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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사용법입니다.
당신의 머리 사용법이 아니라
정철이라는 사람의 머리 사용법입니다."
- <내 머리 사용법 ver. 2.0> 본문 191쪽, '내 머리 사용법' 중에서

순간, '낚였다' 싶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제목만 보고 잠시 오해했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내가 잘못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미인곡 정철 아님, 영어 잘하는 정철 아님"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카피라이터 정철의 <내 머리 사용법 ver. 2.0>은, 독자를 제목으로 낚는 책이다. 그리고 낚인 사람을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의 '어장'에 묶어두고,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책이다. 'ver 2.0'인 이유는, 지난 2009년에 출간된 <내 머리 사용법>의 개정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낚시인 이유는, '어떻게 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릴까', '잠자는 두뇌를 최대한 깨워서 활용할 수는 없을까'와 같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머리 사용법'이라고 했는데, 독자가 자신의 머리를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은 시간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매 페이지마다 이 책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독자에게 떡밥을 뿌린다. 다 읽고 나면 오히려 개운한 뒷맛이 머리를 말끔하게 해준다.

<내 머리 사용법>, 도대체 정체가 뭐니?

정철(카피라이터)의 <내 머리 사용법 Ver 2.0>
 정철(카피라이터)의 <내 머리 사용법 Ver 2.0>
ⓒ 허밍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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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했듯, 이 책은 어떻게 머리를 사용할지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대신 딱딱하게 굳었던 머리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유려하거나 섬세하지는 않지만, 재치 있고 발랄한 문장이 읽는 이를 '들었다 놨다' 한다. 이 책의 방점은 고정관념 탈피에 찍혀 있다. 평소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던 인식의 틀 자체를 뒤흔든다. 저자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때로는 독자의 뇌주름을, 때로는 좌심방 우심실을 쿡쿡 찌른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어도 도통 이 책의 정체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면 '자기계발서'로 분류되어 있기도 하고, '문학' 섹션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자기계발서도 '힐링팔이'도 아니다. 정철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그리지도 않고, 아픔이나 방황을 당연시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어떨 때는 어깨를 토닥여준다. 어느 페이지에서는 피식하고 웃게 되고, 어느 쪽에서는 무릎을 치게 된다. 코끝이 살짝 찡해질 때도 있다.

짧게는 두 문장에서 길게는 두 쪽에 걸쳐, 정철은 쉴 새 없이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시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다. 종이에 여백은 많지만, 문장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무게를 생각하면, 가볍게 종이를 넘길 수가 없다. 그런데도 정철은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재미를 주거나, 감동을 주거나, 나를 돌아보게 하거나, 세상 보는 눈을 바꿔 주거나. 뭐든 건질 게 하나는 있어야 글이라는 생각, 그래야 글의 의무를 다한다는 당연한 생각도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는 수상한 글을 하나 쓰기로 작정하고 연필을 들었다."
- <내 머리 사용법 ver. 2.0> 본문 192쪽, '수상한 글' 중에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쓴 이 수상한 글은 재미도 주고, 감동도 주며, 나를 돌아보게 하고, 세상 돌아보는 눈을 바꿔주며, 건질 게 굉장히 많은 글이 되어 버렸다.

'멘토'와 '꼰대'를 가르는 기준

멘토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멘토를 자처하는 수많은 이가 미디어에 등장해 메시지를 던졌다. 강연회가 열리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이 그 앞에 몰려 들었다. 멘토를 길잡이 삼아 각박한 현재를 탈피하려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멘토들의 이야기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들은 성공 신화를 재생산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고난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고난을 어떻게 영웅적으로 극복했는지 포장한다. 영웅의 전설은 듣는 이를 환상 속에 익사하게 만든다. '나도 노력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열심히 하면 안 되는 일은 없어'라고 속삭인다.

동시에, 멘토는 구조의 문제를 지워 버린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전가한다. '당신이 가난한 이유는 당신이 게으른 탓이지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불행한 이유는 당신이 욕심이 많기 때문이지 이 사회가 부조리한 탓이 아니다'와 같은 말이 성립한다. 자칫 멘토가 현 사회체제를 옹호하는 보수 이데올로기의 홍위병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은 멘토의 성공을 자신도 재현할 수 있다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힐링'이라는 열쇳말이 전국을 강타했던 것도, 결국 근본적인 치유를 제공하지 못했다. 다시 무한경쟁으로 뛰어들 잠깐의 '추스름' 정도만 주었을 뿐이다. 홍수처럼 서점에 쏟아진 자기계발서도 똑같다. 어떻게 사회가 제시한(그리고 미디어가 주입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의 충실한 노예가 될 수 있는지를 그릴 뿐이다.

그렇게 멘토는 꼰대가 됐다. 아무리 죽을 것처럼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이들이 늘었다. 멘토 열풍은 다소 사그라들었다. 이제 청중은 멘토를 조롱하고 비난하며,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마음에 새길 만한 메시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지금도 스스로 '멘토'라고 지칭하는 이들은 많지만, 진짜 멘토는 멸종위기종이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정철은 이 시대의 천연기념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우선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독자의 시선보다 위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당장 우리가 듣기 좋은 말만 하지도 않고,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강단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우리에게 소리 지르는 대신, 우리 옆에서 함께 툭툭 한두 마디 던져 준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인정하게끔 한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우리 존재 파이팅'을 외칠 수 있다고 응원한다. 하지만 진취적인 도전을 포기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20대에게 '짱돌'을 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따뜻한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내 머리 사용법 ver. 2.0>은 멘토의 언어와 꼰대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 확연히 보여 준다. 멘토와 꼰대의 차이는 사실 '한 끗'이다.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철은 아직, 다행히도, 우리 곁에 멘토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 멘토로.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내 머리 사용법 ver. 2,0>(정철 지음 / 염예슬 그림 / 허밍버드 펴냄 / 2015.04 / 1만3800원)



내 머리 사용법 - Ver. 2.0

정철 지음, 염예슬 그림, 허밍버드(2015)


태그:#내 머리 사용법, #정철, #책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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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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