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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시골에서 살지만, 서른 언저리까지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시골에서 두 아이를 건사하면서 삶을 짓지만, 우리 어버이는 나를 도시에서 낳으셨습니다. 나는 서른 언저리까지 도시에서 내 땅이라고 할 만한 보금자리를 조금도 못 누리는 채 살았고, 우리 아이들은 비록 얼마 안 되는 우리 땅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럼없이 뛰고 달리고 파고 뒹굴고 뒤집고 밟을 수 있는 보금자리를 누리면서 삽니다.

어버이로서 아이와 누릴 삶이란 바로 '우리 숲'이고 '우리 마당'이며 '우리 나무'요 '우리 꽃'이자 '우리 풀'이라고 느낍니다. 아이와 나란히 씨앗을 심을 만한 땅을 보살필 노릇이고, 아이와 어버이가 함께 웃고 노래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넉넉히 일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겉그림
 겉그림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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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손수 가꾼 정원이란, 특별히 사계절 내내 꽃이 가득 찬 공간이 아니다. 하늘에 들어찬 별처럼 찬란한 만개의 순간을 일 년에 며칠 정도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소우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 인생에서 겨울은 좌절의 기간이다. 식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것도 새로운 비약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 취미란 게 대체로 그런 것 아닌가.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  (9, 24, 50쪽)

예부터 지구별 모든 사람은 스스로 삶을 지었습니다. 왜 스스로 삶을 지어야 하는가 하면, 예부터 지구별 모든 사람은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얻어야 했으니, 스스로 삶을 지어야 했습니다. 아기가 아니라면 누구나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어야 합니다. 몸이 아파서 드러눕지 않는다면 마땅히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건사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지구별 거의 모든 사람이 돈을 벌기만 할 뿐, 스스로 삶을 짓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지구별 거의 모든 사람이 '전문 일자리'에 얽매일 뿐, 스스로 삶을 가꾸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기자나 의사나 교사나 운전사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법관이나 경찰이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일꾼과 같은 '한 가지 일만 하는 전문가'로 있을 뿐, 밥이나 옷이나 집을 손수 지어서 가꾸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오늘날에는 참말 거의 모든 사람이 돈을 벌기만 해서 돈을 쓰기만 하는 하루를 보냅니다. 흙을 만질 겨를이 없고, 흙을 헤아릴 틈이 없으며, 흙을 밟거나 흙내음을 맡거나 흙숨을 쉴 자리가 없습니다.

.. 산길에서 만나면 "아, 꿩이 있구나."로 끝나겠지만, 우리 집 안이라는 너무나 친근한 장소에서 꿩을 목격하자 감동과 흥분이 뒤따랐고, 깊게 교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으로 일었다 … 여름 정원을 운치가 없는 지루한 공간이라 규정한 것은 너무 조급했다. 무의미한 단색으로 유린된 가련한 공간으로 보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 평화를 넘어 타락의 소굴로 변한 이 나라는 정신은커녕 영혼까지 통째로 뺏길 위험에 처해 있고, 어느새 따라야 할 모범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완전히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있고, 자신을 계속 압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기기만의 재능이 뛰어난 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  (34∼35, 81, 92쪽)

마루야마 겐지님이 쓴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바다출판사, 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은 마루야마 겐지님이 누리는 시골살이 가운데 한 토막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 곁님이랑 둘이 조용히 깃들어서 살며 누리는 이야기를 곰곰이 들려줍니다. 다만, 곁님 이야기를 이 책에 적지 않습니다. 오직 마루야마 겐지 한 사람이 누리고 바라보며 생각하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라는 책은 어떤 이야기를 적은 책일까요? 마루야마 겐지님은 '정원 일'을 적었다고 밝힙니다. 그러면 '정원'은 어떤 곳일까요? 일본사람은 '庭園'이라는 한자말을 쓰는데, 한국말로 옮기면 '뜰'이나 '꽃밭'입니다. 그러니까, 마루야마 겐지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350평짜리 '뜰'이나 '꽃밭'을 가꾼 열두 달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우리 집 마당과 꽃밭과 뒤꼍 곳곳에서 삼월부터 피어나는 민들레입니다. 흰민들레꽃은 곱기도 하고, 잎사귀가 맛난 나물이기도 합니다.
 우리 집 마당과 꽃밭과 뒤꼍 곳곳에서 삼월부터 피어나는 민들레입니다. 흰민들레꽃은 곱기도 하고, 잎사귀가 맛난 나물이기도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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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 가꾸기는 언어, 그림 도구나 악보, 암석이나 점토, 금속이나 유리처럼 경험을 통해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식물을 상대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고 순조롭게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 안타깝게도 아주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예술은 아직 예술을 흉내내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 피상적인 미의 세계는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비슷하게 흉내내고 다시 찍어내는 행위가 횡행한다 … 바람 없는 맑은 날 오후였다. 단풍이 절정에 이른 정원에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처음으로 땅에 적응해 길들여진 인간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  (97, 102, 106쪽)

뜰이나 꽃밭은 '텃밭'이 아닙니다. 풀꽃과 꽃나무를 심어서 돌보는 곳이 뜰이거나 꽃밭입니다. 그러니까, 마루야마 겐지님도 이녁이 손수 먹을 밥을 돌보려고 하는 밭자락이 아닌,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면서 생각을 곱게 북돋울 마음으로 가꾸는 뜰이요 꽃밭인 셈입니다.

그런데, 마루야마 겐지님은 뜰이거나 꽃밭인 땅을 가꾸고 손질하면서 찬찬히 깨닫습니다. 이를테면 "위대한 철학자들이 만약 정원 꾸미기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진정 기뻐하며 위대한 범인으로써 생애를 장식할 수 있지 않았을까(126쪽)." 같은 깨달음입니다. 이 말은 다른 '철학자'와 '지식인'한테 외치는 말이면서, 바로 마루야마 겐지님 스스로한테 외치는 말입니다. 마루야마 겐지님 스스로 뜰이요 꽃밭을 가꾸면서 '나 스스로 가장 수수한 삶을 사랑하면서 즐긴다'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마루야마 겐지님을 비롯해 수많은 '전문가'와 '작가'가 저마다 제 텃밭을 누리거나 논을 일굴 수 있다면, 훨씬 더 수수하면서 투박한 삶이 될 테고, 저마다 스스로 가장 고우면서 참다운 숨결로 거듭나서 사랑과 꿈을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작은 꽃인 '좀꽃마리'입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풀꽃이고, 아이들과 늘 바라보는 꽃빛입니다.
 아주 작은 꽃인 '좀꽃마리'입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풀꽃이고, 아이들과 늘 바라보는 꽃빛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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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은 가능한 색채를 모두 동원해, 조금 지쳐 있던, 아니, 어쩌면 아사 직전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를 영혼을 금세 치유하고, 기쁨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다 … 단풍이 선사한 도취의 하루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로써 훌륭한 생애는 아닐까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무엇이든 겉만 봐서는 본질에 가까워질 수 없다. 직접 손으로 만짐으로써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 읽는 것은 머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쓰는 것은 정원 일처럼 육체적 노동이 동반된다 … 읽는 것은 감상이고, 쓰는 것은 연주이다. 연주를 하려면 당연히 거듭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체험과 경험이 밑받침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에 매달려 살아가려는 사람은, 경솔하게 산 사람보다도 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  (108, 110, 120, 121쪽)

삶은 누구나 스스로 짓습니다. 삶짓기입니다. 밥을 지어서 밥짓기이고, 옷을 지어서 옷짓기이며, 집을 지어서 집짓기입니다. 삶을 짓는 까닭은 밥과 옷과 집을 짓기 때문에 삶짓기인데, 흙을 지어야 밥과 옷과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흙을 지어서 풀열매가 나옵니다. 흙을 지어서 풀줄기에서 실을 얻습니다. 흙을 지어서 나무가 우람하게 자란 뒤에 집을 짓습니다.

사람이 가꾸는 나무는 '내가 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꾸는 나무는 '내가 낳은 아이가 누립'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나무는 옛사람이 나를 헤아리면서 심어서 가꾸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오늘 이곳에서 나무를 심어서 가꾸지 않으면, 내 뒤를 이어서 자라거나 살아갈 사람이 누릴 나무가 없습니다.

내가 오늘 삶을 지어야 나부터 즐거운 하루가 되고, 내 뒤를 이어 이 지구별에서 보금자리를 일굴 아이들이 즐거운 터전을 가꿉니다. 내가 오늘 삶을 짓는 이곳은 내 앞사람이 슬기로운 마음으로 기쁘게 가꾼 터전입니다.

오월은 찔레꽃이 가득 피는 철입니다.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찔레꽃입니다.
 오월은 찔레꽃이 가득 피는 철입니다.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찔레꽃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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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에 틀어박혀 관념에만 매달리고, 나 혼자 인간과 세계 전체를 파악하려 하면 어떤 천재라도 결국은 고뇌로 인한 고뇌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 도시가 이상한 세계이고, 생물들이 살 만한 공간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는 걸 진심으로 설득할 사람이 없다면, 그 중요한 역할의 일부를 내가 담당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자연으로부터 나는 책 수만 권을 독파하는 것 이상의 대발견을 계속 하고 있다 … 바람은 장미를 단련시켜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장미는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낸다 ..  (127, 128, 132쪽)

열두 달 이야기를 차곡차곡 갈무리한 글을 읽습니다. 마루야마 겐지님은 처음에는 풀과 나무를 이야기하는듯이 보였으나, 책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도시에서 사는 이웃'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한 자락 읊습니다. "도시가 이상한 세계이고, 생물들이 살 만한 공간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128쪽)." 같은 이야기를 즐겁게 노래하듯이 말합니다. 마루야마 겐지님이 읽는 '책'은 도시에 있는 인문학자가 지식으로 쓴 글꾸러미가 아니라, 시골에서 손수 일구는 풀과 나무가 들려주는 '숲책'이라는 이야기를 기쁘게 노래하듯이 말합니다.

책을 마무리지으면서 적은 "바람은 장미를 단련시켜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장미는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낸다(132쪽)" 같은 대목에 천천히 밑줄을 긋습니다. 나는 이 마음을 날마다 느낍니다. 나도 시골자락 우리 보금자리에서 바로 이 이야기를 아침저녁으로 아이들과 누립니다.

장미꽃내음이 얼마나 짙은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길가에 핀 장미꽃이나 놀이공원에 가득한 장미꽃이 아니라 '우리 집 꽃밭'에서 핀 장미꽃이 얼마나 깊고 짙으며 너른 냄새를 나누어 주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집 마당에도 장미꽃이 핍니다. 집에서 돌보는 장미나무에서 꽃이 필 적에 풍기는 냄새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짙고 맑으면서 곱지요.
 우리 집 마당에도 장미꽃이 핍니다. 집에서 돌보는 장미나무에서 꽃이 필 적에 풍기는 냄새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짙고 맑으면서 곱지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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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시골자락마다 찔레꽃이 피는 철입니다. 찔레꽃이 피는 철은 들딸기가 빨갛게 익는 철입니다. 하얀 찔레꽃 사이사이 새빨간 들딸기알이 알록달록 어우러집니다. 찔레꽃내음과 들딸기알내음이 어우러지는 바람을 마시면, 손으로 열매를 훑어서 먹지 않아도 온몸이 배부릅니다. 마루야마 겐지님은 바로 이런 꽃내음과 바람노래를 언제나 누리기에 '뜰이나 꽃밭을 가꾸는 삶노래'를 조곤조곤 글로 적어서 멋지게 책으로 엮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글
이영희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2015.5.8.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바다출판사(2015)


태그:#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 #마루야마 겐지, #책읽기, #인문책, #시골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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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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