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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만발한 길을 달립니다.
▲ 꽃길 유채꽃 만발한 길을 달립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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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자전거 길을 달리기에 가장 좋은 때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활짝 핀 가로수 벚꽃터널을 만날 수 있는 4월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벚꽃을 볼 수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양 옆에 늘어선 유채꽃과 나지막히 줄지어 핀 철쭉이 벚꽃을 대신해 여행자를 맞는다.

바람이 불지 않아 잔잔한 강은 세상에서 제일 큰 거울이라도 된 듯 숲을 그대로 비춘다. 아들 누리에게로 향하는 자전거 여행자들의 힘찬 '파이팅' 소리와 따뜻한 격려의 시선은 누리는 물론 내게도 큰 힘이 되었다. 함께 오길 정말 잘했다며 나 자신을 칭찬한다.

작은 오르막과 뒤이어 나오는 내리막의 반복을 즐기며 파란색 선을 착실히 따라가니 어느새 출발지에서 21km 정도를 달려 장군목에 다다랐다.

장군목을 지나면 만나는 현수교입니다.
▲ 현수교 장군목을 지나면 만나는 현수교입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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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등에 작은 배낭을 지고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들이 보일 뿐 길은 뻥 뚫려 있어 아들과 내가 전세를 낸 전용도로 같았다.

마실숙박휴양캠핑장을 지나 5분이나 달렸을까? 새 다리를 놓고 있는 공사현장이라 비포장 길을 지나야 하는 구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저 앞쪽에 두 사람이 흙바닥에 주저 앉아 있다.

"혹시 튜브 남는 것 있으세요? 벌써 두 번째 이러는데 자꾸 펑크가 나네요."


경기도 일산에서 오셨다는 두 분은 엄마와 아들이었다. 둘이 짝을 이뤄 '엄마의 로망'을 실현 중인가 보다. 그런데 두 번 연속 펑크. 게다가 단순 펑크도 아니고 공기 주입구 부근이 반쯤은 찢어져 너덜거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마침 새 튜브를 챙겨왔는데 튜브를 건네기도 전에 돈을 먼저 쥐어주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셨던 것 같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자전거를 고칠 만한 가장 가까운 곳이 수십 km나 떨어진 순창읍에 가야 있다.

같은 자전거 여행자로서 묘한 동지애가 느껴지는 데다, 갈 길은 멀어도 어려움에 처한 분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솜씨는 없지만 쪼그려 앉아 수리에 손을 보탰다. 대충 수리가 마무리되고 슬슬 출발하려는데, 우리를 갑자기 불러 세웠다.

"아이구, 우리 아들내미 가면서 먹어."

텐트에서 잔다는 누리가 눈에 밟혔는지 치즈와 직접 만드셨다는 꿀에 버무린 견과강정을 쥐여 주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우연히 길에서 만나 몇 분 동안 깊은 정을 나누고 헤어졌다.

아뿔싸... 점찍은 캠핑장소에 텐트를 칠 수 없다니

라이딩을 시작한 지 3시간이 넘자 슬슬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아들은 엉덩이가 아프다며 연신 패달을 밟고 일어서고 나는 손목이 시큰해서 왼손과 오른손을 수시로 털었다. 누리의 자전거 패달링이 점점 느려지는 것이 느껴질 때쯤 우리는 섬진강 군민공원 부근에 다다랐다. 이곳은 내가 미리 점찍어 놓은 첫째날 숙박장소였다.

물과 전기를 구할 수 있는 화장실 딸린 넓은 공터가 있는 곳이고, 강변에 자리하고 있어 경치도 좋은 이 곳, 캠핑장소로 딱이다. 그런데 아뿔싸! 공원 부근 진입로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에는 야속하게도 '취사와 야영이 불가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로드뷰로 싹싹 훑어가며 찍어놓은 곳인데 이렇게 배신을 하다니.

누리는 이미 지쳐 버려서 더 이상은 달리기 싫은 눈치고, 더해서 여기서 캠핑을 못한다 하니 대실망했다. 그렇다고 대문짝만하게 써놓은 것을 대놓고 무시할 배짱 없는 아빠는 누리를 살살 달랬다.

"아빠, 그냥 여기서 텐트 치면 안 돼?"
"누리야, 우리 조금만 더 달려볼까? 이 근처 마을에 들어가면 텐트칠 곳이 있을 거야."


자신있는 듯 말하긴 했지만 사실 확신은 없었다. 당연히 캠핑이 가능할 것을 확신하고 'Plan B(플랜 비)'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약없이 무작정 계속 달리기에는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무리다. 시간도 점점 늦어져 어두워질 것 같고 해가 사라지자 날씨도 더 쌀쌀해질 것 같아 걱정이다. '이래서 집 나오면 고생인가?'

무작정 근처 마을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시골마을에는 마당 넓은 마을회관이나 작은 정자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누리야, 저기 정자다, 정자!"
"오예~"


그리고 내 추측은 적중했다. 천만다행으로 얼떨결에 찾아 들어간 마을 안에 정자가 있었다!

빗나간 계획...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이유 아닐까

오늘 하루 쉬어갈 곳입니다.
▲ 정자 오늘 하루 쉬어갈 곳입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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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 길가라서 명당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일단 정자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마을 분이 있어 깍듯이 인사하고 정중하게 사정을 말씀드리니 흔쾌히 허락하신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저 어린 것이 있는데 설마 우리를 내치지는 않으시겠지?'하는 마음이랄까?

마을분들이 텐트 앞으로 수시로 지나쳤지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관심이 없어서 이상할 정도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문이 활짝 열린 집이 있어 무작정 들어가 주인께 허락받아 물을 얻고 내친 김에 세수까지 끝냈다. 이럴 때는 체면보다는 실속을 챙기는 게 이득이다.

저녁에는 바비큐를 할 생각이었다. 겨우 얻은 잠자리리라, 연기 피운다고 쫓겨나지는 않을까 두려웠지만 누리만 믿고서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웠다. 이쯤되면 영락없이 이 마을 모모씨네 아들하고 손주가 놀러온 모양새다.

고기가 익어 갑니다.
▲ 바비큐 고기가 익어 갑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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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식으로 감자까지 구워먹고 드립 커피로 마무리를 했으니 캠핑을 나와 풀코스를 즐긴 셈이다. 바로 근처에 유풍교가 있으니 오늘은 대략 40km를 달린 것이고 이만하면 출발이 괜찮다.

저녁 밥을 먹고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가 고단한 몸을 뉘였다. 기둥 두 개가 버텨주는 2인용의 작은 텐트였지만, 내 집 안방처럼 편안하고 아늑했다. 마실 나온 주민들의 이야기 소리가 밤벌레 울음소리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 저녁이다.

뜻밖의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조우, 해프닝, 계획이 빗나가 엉뚱하게 상황이 변경되는 경험... 이런 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또 우리가 여행을 떠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이를테면 여행의 맛과 멋을 더하는 깨알같은 묘미인 것이다.

하루동안 쌩쌩 잘 달려준 두 대의 자전거, 먼 길에도 아빠를 잘 따라와 준 누리,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건네며 유등면 내이리 정자 안 텐트에도 깊은 밤이 찾아왔다.

(*3편에서 계속)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자전거여행, #섬진강자전거길, #캠핑, #바비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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