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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2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청사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국무총리에 내정된 황교안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2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청사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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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처럼 총리제도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무척이나 애를 먹은 정권이 있었다. '이유 정권'이 그랬다. 이유(李瑈)는 조선 제7대 주상 세조(수양대군)의 이름이다. 이유 정권은 정권이 존속하는 13년간의 대부분을 일종의 '국무총리 잔혹사'에 시달렸다.

이유의 아버지인 제4대 세종은 이유가 형인 세자 이향(문종)을 잘 보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유를 국정에 참여시키고 어깨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이를 틈타 세력을 확보한 이유는, 세종과 문종이 2년 새 연달아 죽자 조카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이 직접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이것이 이유 정권의 '영의정 잔혹사'의 출발점이었다.

이유 정권의 초대 영의정은 집현전 학자 경력으로 유명한 정인지다. 그는 1453년에 수양대군 이유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유의 신하이자 동지였다.

이유 정권의 영의정 잔혹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정권의 술 문화부터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유와 공신들의 관계는 형식적으론 군신관계였지만 실제론 동지적 관계였기 때문에, 이들은 비교적 격식 없이 술자리에 참여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공신들이 임금인 이유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들의 술자리에서 은연중 드러났다. 

이런 일이 있었다. 통역관 조신이 쓴 <소문쇄록>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왕이 된 이유가 신숙주와 한명회를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세자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세자를 뺀 나머지 세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이유는 장난 삼아 신숙주의 팔목을 잡으며 "경도 내 팔을 잡아보시오"라고 권했다.

신숙주는 '혈중 알코올 농도 0.1%'를 넘어 보이는 상태였다. <소문쇄록>에 따르면 만취 상태로 보였다고 한다. 임금이 자기의 팔목을 잡자, 신숙주는 임금의 소매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팔목을 꽉 잡았다. 임금인 이유는 "아! 아파!" 하고 외쳤다. 지켜보던 세자의 표정이 바뀔 정도였다.

세자의 낌새를 확인한 이유는 "나는 이렇게 해도 되지만, 너는 이러면 안 돼"라고 말했다. 이유는 술에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숙주가 자기를 임금으로 생각하는지 확인하고자 일부러 술에 취한 척했던 모양이다.

"취중이라 기억이 안 납니다"... 취중진담 때문에 해임된 정인지

임금과 신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임금과 신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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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도 외형상으론 만취 상태였지만 속으론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점은 그가 술자리가 파한 뒤 집에 가서 책을 읽은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유의 팔목을 움켜쥔 행위가 취중 실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유도 그걸 간파했는지, 술자리가 끝난 뒤 내시에게 신숙주 집을 염탐하라고 지시했다. 신숙주가 곧바로 잠들었는지 아니면 책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시킨 것이다. 신숙주가 책을 보고 있다면 신숙주가 자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신숙주는 집에 가서 서재를 환하게 밝혔던 것이다.

<소문쇄록>에 따르면, 한명회는 술자리에서 이유의 속마음을 간파했다. 그래서 자기 집 하인을 친구인 신숙주에게 보내 얼른 촛불을 끄라고 귀띔했고, 신숙주가 소등한 직후에 내시가 다녀갔다고 한다.

신숙주의 사례가 그 개인의 사례로 그치지 않고 이 정권의 술 문화를 대변했다는 점은, 학자의 풍모를 풍기는 정인지도 유사한 실수를 범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음력으로 세조 4년 2월 13일자(양력 1458년 2월 26일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영의정 정인지는 술자리에서 세조 이유에게 실수를 하는 바람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문제는 1458년 2월 25일에 발생했다. 이날 임금과 대신들이 술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유는 불경 간행에 관한 생각을 밝혔다. 그러자 술을 상당히 많이 마신 상태였던 영의정 정인지는 불경 간행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정중한 태도로 반대한 게 아니었다. 임금이 분노할 정도였다고 한다.

밤새 분을 삭이지 못한 이유는 다음 날인 2월 26일 정인지에게 따져 물었다. 그동안 내가 사찰을 세우고 불경 베낄 종이를 만들어도 아무 말 없다가 어제 갑자기 취중에 나를 그렇게까지 욕보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정인지는 죄송하다고 말하거나 자기 뜻을 재차 강조하지 않고 "취중이라 기억이 안 납니다"라고 발뺌했다. 필름이 끊겨서 모르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술에 취한 사람이 소소한 문제에 관한 것도 아니고 국가정책에 대한 문제로 임금을 불쾌하게 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누가 봐도 정인지가 일부러 임금을 욕보였다는 게 명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인지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정인지는 영의정에서 해임됐다. 이유 정권 영의정 1호가 술자리에서 임금을 욕보인 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참고로, 같은 해 하반기에 정인지는 술자리에서 임금을 '너'라고 불러 또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이유를 임금으로 인정하기 힘들었던 그의 속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숙주도 그러고 정인지도 그런 것을 보면, 공신들의 눈에는 세조 이유가 그리 존경할 만한 군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시무시한 이미지와 달리 정권 안에서는 권위가 약했던 세조

영의정이 근무한 부서인 의정부가 있었던 자리. 별표 부분이다. 경복궁 앞 광화문광장에 있다.
 영의정이 근무한 부서인 의정부가 있었던 자리. 별표 부분이다. 경복궁 앞 광화문광장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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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이유는 또 다른 공신인 정창손을 후임 영의정에 임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창손이 모친상을 명분으로 영의정 직을 고사했다. 이유가 모친상 중에 관직을 받은 것을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제발 좀 맡아달라고 간청해도 정창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유가 임금인 자신을 수족처럼 부려달라고 애원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창손은 마지못해 영의정 직을 수용했다가 1년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두 번째 영의정도 임금의 속을 태우다가 물러난 것이다.

세조 이유는 1459년 세 번째 영의정으로 공신 강맹경을 임명했다. 그런데 그는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안 그래도 영의정 때문에 말썽인 정권에서 현직 영의정이 별세했으니, 이유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세조실록>에 수록된 <강맹경 졸기>에 따르면, 강맹경이 죽자 이유가 "너무 슬퍼했다"고 한다.

네 번째 영의정에 임명된 사람은 정창손이다. 정창손에게 미련이 남아 있던 세조 이유는 1461년 정창손을 영의정에 다시 임명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1462년, 정창손은 취중진담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세조 8년 5월 8일자(1462년 6월 5일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이유는 신하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세자의 학문이 높은 수준에 도달한 뒤에 왕위를 넘겨주고자 한다"고 발언했다. 이런 경우에 신하들은 일반적으로 "아니 되옵니다!"를 연발한다. 잘못 말했다가는 역심이 있다는 이유로 경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술에 취한 정창손은 찬성 의사를 표시했다.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그가 평소에 임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결국 정창손은 물러나고 말았다. 

다섯 번째 영의정인 신숙주는 비교적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는 1462년부터 1466년까지 영의정 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영의정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매우 유능했지만,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했다는 의심을 받아 변절자의 대명사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영의정 재임 기간 내내 변절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다가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신숙주가 물러난 뒤 7명의 영의정이 세조 이유 정권에서 배출됐다. 하지만 이들의 재임 기간은 전부 합해봤자 2년밖에 안 됐다. 2년 사이에 일곱 명이 경질된 것만으로도 이유 정권의 영의정 잔혹사가 이 기간에도 계속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조 이유 정권은 박근혜 정권 못지않은 영의정 잔혹사에 시달렸다. 이유 정권이 잔혹사에 시달린 이유는, 이유가 대외적으론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풍겼지만 정권 핵심부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권위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영의정들이 번번이 임금을 모독했다가 물러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시대의 영의정 잔혹사는 군주의 리더십이 취약한 데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영의정 잔혹사는 이유 있는 잔혹사였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국무총리 잔혹사, #세조, #정창손, #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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