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 포스터

<차이나타운>의 포스터 ⓒ CGV아트하우스


영화 <차이나타운>이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누적 관객 수 150만 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한계적 상황과 슈퍼히어로물 <어벤져스2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스크린 독과점에도 조용히 저력을 과시하며 나름대로 '쓸모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최근 영화계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로 여성 캐릭터의 도구화가 지적되고 있는 마당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의 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 <은교>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젊은 배우 김고은과 '믿고 보는' 김혜수가 한 작품에서 보여줄 화학 작용에 대한 기대도 증폭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차이나타운>에 크게 새로운 것은 없었다. '여성 투톱'이라는 점은 개봉 전 가장 기대를 모았던 부분이었지만, 이 영화의 장점이 되지 못한 채 표면적인 구색 갖추기 정도로 남은 모양새다. 단순히 기존에 학습돼 있던 유사 장르의 문법을 여성판으로 풀어낸 것을 '변주'라고 부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느와르물의 주인공이 반드시 남성이어야 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또 주인공의 성별이 여성임에도 그들의 '여성스러움'이 강조되지 않기 때문에 신선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차이나타운>의 영화적 성취를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을 꼭 짚기에는 허점이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는 맨 먼저 일영(김고은 분)과 엄마(김혜수 분)의 갈등을 비춘다. 숨이 곧 끊어질 것만 같이 헐떡대는 일영과, 그에게 칼을 겨누는 무표정의 엄마. 둘은 대체 어떤 관계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것일까. 큰 복선을 하나 깔아둔 채 영화는 일영과 엄마의 전사를 훑기 시작한다. 1996년 인천 전철역, 버려진 채 10번 코인로커에서 발견된 여자아이는 '일영'이란 이름을 얻는다. 부패 경찰 탁(조복래 분)은 우연히 그 아이의 공허한 눈빛을 마주 보게 된다. 생존을 위해 정신적 성장을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텅 빈 눈빛을 본 탁은, 마치 괜찮은 사냥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일영을 캐리어에 구겨 넣는다.

탁이 일영과 동행한 곳은 차이나타운이었다. 정확히는 각종 범죄의 온상인 그 공간을 지배하는 자, 엄마(김혜수 분)에게 일영을 데리고 갔다. 일영을 본 엄마는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뜻 모를 웃음을 짓더니, 탁을 향해 "너 인생 꼬이겠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대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차이나타운>의 첫 번째 문제가 포착된다. 바로 탁이라는 존재다.

 <차이나타운> 한 장면. 엄마와 일영

<차이나타운>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차이나타운>이 느와르물의 문법을 그대로 따랐다면, 주인공과 마지막 대결을 벌이는 대상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때 벌어지는 싸움은 지능전이든, 육탄전이든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과 영화 말미에서 겨루게 되는 인물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딜레마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이거나, 최고의 권력자이거나, 가장 능력이 뛰어나거나, 혹은 이 모든 특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인물은 영화 초반에 등장한 뒤, 플롯 밑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다시 출현한다.

이 영화에서 엄마가 그런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예고편만 봐도 '각이 나오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처럼 당연하게 흘러갈 이야기에 훼방을 놓는 것이 탁이다. 기실 그는 일영을 지옥에서 꺼내 또 다른 지옥으로 데려다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캐릭터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탁은 마치 유령처럼 <차이나타운>을 떠나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탁은 잔인무도함과 그만큼의 실력으로 다른 극 중 인물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일영 역시 그를 끊임 없이 피해 다닌다. 그렇다면 탁은 적어도 '끝판왕' 엄마에 버금갈 정도로 주인공 일영을 위협했어야 한다.

탁은 노름빚에 허덕이다가, 일영을 처치하면 부채를 탕감해 주겠다는 또 다른 '엄마 새끼' 치도(고경표 분)의 의뢰를 받아들인다.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고 일영의 '장애물 1'이었던 치도까지 제거됐지만, 탁은 계속 일영을 쫓는다. 차라리 이 모든 사실을 안 뒤 치도의, 잃어버린 돈줄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면 <차이나타운>의 냉혹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일조하는 쓰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탁이 빚더미에 짓눌려 광기를 품게 된 광경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처럼 탁은 의뢰인이 죽든 말든 '우직하게' 일영에게로 달려들지만, 그를 괴롭히기는커녕 서너 합 정도를 맞붙다가 그대로 비명횡사한다.

이는 영화 초반 탁의 인생이 일영 때문에 꼬이겠다고 말했던 엄마의 예언 같은 대사를 무리해서 증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탁이라는 캐릭터가 <차이나타운>에서 뜬금없는 복선으로 변질된 탓에 극은 산만해진다. 대개 느와르물이 멋진 그림을 던져 놓고 거기에 선문답 같은 대사들을 덧입히며 미학적 성취를 달성하는 공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런 연출까지 통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 목격되는 복선의 미숙한 활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차이나타운> 한 장면. 일영

<차이나타운>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엄마는 어린 일영을 거둬 먹이기 시작한 후로도 시종일관 냉혹함을 유지한다. 병들어 낑낑대는 개를 주시하는 일영을 보고, 엄마는 삽으로 개를 내리쳐 숨을 끊는다. 놀란 일영에게 엄마는 "쓸모 없어지면 너도 죽일거야"라며 경고한다. 그러나 일영을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는 "我的孩子(발음 : 워더하이즈)"라고 대답한다. 영화 속에서 외국어가 나오는 경우, 자막으로 뜻을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차이나타운>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대사 역시 후반부 어떤 장면의 복선이 될 것임이 어렵지 않게 예측된다. 대놓고 '나 복선이에요'라고 말하는 복선은 확실히 어설프다.

몸만 자란 일영의 정신적 성장을 돕는 인물, 박석현(박보검 분)은 이미 많은 관객이 가장 불만스러운 부분으로 지적했던 지점이다. 남성 중심 느와르물 속 타자화됐던 여성 캐릭터를 남성에게 이식했다는 점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일영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을 궁금해 하기 시작하는 계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석현은 집요하게 보일 정도의 친절을 베풀고, 일영은 거기에 너무나도 쉽게 흔들린다. 심지어 어깨에 기대 잠을 청할 정도로 경계를 푼다. 일영은 느닷없이 밀려들어오는 감정의 물결에 식구들을 배신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석현은 대체 왜 그랬을까?

여기에 '이성적 호감' 혹은 '연민'이라는 매우 간단한 정답이 존재한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끌려 가야만 하는 것처럼 학습된 감정의 사용법 말고는 석현의 행동을 설명하기 어렵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불사하고,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을 용서해야하는 것과 같은 당위의 논리가 적용된다. 관객이 일영과 석현의 가운데 있는 감정을 상상할 여지는 배제되는 것이다. 박보검과 김고은의 불안정한 연기력은 차치하고라도, 석현이라는 인물이 <차이나타운>에서 다뤄지는 방식 때문에 일영까지도 입체성을 잃는다.

유사한 내러티브와 장르적 특성을 지닌 <달콤한 인생> 속 희수(신민아 분)와 선우(이병헌 분)의 관계를 보자. 감정 없이 살아온 선우의 삶에 희수는 어떤 각성의 촉매가 된다. 개봉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선우와 희수가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단언할 수 없다. 극 중 인물 사이에 기민하게 뚫려 있는 공백을 메워보기 위해, 관객은 상상한다. 선우를 움직이는 것은 당위의 논리가 아닌, 중심 잡힌 캐릭터의 의지였다. 이렇게 부리는 '겉멋'이라면 관객을 납득시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차이나타운> 한 장면. 석현과 일영

<차이나타운>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비인간성이나 강인함에 대한 강박 역시 <차이나타운>의 캐릭터를 평면적으로 만드는 주범이다. 유혈 장면은 과도하고, 인물들은 그 장면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듯 부산스럽다. 기미가 어지럽게 내려 앉은 퍼석한 얼굴에, 움직이지 않는 인위적인 뱃살은 오히려 엄마라는 캐릭터의 카리스마를 퇴색시킨다. 배우 김혜수의 형형한 안광이 아니었다면 극복되지 않았을 어색함이다. 엄마는 선대 '엄마'의 기일에, 그를 죽인 것은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부친 살해' 모티프가 '모친 살해'로 바뀐 꼴이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꽤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다.

영화는 그렇게 결말까지 다다랐다. 엄마는 "결정은 한 번 뿐이고, 그게 우리 방식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결정'과 '방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영화 속에서 합의된 적이 없다. 두 사람이 혈투를 벌이는 것도 아닌데, 그 방식에 어떤 속뜻이 있는지는 그들밖에 모르는 듯하다. 허영이 파 놓은 영화 속 빈 곳들은 철학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불완전했다.

<차이나타운>이 그럴듯한 느와르라는 것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정치적 올바름에 가까워지려는 영화적 시도가 있었더라도, 이는 완성도의 평가와 별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들은 죄가 없다'는 시쳇말이 떠오를 정도였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치도가 엄마에게 건넸던 한 마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데요?"는 감독 본인에게 돌아가야 할 말인 듯하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이 작금의 한국 영화계에 너무도 부족한 '여성 영화'의 자리를 확장해 나가기 위한 주효한 시도로 남을 것임은 분명하다. 더 이상 주인공 성별의 전환이 '변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여성을 다룬 콘텐츠들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시작점에, <차이나타운>이 기억되기를 바란다.

차이나타운 김혜수 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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