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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단 두 곳뿐이라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왼쪽 끝에, 다른 하나는 오른쪽 끝에 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중앙을 기준으로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왼쪽 가게를,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오른쪽 가게를 찾을 것이다. 만일 두 가게의 주인이 협정을 맺어 현 위치를 그대로 고수하기로 했다면 양쪽 다 비슷한 매출을 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신사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보다 매출을 더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가게 위치를 해변의 중심부로 조금 이동시키면 된다. 오른쪽 가게를 놓고 보면, 현 위치보다 왼쪽으로 10미터만 옮겨도 예전보다 매상이 오른다. 두 가게 사이의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왼쪽 가게로 갔을 중심부 사람들의 일부가 오른쪽으로 오기 때문이다. 공간 점유율이 넓어진 것이다.

이 현상을 목도한 왼쪽 가게 주인은 오른쪽 가게보다 훨씬 더 오른쪽으로, 즉 중심부와 가까운 쪽으로 위치를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중앙으로 갈수록 유효 반경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위치 이동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두 가게의 위치는 중앙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고 매출은 애초에 왼쪽과 오른쪽에 가게를 뒀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오른쪽 아이스크림 가게엔 손님이 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해변가의 아이스크림 가게
▲ 민주주의의 경제이론 해변가의 아이스크림 가게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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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학자 안소니 다운스(Anthony Downs)가 민주주의의 경제이론(An Economic Theory of Democracy, 1957)에서 해변의 아이스크림가게 사례를 빌려 설명한 '합리적 투표자의 후보자 선택 방법'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이 뭘까. 양당제를 유지하는 국가에서,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정치적 선명성을 유지하면서 현 위치를 고수할 게 아니라 싫든 좋든 중앙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중원을 차지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이 '진리'를 정당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모든 정당이 이 지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이스크림 가게 안쪽보다는 주로 바깥쪽에 시선을 둬 선거에서 패하는 현상이 빈번히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보수보다는 진보진영에서 더 많이, 자주 발견된다.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 공학적인 식견이 없더라도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이 접근법을 왜 진보진영은 놓치고 있는 걸까. 국민 전체를 놓고 보자면, 이미 잡힌 물고기(왼편에 있는 사람들) 수가 더 많으니 충분히 이길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아니면 해변 중앙에 위치한 이들이 오른쪽 아이스크림 가게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보수당 손을 들어준 영국 시민들

2015 영국 총선 결과. 보수당(파란색)이 노동당(빨간색)을 누르고 압승을 거뒀다.
 2015 영국 총선 결과. 보수당(파란색)이 노동당(빨간색)을 누르고 압승을 거뒀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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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치러진 영국 총선도 마찬가지다. 박빙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보수당이 노동당을 이기고 압승했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곳은 물론 노동당이다. 밀리밴드(Miliband) 대표는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블레어(Blair) 전 총리는 "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는 길은 중도성향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 길밖에 없다"며 노선을 수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노동당이 불평등과 부정의 문제 해결에만 몰두하면서 정작 열심히 일해 잘 먹고 잘살려는 다수의 중산층들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왜 아이스크림 가게 바깥쪽만 쳐다보고 있는가라고 물으며 다운스의 선택 이론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3의 길' 전략으로 집권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블레어로서는 당연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늘 그래 왔듯이 이번 총선에서도 보수당은 경제와 성장을, 노동당은 평등과 분배를 선거의 핵심 모토로 삼았다. 하지만 국민들의 선택은 보수당으로 기울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다수 국민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음을 또 한 번 보여준 것이다. 전통적인 노동당 지지층들이야 당연히 이 정책을 찬성했겠지만, 해변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승자독식의 낡은 선거제도, 이념 지향적 담론의 한계, 민족주의의 부활 등 이번 선거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와 내용들은 많이 있겠지만,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평균적인 보통 사람들은 이념과 가치에 입각해 정당과 후보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공약을 내건 정당과 후보자에게 표를 던진다는 원리는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정치학자도 아니고 더욱이 선거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사람이다. 하지만 중간계층의 심리를 선거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쪽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진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운스의 이론을 빌려 설명하자면, 이들은 해변의 중심부를 향해 가게 위치를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중간지역에 머무는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이들 보수진영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중산층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반면, 진보진영은 해변의 중심부로 이동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스피커의 방향은 늘 왼쪽을 향해 있다. 가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지만,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중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왜 '중앙'으로 자리를 옮기는 걸 꺼릴까

전국 4곳에서 실시된 4.29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3명을 당선시켜 대승을 거둔 가운데 지난 4월 3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 회의에서 김무성 대표가 김태호 최고위원 등에 업혀 기뻐하고 있다. 한편, 1명도 당선시키지 못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3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밝힌 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 '어부바' 김무성, '침통' 문재인 전국 4곳에서 실시된 4.29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3명을 당선시켜 대승을 거둔 가운데 지난 4월 3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 회의에서 김무성 대표가 김태호 최고위원 등에 업혀 기뻐하고 있다. 한편, 1명도 당선시키지 못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3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밝힌 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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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어째서 보수진영은 중산층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에 공격적인 반면, 진보진영은 오른쪽 깜빡이를 켜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소선거구제 하에서 선거에 이기려면 중원을 장악하는 게 필수인데, 왜 진보는 이념적 선명성을 고수하면서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것일까. 왼쪽에 서 있을수록 신념이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도그마는 어째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애초에 왼쪽·오른쪽이라는 기준 자체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일 뿐인데도 진보는 왼쪽을 향한 끝없는 갈망을 갖고 있어서 이 끈에서 풀려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이 진영에 속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右)클릭'을 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또한 이들의 머릿속에 우회전이란 곧 타협·변절·굴종과 같은 뜻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수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되겠지만, 이런 인식은 '구시대의 망령'에 지나지 않으며 하루빨리 하수구로 흘려보내야 할 '찌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틀을 부수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중앙에 가까운 곳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진보진영이 집권할 가능성은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선거혁명을 통해 다당제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않는 한, 현 선거제도 하에서 2등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이 제도의 도입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선거제도를 바꾸는 일에 에너지를 쏟을 게 아니라, 맘에 들지 않지만 지금의 선거제도에서 이기는 전략과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영국 총선 결과를 지켜보면서, 영국 노동당 그리고 우리나라의 진보정당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범진보 진영에게는 어느 쪽 아이스크림 가게를 갈지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 만한 큰 그림과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할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중앙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불평등과 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요한 사회적 과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는 보수진영의 비난을 신물 나게 들었을텐데도 진보진영은 이 문제제기에 대해 여전히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혹 이들에게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아이스크림 제조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닐까. 영국도, 우리나라도 이 과거의 유령이 여전히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문제에 답을 줄 만한 식견과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신을 진보주의자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정중하게 묻고 싶다. 집권의지를 포기하고 정치적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의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인데, 진보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가. 이번 영국 총선 결과가 주는 교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 총선이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영국 총선결과, #20대 총선, #민주주의의 경제이론, #제3의 길,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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