼 불쾌한 냄새가 나고, 진초록색을 띠기 때문에 '어떤 경위로 마셨는지 기억이 없다'고 한 B씨의 진술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 사건 당일 B씨가 옷을 다 벗은 상태로 탁자 주변에 쓰러져 있었고, ▲ 토사물이 그 부근이 아닌 현관 입구 화장실 쪽에서 발견됐으며 ▲ 병원 후송 직후 의료기록에 '(농약을) 머금고 있다 뱉었다'고 적혀 있는 점 등을 볼 때 B씨가 정말 음료수병에 담긴 액체가 농약인 줄 몰랐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반면 ▲ 'B씨가 쓰러진 뒤 음료수병이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만져봤다'는 A씨의 진술이 한결 같다며 신뢰했다. ▲ 그라목손이 담겨 있던 것으로 보이는 농약병에서 A씨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고 ▲ B씨가 사망 직전까지 '자살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농약을 일부러 먹인 사람이 A씨라고 지목하지 않은 정황 역시 A씨의 살인혐의를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봤다. 또 ▲ 음료수병에서 B씨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이것을 만지지 않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결국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법관의 합리적 의심을 없앨 만큼 공소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이날 대법원은 A씨의 살인 혐의를 인정한 하급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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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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