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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서른일곱 살이고 세 살 많은 남편과 다섯 살짜리 딸이 있는 평범한 삶이 소망인 여자입니다. 결혼 전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산, 예의 바르고 성실한 남자를 만나 2006년 결혼을 했고 수학 강사로 일하던 남편과 시간을 맞추려 오후에 출근해서 밤 10시면 끝나는 학원 데스크에서 일을 했습니다.

저는 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 같이 눈물도 흘릴 줄 아는, 솔직한 이 남자가 참 좋았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제 남편은 평범한 이들처럼 술을 먹으면 더 용감해지고 세상 얘기하며 열변을 토하길 좋아했습니다.

양가 형편이 그리 좋지는 않아 결혼 후에도 양가에 50만 원씩 용돈을 드리던 착한 남편이었습니다. 빚이 반이 넘는 우리 집이지만 우린 세상없이 재미있고 행복한 부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겼고, 작고 예쁜 딸과 함께 우린 세 식구가 되었습니다. 많이 행복했고 서로 사랑했지만, 때론 남편에게 육아에 대한 불만도 얘기하고 다투기도 하는 평범한 가족이었고, 이런 행복에 배부른 나날들에 감사했습니다.

2013년 12월. 아이의 세 살 생일에 촛불을 켜고 함박웃음 지으며 이제는 아이와 공연을 보러 다니기로 약속했습니다. 표현을 잘 못하는 남편은 아이와 놀아주는 데 서툰 아빠였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그 따뜻한 눈빛만은 딸을 가진 아빠가 지을 수 있는 특별한 표정이었습니다.

12월 25일, 약속한 대로 우리 세 식구는 아이를 위해 버블쇼 공연을 보고 애견카페에서 우리 셋이 좋아하는 동물들을 구경했습니다. 저녁 메뉴로 스테이크를 먹으며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과 술을 한 잔하며, 여느 때처럼 저는 아이 얘기, 남편은 음식얘기와 세상얘기로 흥분하며... 그러다 서로 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쓰러진 남편... 계속 잠만 자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37살이고 세 살 많은 남편과 다섯 살짜리 딸이 있는 평범한 삶이 소망인 평범한 여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37살이고 세 살 많은 남편과 다섯 살짜리 딸이 있는 평범한 삶이 소망인 평범한 여자입니다
ⓒ 서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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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저녁, 아이가 그날은 일찍 잠이 들었고 매일 그렇듯 저녁 메뉴를 정해줄 그 사람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눌한 그 사람의 말투에 놀라 목소리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몸의 왼쪽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했습니다. 운전은 하겠냐니까 천천히 조심해서 오겠다고 했습니다.

직장이 수지이고 3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였습니다. 아이는 자고 있고 불안한 마음에 집 앞을 서성였습니다. 운전에 방해될까 전화도 못해보고... 그러다 다시,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연결되지 않았고 불길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순간, 다급한 목소리의 시어머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르는 이가 아들 번호로 전화를 걸어 와 사고가 났다고 한다고... 무슨 일이냐고 했습니다. 급히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병원에 갔을 때, 남편은 흙탕물에 옷을 다 버린 채 의식을 잃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신경외과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평소 눈물이 많던 저였지만 울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통곡을 하며 우실 때도 어머니께 소리쳤습니다. 오빠 괜찮을 건데 왜 이렇게 우시냐고 화도 냈습니다. 저녁 이 시간이면 컴퓨터로 요리 사이트와 기사를 보고, 오락을 좋아해서 잠도 안 자고 있던 사람이 그렇게 한 달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선 뇌출혈에 고혈압까지 있는 상태고, 출혈이 심한 터라 잘못하면 바로 사망했을 수도 있었다고, 앞으로도 일어날 가망 없이 이 상태일 경우가 크다고 말했습니다.

2014년, 39년을 산 이 남자가 더는 저와 아이를 그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 저와 통화를 하고, 출근하면서도 어제 피곤하지 않았냐며 내 몸 걱정을 하던 사람이...

평소 긍정의 힘으로 항상 밝고 감사며 생활하던 저였습니다. 이런 세상이 있는지 모르고 살았고, 뇌출혈로 의식 없는 환자들의 가족이 어떤 삶을 사는지 꿈에서조차 상상해본 적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선 말 잘 듣던 아들이 '일어나 눈 좀 떠보라'고 아무리 외쳐도 대답 없이 침대에 누워서 눈을 뜨지 않으니 종일 우시기만 했습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 앞에서 저까지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저를 만나 딱 두 번 핸드폰을 샀고, 갖고 싶어 하던 아이폰을 반 년도 못 써보고 잠만 자는 그의 핸드폰을 들고 병원 비상구에 앉아 이 사람이 듣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한참을 참고 있던 눈물이 끝도 없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시어머니와 저는 남편의 간병에 매달렸고 시간만이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재활병원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누워 있는 환자에겐 최악의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는 폐렴은 저를 시간에 상관없이 응급실로 달려가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또 다른 재활병원을 찾아 이 사람을 또 옮겨야 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일... 중기계차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형제가 없던 남편에겐 형제와도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야학 동아리에서 알게 된 형아우들입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은 진짜 형제가 됐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 형제들이 매달 주는 크고 작은 도움으로 생활을 지탱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 년이 다 돼갈 때쯤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제가 이 사람을 간병해주길 바랐지만, 딸아이와 제 걱정에 심장병까지 얻으신 친정 엄마를 위해 그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올해 초, 직장을 잡게 됐고 주말이면 항상 아이 손을 잡고 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게 일상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게 된 곳이 수원자원순환센터란 곳이었고 재활용을 선별하는 작업에 배치됐습니다.

일을 하면서 활기도 얻었고 나이가 많이 드신 어머니뻘 분들에게 '언니'라고 호칭하며 힘들지만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첫째 달엔 선배들의 보이지 않는 손놀림에 감탄하며 왼손으론 계란 판을 구별해내고 오른손으론 고철 제품을 구별하면서 중간 중간 알루미늄 캔을 자루에 걸러냈습니다.

둘째 달엔 스티로폼에서 테이프 뜯어내는 일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쓰레기 버려 주는 일, 테이프 뜯으며 기계에 스티로폼을 넣어주는 일 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달엔 커다란 재활용품을 리어카로 끌어다 쏟아주면 세 명이서 각자 고철, 쇠 옷걸이, 쇠와 플라스틱을 구분해야 하는 옷걸이, 전화기, 컴퓨터 자판, 굵고 얇은 전선줄, 프린터기와 아이들 장난감 등을 분류하는 일을 했습니다. 작은 중기계차가 쓰레기를 치워주기도 하고, 물건을 옮겨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초보라 융통성 없이 일한 탓인지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옮기다 허리에 무리가 왔고, 2주차엔 오래 서 있지 못하게 되면서 병원에 가느라 휴가도 냈습니다. 3개월 수습이라 휴가도 없었는데 배려해 주시는 회사가 고마웠습니다.

여전히 허리가 안 좋아서 옆의 언니들의 배려로, 분류하는 일 중에서도 망치로 두들겨 철과 플라스틱을 분류하는 일을 한쪽에 앉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든 언니들도 힘들게 일하는데 죄송한 마음에, 중간 중간 언니들이 분류한 물건이 조금씩 모아질 때마다 대야에 있는 물건들을 자리에 옮겨놓고 다시 제 일을 하고 했습니다.

그러던 월요일, 쉬는 시간 전에 언니들이 모아둔 물건을 옮겨두고 다시 빈 대야를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두 번째 타임인 9시 30분경 또 언니들이 모은 대야 두 개를 끌고 가려는데 뒤에서 무언가 발을 쳐서 저를 넘어뜨렸습니다.

뒤를 보기도 전에 그 무언가가 제 오른쪽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고 그제야 두려움에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중기계차는 저를 못 본 채 허벅지까지 올라와서야 멈췄고, 다시 후진하며 또 한 번 제 다리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온몸을 떨면서도 제 머리를 스친 건, 우리 애기였습니다. 아빠도 안아줄 수 없는 우리 애기, 나밖에 없는데... 정신을 잃지 말라며 손잡아준 직원에게 주문 외우듯 계속 말했습니다. 신랑이 뇌출혈로 의식 없이 병원에 있다고... 그래서 제 다리가 어떻게 되면 안 된다고... 응급차에 실려 병원 수술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그 얘기만 했습니다.

회사에선 치료에만 전념하라고. 지사장님께서도 본인 부담 안 되게 최대한 도와주라고 하셨다고...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산재승인 났지만, 본인부담금 2천만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10번에 가까운 수술을 했고 골절과 피부 이식 수술로 한 달을 보냈습니다.
 10번에 가까운 수술을 했고 골절과 피부 이식 수술로 한 달을 보냈습니다.
ⓒ 서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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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에 가까운 수술을 했고 골절과 피부 이식 수술로 한 달을 보냈습니다. 힘겨워 하면서도 남편이 우리 애기 돌보라고 절 살려줬다 생각하고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겐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아픈 아빠를 핑계로 아이에게 정성을 쏟지 못한 것이 병원에 있는 내내 제일 후회되고 가슴 아팠습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힘들어 하고 있는데, 친정 엄마가 어떻게든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재승인이 났다는 문자를 받았고 병원비 계산서를 받았습니다. 병원비 6천만 원에 자기부담금이 2천만 원. 비급여 부분은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선 환자에게 정산요구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당장 병원비를 낼 돈도 없는데 아직도 치료할 게 많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걱정뿐인 부모님께 병원비를 말씀드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도대체 왜, 나라 일을 했는데 왜, 제 잘못 없이 다쳐 산재로 처리된 이 사고에, 제가 부담해야 하는 돈이 있는 걸까요? 크게 다쳤어도 원망하지 않고 다시 얻은 삶에 감사했건만... 제가 왜 회사에서 다쳐서 힘든 수술을 감당하고, 아이를 맘껏 안아주지 못하는 혹독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치료 비용까지 걱정해야 하는 건가요? 산재란 것이 노동자를 위한 것이긴 한가요? 저는 어느 곳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걸까요?

서진숙씨 "당장 받을 수 있는 도움 없어... 막막하다"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는 서진숙씨는 "기계가 뒤에서 다리를 밟고 허벅지까지 올라와, 왼쪽 다리에 있는 피부를 오른쪽 다리에 이식했다"며 "발목이 안 접히고, 무릎도 안 접히는 상태"라고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서씨는 "이후 어떤 후유장애가 생길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서진숙씨가 일하던 수원자원순환센터 관계자는 22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회사 차원에서 서진숙씨를 위해 성금 모금을 하는 등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면서 "자기부담금인 비급여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 차원에서 들어놓은 실비보험이나 서진숙씨가 개인적으로 들어놓은 실비보험 등을 통해 추후 어느 정도 보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씨는 "회사 차원에서 많은 도움을 주려 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씨는 "내가 하던 일이 위험직군이라 실비보험 처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소송을 제기한다 하더라도 당장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막막하다"고 말했다. / 홍현진 기자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삶, #행복, #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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