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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팜 띠엔 번(Pham Tien Van) 전 주한 베트남 대사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이다. 현재는 삼성전자 베트남측 고문을 맡아 한국-베트남 경제협력 및 민간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큰아들 흐엉씨도 현재 북한 주재 베트남대사이다.
 팜 띠엔 번(Pham Tien Van) 전 주한 베트남 대사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이다. 현재는 삼성전자 베트남측 고문을 맡아 한국-베트남 경제협력 및 민간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큰아들 흐엉씨도 현재 북한 주재 베트남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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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 띠엔 번(Pham Tien Van) 전 주한 베트남 대사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이다. 북부 하이퐁 출신인 번 대사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조선문학을 전공했다. 1972년 졸업과 동시에 외교부에 입부한 이래 평양과 서울을 번갈아가며 30여년간 직업외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주한 베트남 대사(2005-2010년)를 끝으로 은퇴했다.

가족들도 모두 지한파이다. 장남 흐엉(40)씨는 베트남에서 대학 졸업후 경희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전공한 뒤 대를 이어 직업외교관의 길을 걷고 있다. 북한 주재 베트남대사관 서기관, 외교부 한반도과장을 거쳐 대사로 부임했다. 차남인 안(38)씨는 호주에서 대학 졸업 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한 뒤 한국 회사에 다닌다. 막내인 비엣(34)씨는 경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베트남 투자계획부 외국투자 담당으로 근무한다.

번 대사는 현재 삼성전자 베트남 측 고문을 맡아 양국의 경제발전과 민간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그는 "북한에 2004년에 가고 오랫동안 못 가봤다"면서 "이번 여름에 손주들 보러 평양에 간다"고 밝혔다. 다음은 한국 취재진과의 집담회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후 미국과 수교... "우리는 미국에 부정적 감정 없다"

 오토바이로 출근하는 하노이의 젊은 남녀는 베트남 경제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오토바이로 출근하는 하노이의 젊은 남녀는 베트남 경제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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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가 온통 '4월 30일'이라는 숫자와 베트남의 황성홍기 국기로 가득 차 있다. 1975년 4월 30일은 사이공의 해방일인가 통일절인가?
"4월 30일은 전쟁이 종식되고 사이공이 해방되고 남부베트남 전체가 외국의 강점세력으로부터 완전 독립한 날이다. 통일은 그로부터 1년후 남-북 베트남의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통일국회에서 결정해 이뤄졌다. 그래서 이날은 전쟁을 종식하고, 미 제국주의와 대결에서 승리한 전승의 날이다."

- 20년 동안 전쟁한 미국에 대한 베트남 국민의 감정은 어떤 것인가?
"베트남은 전쟁 후에 승자로서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원했고, 양국의 사정과 세계정세에 따른 우여곡절 끝에 1995년에 수교했다. 미국도 베트남과 관계 개선을 원해 지금은 최대 교역국이자 협력 동반자관계를 맺었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부정적 감정이 없다."

- 한국과는 과거 베트남전 참전의 상처가 있다. 지금은 경제관계도 밀접하지만 '사돈의 나라'다. 우호적인 한국-베트남 관계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과거 양국 간에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 베트남전에 한국이 왜 참전했는지, 참전으로 베트남에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는 베트남 사람보다 한국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 입장이나 생각은, 전쟁이 끝났고 우리가 승리했기에 과거에 대해 운운하는 것보다 과거를 접고 미래지향적으로 서로에게 좋은 일을 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양국과 다른 참전국들에게도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 베트남은 중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보기 드문 나라다. 중국과는 국경전쟁도 치렀다. 이처럼 강대국과 싸워 이긴 승리의 비결과 그 정신적 가치와 뿌리가 궁금하다.
"베트남은 가난하지만 독립-자주 정신이 강하다. 독립-자주 정신은 수천 년 간 유지된 전통이자 베트남의 정체성이다. 서방의 침략 전에 중국왕조의 침입과 강점에 맞서 승리했다. 프랑스와는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해방되었다. 미국과 그 추종자들과는 남북 통일을 위한 전쟁을 20년 가까이 했다.

그후 '중국과 국경전쟁'이 아니라 '중국이 일으킨 국경에서의 전쟁'을 치렀다. 이처럼 세계 어느 적과도 싸워서 이길 준비가 돼 있는 베트남의 저력은 베트남의 정체성과 독립-자주 정신에서 나온다. 또한 베트남에는 호찌민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어 국민을 단합시키고 전쟁을 지도해 승리로 이끌었다."

베트남에 외국인 투자가 급증하는 이유

 4월 30일 오전 호찌민시의 통일궁(전 독립궁)과 레 주안 대로에서는 베트남 남부 해방 및 통일 40주년을 기념한 군사퍼레이드가 펄쳐졌다(베트남 국영TV 화면).
 4월 30일 오전 호찌민시의 통일궁(전 독립궁)과 레 주안 대로에서는 베트남 남부 해방 및 통일 40주년을 기념한 군사퍼레이드가 펄쳐졌다(베트남 국영TV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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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의 30년 항불-항미 전쟁을 이끈 호찌민 주석과 보 응웬 지압 장군은 베트남 독립해방 전쟁의 양대 산맥이다. 호찌민은 초인인가?
"그분은 초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다. 키가 크지 않고 체력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청렴과 애국심으로 베트남 인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그 열망을 독립-자주 정신으로 결집시켰다. 또한 그 분은 베트남 혁명을 프랑스와 중국의 독립운동과 결부시켜 세계 많은 나라 인민의 동정과 지지를 확보했다. 그런 열망과 지지가 있었기에 베트남이 강대국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

지압 장군은 호찌민의 훌륭한 제자이자 전략전술가였다. 1944년~1955년까지 항불 전쟁을 지휘한 베트남군사령관이었고, 대미 항전기에는 국방장관을 지냈다. 항불-항미 전쟁을 지휘한 지압 장군은 프랑스군 장군 6명, 미군 사령관 3명과 싸웠다. 전장에서 살았지만 102세까지 장수한 장군으로 유명하고 베트남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 한국을 포함해 베트남에 외국인 투자가 급증하는 이유는?
"베트남은 외국인들이 투자에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베트남에는 경쟁력 있는 인력이 풍부하다. 정부는 일관된 외국인투자 정책을 펴왔다. 베트남은 동남아 접근성이 좋고, 정치가 안정되어 안전한 투자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중국에 진출했던 외국기업들이 중국에서 불리한 기업환경이 조성되어 베트남을 선택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한국 공장들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이주하고 있다."

- 좀전에 한국군의 참전으로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는 베트남 사람보다 한국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은 한국도 잘 모른다. 미국은 1969년에 <뉴욕타임스>가 밀라이 학살을 보도해 미국내 반전운동이 증폭되었다. 한국은 박정희 정권에서 언론을 통제해 민간인 학살 보도가 나온 적이 없다. 한국은 1999년 당시 베트남 유학생 구수정씨가 발굴해 보도할 때까지 30년 동안 은폐되었다. 그런데 베트남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은 군인이 아니어서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 같은 명예나 보상을 받지도 못한다. 이 문제의 해법이 뭔지, 솔직히 말해 달라.
"베트남에는 300만명의 전쟁 희생자가 있다. 정부에서 이들은 대부분 국가 유공자로 예우하고 있다. 민간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참전군인 등 국가 유공자보다는 못하지만 정부에서 물질-정신적으로 예우하고 있다."

 팜 띠엔 번(Pham Tien Van) 전 주한 베트남 대사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이다. 현재는 삼성전자 베트남측 고문을 맡아 한국-베트남 경제협력 및 민간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큰아들 흐엉씨도 현재 북한 주재 베트남대사이다.
 팜 띠엔 번(Pham Tien Van) 전 주한 베트남 대사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이다. 현재는 삼성전자 베트남측 고문을 맡아 한국-베트남 경제협력 및 민간교류에 기여하고 있다. 큰아들 흐엉씨도 현재 북한 주재 베트남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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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은 승전국이고 미국과 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한국은 식민지 경험 때문에 일본과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열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나?
"좀전에 강대국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정신적 가치로 베트남 인민의 독립-자주 정신과 훌륭한 지도자를 얘기했는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모든 전쟁에서 정당성을 가진 정의의 전쟁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침략이 아닌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웠다. 그래서 세계 인민들의 지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항불-항미 전쟁 기간에 프랑스에서도 저항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반전운동이 있었다. 어떤 나라에도 선한 사람들은 있다. 그런 선한 마음이 있기에 전쟁이 끝나면 화해하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은 모든 전쟁에서 이겼기에 승자의 아량과 자세를 갖는데, 그것이 베트남의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한일 간에도 양국 정부와 국민이 새로운 관계를 갖는 것이 두 나라에 이익이라는 데 공감을 하면 해결될 것이다."

- 베트남은 침략전쟁이 아닌 정의의 전쟁만 했다고 하지만, 중국과의 국경분쟁에 이어 캄보디아 국경을 침략해 전쟁을 하지 않았나?
"캄보디아 사태가 있기 전에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캄보디아 해방군과 같이 싸웠다. 그런데 전후에 정권을 잡은 폴 보트 정부(1975~1979)가 반베트남 전략을 추구했고, 그 배경에는 중국이 있었다. 사회주의 양대 진영(중-소)의 이념분쟁으로 난처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베트남은 이념 면에서 소련과 가까웠고 그래서 중국과 갈등(국경분쟁)이 생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캄보디아 내부의 애국세력(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이 우리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해 우리는 1978년 12월 폴 보트 도당을 태국 국경까지 몰아내 징벌한 것이다(그러자 중국이 이듬해 2월 베트남을 침공했다-기자 주)

당시는 베트남이 미국과 관계 개선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미국도 베트남의 캄보디아 사태 개입을 반대하지 않았다. 폴 포트 정권의 킬링필드(Killing Fields)에 대해선 지금 국제재판소에서 죄악을 규명해 재판하고 있다. 당시는 베트남의 무력침공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캄보디아에 진입하지 않았으면 더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시아누크(전 캄보디아 국왕)도 베트남의 개입이 없었으면 오늘의 캄보디아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킬링필드는 1975년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이던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정권이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린 후 1979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최대 20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한 사건이다(기자주).

"국영기업 대기업으로 만들려 10년간 자원 집중"

 베트남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도이 머이(Doi moi, 쇄신) 정책 관련 책자들.
 베트남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도이 머이(Doi moi, 쇄신) 정책 관련 책자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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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이 모이(Doi moi, 쇄신) 정책의 성과에 대해 간략히 평가한다면?
"도이 모이 정책은 정치적으로 일당제 민주주의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 지향적 시장경제를 도입해 대외적으로 외국투자를 유치하는 점에서 중국의 개혁개방과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은 중국은 베트남보다 10년 전에 실시했고, 나라 규모와 내수시장이 크다는 것이다. 경제성장률을 보면 중국은 10% 이상 성장한 반면에, 베트남은 7% 수준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은 베트남과 달리 30년 전쟁이 없었다. 베트남은 중국과 경험을 교환하고 배우고 있다. 정치체제가 안정된 가운데 전쟁 피해를 극복하고 과거 계획경제 체제에서 외자유치 등으로 고도 성장을 이룩해 국민소득이 75년 4월 통일 당시 100달러 미만에서 지금은 개발도상국의 중간소득국 수준인 2500달러까지 올랐다. 특히 베트남의 외국인 직접투자에서 한국은 1등이다. 4200개 업체가 베트남에 진출해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 IMF와 세계은행은 베트남 투자 촉진을 위해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요구한다. 개혁개방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개혁개방의 수준에 대해 내부에서도 논란이다. 그런데 베트남은 집단지도체제여서 느린 편이다. 한국처럼 '빨리빨리' 결정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베트남은 그렇지 못하고 느릴 때가 있다. '사회주의 지향 시장경제'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의 대기업과 재벌 육성정책을 연구했다. 10여년 동안 국영기업을 대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자원을 집중했다. 또한 국영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많은 논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생산성과 효율성 떨어지고 부담이 되어 다시 정책을 조정했다. 최근에는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많이 걸렸다."

- 남베트남 해방 당시 베트남을 떠난 '보트 피플'이 조국에 투자를 해 베트남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는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베트남 통일의 과제는 두 가지였다.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를 복구하고 민족 화해를 이루는 것이었다. 과제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계속 중이다. 보트 피플에 대해 과거를 묻지 않는 정책을 실시한 것도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민족에 준 상처가 커서 치유할 수 없는 극소수 사람을 빼놓고는 '하나의 베트남'에 경제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매년 100억불 이상 고국의 친인척에 송금-투자하고 있다. 해외의 전체 교민은 500만명 정도다."

- 북한도 베트남 모델을 검토한 바 있다고 들었다. 북한에 대해서 조언을 한다면?
"북한이 중국-베트남의 개혁개방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 북한 당국도 개혁개방을 하겠지만, 다만 '우리 식으로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의 내부 사정상 중국-베트남처럼 쉽게 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여건을 만들어주면 언젠가 개혁개방을 할 것으로 본다. 실은 나도 북한에 2004년에 가고 오랫동안 못 가봤다. 이번 여름에는 손주들 보러 평양에 간다. 그때 가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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