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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 자동차 추돌사고가 났다. 뒤차는 앞차의 급정거 때문이라고, 앞차는 뒤차가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탓이라고 우긴다. 서로 상대에게 책임을 미루다가 누군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진다.

"법대로 해!"

분쟁이 생기면 법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과연 현행법을 잘 따르기만 하면 정의가 실현될까. 그것은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징역형으로 단죄하던 간통은 이제 처벌할 근거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외도가 권장할 일로 바뀐 건 아니잖는가. 때로는 실정법의 문구에 집착하는 것이 정의를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법대로'만 외치는 일이 타당한지 고민하게 하는 2개의 사건이 있다. 서울역 노숙인 방치 사망사건 vs 공공임대주택 노인 퇴거사건이다. 전자는 법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 후자는 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판결 1] 서울역 노숙인 방치 사망사건

쓰러진 노숙자 방치, 법원 판결은?
 쓰러진 노숙자 방치, 법원 판결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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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어느 날 새벽 서울역 대합실. 체감온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 노숙인 최고단(가명)씨가 쓰러져 있었다. 순찰을 돌던 서울역 직원 엄규정(가명)씨는 그에게 다가갔다. 최씨는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고 몸에선 술냄새가 진동했다.

엄씨는 일단 119를 불렀다. 출동한 구급대원은 최씨가 맥박이 정상인 걸 확인한 뒤 단순 주취자라고 보고 돌아갔다. 그런데 최씨는 술에 취한 것만이 아니었다. 갈비뼈가 심하게 부러져 있었고, 장기에도 손상이 가 있는 심각한 상태였는데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최씨를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던 엄씨는 역사 관리를 위해서 원칙대로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곤 철도안전법을 떠올렸다. '철도종사자는 역시설 또는 철도차량에서 노숙하는 행위를 한 사람을 밖으로 퇴거시킬 수 있다.'

그는 동행한 사회복무요원에게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최씨는 대합실 출구 앞 찬바닥에 내려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곳에 또 다른 사회복무요원 변인성(가명)씨가 나타났다. '노숙인이 쓰러져 있으니 확인하라'는 무전을 받은 뒤였다. 그 사이 한겨울 추위에 방치된 최씨의 몸상태는 더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변씨도 역무원의 지시에 따라 노숙인을 역사 밖으로 멀리 이동시켜야 했다. 그는 후배를 불러 둘이서 최씨를 휠체어에 태우고 한참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서울역사 구름다리 아래에 최씨를 내려놓았다.

최씨는 그날 낮 12시경 숨진 채 발견됐다. 그런데 사인은 동사가 아니었다. 흉부의 고도손상(갈비뼈 골절과 폐의 파열)이었다.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이다. 결국 최씨는 한겨울 길거리 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노숙인을 역사 밖으로 방치해 사망, 무죄인 까닭?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법언이 있다. 법은 도덕의 범주 안에서 꼭 필요한 부분만 개입하는 게 타당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디까지 도덕의 영역이고, 어디부터 법의 영역인지 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노숙인 최씨를 역사 밖으로 끌어낸 서울역 직원 엄씨와 사회복무요원 변씨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만일 최씨를 병원으로 후송했더라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법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법은 그들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먼저 법조항부터 따져보자. 두 사람을 피고인석에 세운 죄명은 형법의 유기치사죄다. 사람을 유기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다. 형법의 유기죄는 다음과 같다.

노유(老幼), 질병 기타 사정으로 인해 부조(扶助)를 요하는 자를 보호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주의 깊게 볼 대목은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이다. 예를 들어 노부모를 모시는 자식, 아이를 키우는 부모,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사고 운전자를 발견한 경찰 등은 보호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처벌대상이 된다. 하지만 단순히 도덕적 의무로 보호했어야 할 사람에겐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서울역 직원은 취객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걸까.

법원(서울중앙지법 권태형 판사)은 의무가 없다고 해석했다. 한국에는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구조하지 않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처벌하는 법,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 법'(구조거부죄, 불구조죄)이 없다.

법원은 "우리 형법은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기본형식으로 취하지 아니하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만을 (유기죄의) 범죄주체로 설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관련법을 살펴봐도 서울역 직원이나 사회복무요원의 구조의무나 부조의무를 부과하는 규정이 없다고 보았다.

법원 "서울역 직원은 노숙인이나 취객 보호할 법률상 의무 없다"

검찰은 공사 직원이나 사회복무요원은 공무원처럼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니 '사회통념상' 당연히 어려운 사람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법원은 "유기죄의 부조의무를 확장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며 무죄로 판결했다. 법에 나와 있지 않는 한 판사의 마음속 잣대로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2심과 3심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역 직원은 노숙인이나 취객을 보호할 의무가 없다. 법률상·계약상 보호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법의 논리, 과연 타당할까.

더 냉정하게 말하면, 거리에서 생사를 오가는 응급환자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더라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도록 촉구하는 일은 도덕의 영역에 두어야 하나, 아니면 법으로 처벌해야 하나.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판결을 마치며'라는 제목으로 소회를 털어놓았다. "피고인들에게 유기죄의 형사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망인의 죽음 앞에 도덕적인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노숙인의 죽음 앞에 법은 무력하기만 했다.

[판결 2] 공공임대주택 노인 퇴거사건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 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민사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원고가 법원에 내는 서류 : 기자 주)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수필이나 소설로 보일 테지만, 판결문의 일부다. 대체 어떤 노인의 기구한 사연을 보았길래 판사는 장탄식을 늘어놓게 하는 판결을 썼을까. 속사정을 캐보자.

충남 연기군에 사는 70대 이장혁(가명)씨는 뇌경색에 걸린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전혀 거동을 못하는 아내의 대소변을 가리는 일부터 밥을 먹이는 일까지 모두 이씨가 도맡아야 했다.

갈수록 형편이 어려워진 이씨는 마침 공공임대아파트가 지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근처에 살던 작은 딸 상미(가명)씨를 불렀다. "얘야, 임대주택이 나왔다던데 우리 내외 살 집 있는지 한 번 알아봐주련?"

공공임대 아파트 거주 70대 노인이 쫓겨난 사연

평소에도 아버지의 심부름을 도맡았던 상미씨는 주택공사를 찾아갔다. 변변한 정보도, 법률지식도 없이 무작정 방문한 상미씨는 아버지 명의로 계약을 하려면 준비해야 할 서류가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신분증, 도장, 위임장도 없어서 막막했다.

'그냥 내 이름으로 하면 안 될까.'

상미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임대아파트는 원래 무주택자만 입주할 수 있었다. 당시 남편 명의로 집이 있던 상미씨는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담 직원은 뜻밖에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이유인즉 이 아파트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적어 미달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택공사는 요건이 안 되는 주택 보유자에게도 선착순으로 입주를 허가했다. 상미씨는 얼떨결에 자기 이름으로 계약을 마쳤다. 그 뒤에 다가올 여파까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한 채.

어쨌거나 딸 상미씨 덕분에 이씨는 아내와 함께 24평 임대 아파트에 살 수 있었다. 입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의 아내는 병마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홀로 되었다.

5년이 지났을 무렵 임대아파트를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공고가 났다. 자격조건은 '입주일 이후부터 분양전환 당시까지 임대주택에 거주한 무주택자인 임차인'이었다. 이씨는 자신도 분양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주택공사는 되레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분양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내 병수발 때문에 임대아파트 계약을 딸에게 맡겼을 뿐이고, 계속 아파트에서 살아왔는데.

사실 상미씨가 아버지를 위해 대신 계약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계약서 어디에도 '이장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실수라면 아내의 간병을 위해서 직접 주택공사를 가지 못한 게 실수고, 죄라면 법에 무지한 게 죄인 셈이다. 실수와 무지로 이씨는 꼼짝없이 쫓겨나게 되었다.

"아내의 간병 때문에 딸이 대신 계약..." 1심 인정 안해

법원 판결.
 법원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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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후 주택공사는 법원에 명도소송을 냈다. 1심(대전지법 정갑생 판사)은 주택공사의 손을 들어준다. 주택공사와 계약한 당사자인 상미씨가 무주택자 요건을 못 갖췄으니 아파트를 비워주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법원은 "실제 거주한 이씨가 무주택자여서 우선적으로 분양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법률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이씨는 읍소하는 심정으로 항소를 제기했다.

사건을 맡은 항소심(대전고법 제3민사부 재판장 박철)은 고심이 깊어졌다. 현행법을 따르자니 노인이 쫓겨나게 생겼고 그렇다고 법을 무시하자니 판사로서 도리가 아니었다. 재판부는 법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으로 해답을 찾아간다.

재판부는 '임대주택 건설을 촉진하고 국민주거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임대임대주택법의 목적을 떠올려 보라고 권유한다. 임대주택법은 무주택자나 목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임대주택 공급을 늘리고 실수요자에게 제공되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는 이런 공익적인 목적을 충분히 참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진정한 임차인이 누군지 따져보아야 한다면서 설명을 이어간다. '애초에 구한 집은 이씨가 살 집이었다. 보증금도 이씨의 돈에서 나갔다. 이씨는 처의 병수발로 자리를 뜰 수 없어서 딸에게 계약을 부탁했다. 딸이 자기 이름으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것은 법률지식이 부족해서 저지른 실수였다.'

법원은 "이와 같은 실수가 개입되지 않았더라면 이씨가 임대주택을 분양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면서 "고령에 홀로 살고 있는 노인에게 작은 실수 때문에 이제 와 계속 거주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하기에는 잘못과 그 결과 사이에 균형을 잃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평가했다.

법원은 "'임차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법률용어로서만이 아니라 법률이 달성하고자 한 정책목표와 우리 사회가 법체제 전체를 통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가치를 아울러 고려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씨가 무주택자이고 실수요자였는데도 단지 계약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법의 공익적 목적에 맞는가.

2심 "법의 해석도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 함께"

재판부는 판사 3명 모두가 다음 3가지에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했다. ① 이 사건에서 임차인은 실질적인 의미의 임차인으로 해석해야 한다. ② 이씨는 실질적 의미의 임차인이다. ③ 이씨는 임대주택을 분양받을 권리가 있다.

2심 재판부는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라면서 법을 '기성복'으로 비유했다.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도 팔이 더 길거나 짧은 사람이 나오게 된다.

그럴 때마다 "당신의 팔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당신의 잘못이니 당신에게 줄 옷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옷의 길이를 조금 늘이거나 줄여 수선해 줄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이때 법원이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수선을 할 의무와 권한이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재판부는 70대 노인을 구제해주는 판결을 내렸다. 현행법을 뛰어넘어 법의 정신을 꿰뚫으려는 판결이었다.

대법원 "2심 판결은 법적안정성 훼손" 뒤집어

하지만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대법원은 2심이 법을 잘못 해석했다고 지적했다. "법해석은 어디까지나 법적 안정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는 데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요지였다.

대법원은 2심을 향해 "특별한 사안을 타당성 있게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법률 해석의 본질과 원칙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원칙에서 벗어나면 법관이 자의적인 재판을 한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법적 안정성을 훼손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임차인이란 어디까지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당사자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임차인은 상미씨가 맞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은 기존의 잣대와 다른 '창조적'인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대법원은 보편타당성과 법적안정성을 강조했다.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함부로 뛰어넘어 법률 문언을 넘거나 반하는 해석하면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2심 판결은 결국 '위법한 판결'이 되고 말았다.

법원은 말로는 소수자 보호, 정의나 공평의 관념이라는 강조하지만 실제 법해석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노숙인 사망 사건처럼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도 처벌 법규가 없으면 제재를 가할 수가 없다. 반대로 이씨처럼 법을 잘 몰라서 중요한 실수를 한 사람을 법은 좀처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법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전고법의 판결처럼 법의 해석은 때로는 적극성을 띨 필요도 있다. 국가가 홀로 사는 칠순노인에게 임대주택을 분양해준다고 해서 '불법행위'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법률을 해석하는 법원은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법전 속에서만 정답이 있을까. 법전 속에 숨어있는 정신까지도 판결에 녹아낸다면 법원의 신뢰는 한층 더 높아지리라.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노숙자, #착한사마리아인법, #유기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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