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작가 놀음, 예능은 PD 놀음'이라는 시쳇말이 있었다. 기획과 편집이 가장 중요한 예능 프로그램 제작 환경에서, 이를 총괄하는 PD의 임무가 매우 막중함을 방증하는 표현이다. 그간 이른바 '스타 PD'들은 리얼 버라이어티와 관찰 예능, 오디션 프로그램 등 새로운 예능을 만들며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될 기발한 기획과 캐릭터들을 남겨 왔다. 그리고 이처럼 참신한 시도를 보여준 프로그램들의 뒤에는 '기발함'을 기어이 '트렌드'로 만들어 버리는 예능 '미투상품(인기 브랜드를 모방하여 유사하게 만든 상품)'들이 존재한다. 대부분 흥행이 보장된 형식과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다 쓰기 때문에, 이제 예능은 'PD 놀음'이 아닌 '출연자 놀음'이 됐다.

이러한 예능계 판도 속에서 JTBC <크라임씬>은 간만에 보는 '공들인 예능'이다. 제작진이 실제 사건을 재구성해 만든 이야기와 추리게임이라는 형식이 만나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낸다. 영화 <도그빌>처럼 매주 사건 현장을 한눈에 보이도록 재현해 놓은 세트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정교하다. 그렇게 빈틈 없이 짜여진 무대 위에는, 각자 부여받은 역할을 연기하며 동시에 추리까지 하는 출연자들이 있다.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범인을 지목하는 투표를 하며 출연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따라가고, 게임에 참여한다. 이때의 몰입도란 20년 전 프로그램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이휘재의 인생극장> 혹은 <테마게임>을 상기시킬 정도다.

이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추리게임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출연자 개인의 능력치가 부각되는 면이 있지만, 뜯어볼수록 매주 다른 가상의 세계와 캐릭터를 만들어 '롤플레잉' 형식으로 연출해내는 제작진의 역량이 매우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크라임씬>은 제작진과 출연진 간의 균형과 '케미'가 돋보이는 예능이다. tvN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을 살린 것이 홍진호였다면, 그가 놀 수 있는 판을 깐 것은 김한규 PD였던 것처럼.

최근 '구경하는' 예능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크라임씬>은 '몰입형 예능'으로 등장하고 또 시즌을 거듭하며 진화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방송됐던 첫 번째 시즌은 정황과 단서들이 방송분 내에서 채 소화되지 못한 채 사건이 마무리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거나, 한 사건을 2회에 걸쳐 방송해 추리의 맥을 끊는 등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추리 대결보다는 의미 없는 심리전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8일부터 전파를 탄 <크라임씬2>는 이 같은 시즌1의 단점들을 상당 부분 보완해내며, 추리 장르에서 말하는 '본격 추리(사건이 발생한 후 탐정이 이를 뒤쫓는 과정에서 차례로 용의자가 발견되나 끝내 모든 트릭이 밝혀지는 구성의 추리물)'에 더욱 가까워졌다.

우선 <크라임씬>의 세계 속에 끼어들었던 현실이 최소화됐다. "이건 게임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출연자들이 현실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순간은 방송 말미 다음 회차 역할 카드를 뽑을 때 뿐이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별다른 소격효과 없이 더욱 쉽게 게임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또 두 번째 시즌부터 등장한 탐정 역할은 두서 없이 진행됐던 '일대일 심문'의 시간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더불어 탐정은 보는 이들에게 주인공과 관찰자를 넘나드는 1인칭 시점을 제공하며 좀 더 안정적인 몰입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처럼 <크라임씬2>가 가장 개선에 애를 쓴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바로 '몰입감'이다. 추리드라마가 아닌지라 시청자들과 함께 추리게임을 하는 것이 목표인 <크라임씬> 시리즈에서 몰입감이란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도 할 터다.

그렇게 <크라임씬2>에서 개선된 부분들을 목격하는 도중, 의외의 인물이 포착됐다. 첫 방송에서 탐정으로 등장하며 몰입감의 기폭제 역할을 한 장진 감독이다. 이르게는 SBS <순풍산부인과>부터 자신의 작품인 영화 <아는 여자>와 <퀴즈왕>까지 단역으로나마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그였지만, 장진에게 익숙한 수식은 아무래도 '감독'인 것이 사실이다. tvN < SNL KOREA > 내 한 꼭지였던 'Weekend Upadate'에 출연한 것도 '연기 활동'이라 부르기는 애매한 감이 있다. 장진이 <크라임씬2>에서 보여준 '메소드 연기'의 임팩트가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크라임씬2>가 3화까지 진행된 현재 장진은 탐정, 책방 주인, 미인대회 심사위원으로 분했다. 탐정일 때는 '인문학적 추리'를 주창하며 거드름을 피우고, 책방 주인일 때는 순박하지만 비밀을 감춘 노총각으로 변신했으며, 미인대회 심사위원일 때는 이혼한 부인에게도 다정한 '능청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캐릭터를 잡는데 능수능란한 것은 역시 오랜 감독 생활 덕일까. 짧은 기간이지만 장진이 <크라임씬2>에서 보여준 '몰입도 100%'의 장면들을 추려 봤다.

* 이어지는 내용엔 <크라임씬2> 내용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1. 중년탐정 장전일의 등장

 JTBC <크라임씬2>의 한 장면

JTBC <크라임씬2>의 한 장면 ⓒ JTBC


아직까지는 탐정 역할은 되도록 맡지 않았으면 싶은, 감독 장진의 롤플레잉 적응기. 그러나 곧 '롤플레잉 천재'로 진화할 그의 모습이 예상되는 단계. 탐정 보조와의 첫 대면에서 "외모 보고 뽑나? 왜 이렇게 잘생겼어"라며 너털웃음을 짓는 나긋한 모습과, 한 손엔 카메라 한 손엔 단서를 든 채 프로 냄새를 풍기는 모습의 조화가 인상적.

#2. 종달새를 향한 애틋한 마음

 JTBC <크라임씬2>의 한 장면

JTBC <크라임씬2>의 한 장면 ⓒ JTBC


자신과의 불륜을 고백하려는 하니를 만류하며 던진 "자기야, 내가 얘기할게." 한 마디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2화 내내 하니를 '자기야'라고 부르는 장진에 주변은 아연실색했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원체 자연스러워 어느새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말았다. 포인트는 '자기야'의 'ㅈ' 발음을 'Z'로 내는 것. 애인인 하니를 나쁘게 말하는 박지윤에게 "같은 여자끼리 왜 그래?"라며 벌컥 역정을 내는 바람에 박지윤은 물론 시청자까지 당황시키기도.

사랑의 도피를 획책하며 맞담배를 피우던 '종달새' 하니가 장진의 도박 전력을 밝히는 바람에 추리극은 다시 막장극으로 둔갑.

#3. 과거를 묻지 마세요

 JTBC <크라임씬2>의 한 장면

JTBC <크라임씬2>의 한 장면 ⓒ JTBC


김지훈의 추리로 조직폭력단 양동이파에서 자해공갈단으로 암약했던 과거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만 장진. 갑자기 피곤한 표정을 하더니 안경을 벗고 마른 세수를 한다. 전직 조폭 부두목의 형형한 안광이 드러나자 좌중은 두려움에 떠는데... "갱생의 길을 가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고 봐..."라며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본인을 변호하다가도 눈을 홉뜨니 주위는 모두 좌불안석 상태. 그러다가도 "내 종달새"라며 애인 하니를 향한 애정 과시까지 잊지 않는다.

#4. 늦게 시작한 롤플레잉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JTBC <크라임씬2>의 한 장면

JTBC <크라임씬2>의 한 장면 ⓒ JTBC


필요 이상의 달달함이 드러난 장면. 전 부인으로 등장한 오현경과 사실은 위장이혼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솟구치게 할 정도. 지난 회차 하니와의 불륜 상황에서 보여준 연기가 일취월장.

단체 심문 도중 오현경이 자신과 이혼한 사이임을 밝힌 시점부터 티격태격하기 시작. 오현경과 현장 검증을 함께 나서야 할 상황이 오자 "아유, 나 이 사람하고는!"이라며 학을 떼는 모습이 큰 웃음을 선사했다. 예능적 재미를 위해 결국 두 사람이 함께 현장으로 나서게 되고, 여전히 투닥대지만 오현경을 향한 호칭은 일관성 있게 '자기야'로 통일. 그러다가도 "필름이 너무 많이 남았다"며 들고 있던 카메라로 오현경의 사진을 찍어 주는데, '애정 필터'가 적용된 듯 예쁘게 나오기까지. "범인 사진을 찍었다"며 너스레로 마무리.

#5. 오늘은 얼마나 더 빠져들었을까

 JTBC <크라임씬2> 예고편의 한 장면

JTBC <크라임씬2> 예고편의 한 장면 ⓒ JTBC


다양한 떡밥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29일 오후 방송되는 <크라임씬2> 4회의 예고편 속 25세의 재미교포로 등장한 장진. "파하는 게 뭐에요? 파 있고 시 있고 도레미?" 같은 남사스러운 대사도 '롤플레잉 천재'의 입에서 나올 때는 그의 강렬한 존재감을 돋보이게 할 수단일 뿐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연기력에 먼저 박수를 보내 둔다.

<크라임씬2>은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은 장진 뿐만 아니라 시즌1에서 이미 실력이 확인된 박지윤, 홍진호에 우려했던 하니까지 제몫을 다하며 제작진과 출연진의 '케미'를 입증했다. 'PD 놀음'과 '출연자 놀음'이 한꺼번에 벌어질 때의 이 화학작용은, 단서를 두고 출연진끼리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과 출연진이 대결하는 데서도 발생한다. 만약 출연진 사이에 경쟁 구도가 발생했다면 <더 지니어스 : 룰 브레이커> 속 연합이 벌인 만행을 보았을 때의 실망스러움을 다시 느껴야 했을 것이며, 회를 거듭할 수록 '마피아 게임'의 꼴과 크게 차이 없는 심리전을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라임씬2>은 퀄리티 높은 '떡밥', 즉 정황을 '추리하게 만드는' 단서가 부족하다는 점이 아직도 당면 과제로 남아 있다. 출연진이 물증의 애매함을 견디지 못하고 심증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들의 모든 추리는 '창작'으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바꿔 말하면 심증만 가지고 '소설을 쓰게' 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찾기만 하면 정답이 되어버리는 단서도 존재해서 추리 과정 자체가 무의미해질 가능성도 있다. 탐정 역할이 범인 투표에 2표나 행사해야하는 이유도 아직까지는 찾을 길이 없다. 피드백이 빠른 것으로 유명한, '공들인 티 나는 예능' <크라임씬>이 이러한 단점들을 극복해 JTBC의 대표 장수 프로그램으로 남길 바란다.


크라임씬2 장진 하니 박지윤 홍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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