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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빛고을, 전주는 온고을, 그러면 성주(星州)는? 별고을이다. 이름처럼 별이 들어가는 지명이 수두룩하다. 성주읍에서 고령으로 나가는 길목에 별똥별이 떨어져 이름 붙은 별티재(성현, 星峴)가 있고 성산고분군이 있는 별뫼(성산, 星山)도 별에서 나왔다.

마을 역사만큼이나 담길은 길고 깊다. 고샅에 이런저런 사연이나 이야기들이 수북하다
▲ 한개마을 흙돌담 마을 역사만큼이나 담길은 길고 깊다. 고샅에 이런저런 사연이나 이야기들이 수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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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는 고작 4만6000여 명, 영조 때 인구가 5만6000여 명이었다 하니, 성주처럼 쭈그러든 고을도 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대단한 고을이다. 세종왕자 태실이 있고 성산가야의 터전이었으며 남한 최고의 명당, 한개마을이 있다. 깊이로 말하면 성주만 한 고을이 드문데 온갖 것 놔두고 참외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인물을 들자면 한도 없다. 한개마을 인물은 아껴두고 우선 성주가 내세우는 인물을 들자면 성주 양강(兩岡)으로 불리는 동강(東岡) 김우옹(1540~1603)과 한강(寒岡) 정구(1543~1620)가 성주 사람이고, "이화에 월백하고"로 시작하는 <다정가> 저자 이조년(1269~1343) 또한 성주가 고향이다. 동강의 후손으로 독립운동과 반독재 선봉에선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도 성주고을이 자랑 삼는 인물. 

성주에 가는 것은 좀 과장해서 '하늘의 별 따기'다. 오죽하면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에 들렀을 때 문화해설사가 '삼대의 덕을 쌓아야 오게 되는 곳'이라 했을까? 찾는 이 적어 자조의 말을 건넨 것이지만 한개마을 담 구경 핑계로 이곳까지 왔으니 나도 삼대의 덕을 쌓은 건 아닐는지. 환상은 금세 깨지는 법, 해설사는 남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를 가졌구려!

성주의 진산 선석산 아래 태봉 꼭대기에 있다. 수양, 금성, 안평을 비롯한 19기 태무덤이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성주는 생·활·사, 즉 사람이 나서 살다가 죽는 공간을 다 갖추었다 자랑삼는데 그중에 생의 공간이다
▲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 성주의 진산 선석산 아래 태봉 꼭대기에 있다. 수양, 금성, 안평을 비롯한 19기 태무덤이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성주는 생·활·사, 즉 사람이 나서 살다가 죽는 공간을 다 갖추었다 자랑삼는데 그중에 생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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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동서(東西)를 가르는 흰내(백천, 白川)는 탯줄처럼 세종왕자태실과 한개마을을 이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 죽는 것을 생·활·사(生·活·死)라 한다면 태실은 생(生)이요, 한개마을은 활(活)이다. 생과 삶이 탯줄, 흰내로 이어진 것. 한개마을은 어머니 자궁 안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마냥 마을 뒷산 영취산 양팔에 포근히 안겼다.

마을이 생긴 건 500여 년 전 일이다. 경주 양동, 안동 하회에 뒤지지 않는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다 보니 인물 많고 그럴싸한 고택이 즐비하다. 서쪽에 월곡댁과 북비고택, 교리댁이 있고 가운데에 진사댁을 시작으로 하회댁, 극와고택, 도동댁, 한주종택이 뿌리를 내렸다. 모두 멀고 가까운 한 핏줄, 성산이씨 집안이다.

고택은 흙돌담 따라 실핏줄처럼 이어졌다. 담은 집을 가두고 나누었지만 대신 핏줄을 이었다. 담과 담 사이 좁고 깊은 고샅에 이런저런 사연과 인연, 얘기가 수북하고 고택 가운데에 북비고택과 한주종택, 교리댁에는 재미난 사연과 얘깃거리가 두둑하다.

고택은 흙돌담 따라 실핏줄처럼 이어졌다. 담은 집을 가두고 나누었지만 대신 핏줄을 이었다
▲ 한계마을 담 고택은 흙돌담 따라 실핏줄처럼 이어졌다. 담은 집을 가두고 나누었지만 대신 핏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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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삶이 '탯줄'로 이어진 곳... 흙돌담 사이 두둑한 얘깃거리

북비(北扉), 북쪽 사립문이라는 뜻이다. 경남 고성 학동마을의 서비(西扉) 최우순(1832~1911)처럼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서비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지 않겠다며 호를 서쪽 사립문, 서비로 지은 것.

북비는 정반대다. 북비고택 주인으로 사도세자 호위무관이었던 돈재 이석문(1713~1773)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큰 돌을 얹으라는 영조의 명을 거역하여 삭탈관직 당하자 낙향,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사립문을 뜯어 북쪽으로 문을 내고 '북비'라 이름 지었다.

다른 고택과 달리 평대문 대신 솟을대문이고 담도 비탈 따라 연속으로 쌓지 않고 계단식으로 쌓아 위엄 있다. 소나무가지에 살짝 가린 샛문이 ‘북비’다
▲ 응와종택 대문과 담 다른 고택과 달리 평대문 대신 솟을대문이고 담도 비탈 따라 연속으로 쌓지 않고 계단식으로 쌓아 위엄 있다. 소나무가지에 살짝 가린 샛문이 ‘북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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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비고택은 응와종택으로 알려져 있다. 응와 이원조(1792~1871)는 돈재의 증손자로 이 집안을 가장 빛낸 인물. 벼슬이나 공적보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 유배 중이던 추사(秋史)와의 연(緣)에 더 마음이 간다. 조선 3대 논쟁 중의 하나인 '추사와 백파 논쟁'에 미치지 않지만 추사와 이원조의 '금고문(今古文) 논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귀양다리와 목사의 관계가 아니라 소위 '계급장을 떼고' 벌인 논쟁이어서 더 흥미롭다.

'북비' 아랫집이 교리댁이다. 두 집안의 연은 깊고도 기구하다. 남인 출신인 응와가 늦둥이인 막내아들, 귀상(龜相)을 노론 집안인 교리댁에 양자로 내준 것. 이 양자가 홍문관교리를 지내 교리댁이 되었다.

응와는 늦둥이 막내에 애틋한 정을 쏟은 것일까. 응와가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육지로 떠나올 때 촌로가 건네준 세 그루 밀감나무 가운데 한 그루를 교리댁에 심었다. 남귤북지(南橘北枳)라 했던가. 지금은 탱자나무가 돼 사랑채 앞마당에서 등이 굽어가고 있다.

북비고택 담과 아랫집 담으로 둘러싸인 교리댁 대문 길이 깊고 아늑하다
▲ 교리댁 대문과 담 북비고택 담과 아랫집 담으로 둘러싸인 교리댁 대문 길이 깊고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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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댁 대문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대문은 인간계(人間界)와 선계(仙界)를 가르고 있는 것인가. 대문에 걸려 있는 하늘은 선계처럼 보인다. 북비고택 담과 맞은편 흙돌담이 길잡이 노릇하여 길게 쭉 뻗은 대문길이 깊다. 대문길이 깊으니 사연도 많을 수밖에.

마을 중심 고택은 뭐라 해도 한주종택으로 마을 맨 꼭대기에 있다. 종택 주인, 한주(寒州) 이진상(1818~1886)은 조선 유학의 대미를 장식한 큰 학자로 응와 이원조의 조카다. 응와도 이 집안에서 '북비'에 양자로 들어갔으니 '북비'와 연은 깊다.

종택 사랑채 처마 밑에 '주리세가'와 함께 '한주(寒州)', '대계(大溪)', '삼주(三洲)'의 삼대 이름이 적힌 편액이 주렁주렁하다. '주리세가(主理世家)'는 주희와 퇴계의 이학(理學)을 계승한다는 의미고, 삼대 이름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해온 집안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

가학을 잇는 집답게 주리세가와 함께 삼대의 이름이 적힌 편액이 주렁주렁하다. 대계와 두 아들, 삼주와 백계까지 삼부자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다
▲ 한주종택 사랑채 편액들 가학을 잇는 집답게 주리세가와 함께 삼대의 이름이 적힌 편액이 주렁주렁하다. 대계와 두 아들, 삼주와 백계까지 삼부자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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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몸바친 삼부자... 어지러운 세상의 답을 구한다

대계(大溪) 이승희(1847~1916)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제자 김창숙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였고, 1908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을 구축하고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한 인물. 대계의 두 아들, 삼주(三洲) 이기원(1885~1982)과 백계(白溪) 이기인(1894~1981) 또한 아버지 곁에서 독립운동을 하여 삼부자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가학을 이어가는 유학자 집안답게 기품 있는 정사가 종택 뒤에 겸손하게 숨었다
▲ 한주정사 정경 가학을 이어가는 유학자 집안답게 기품 있는 정사가 종택 뒤에 겸손하게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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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종택 바깥담장은 쉬엄쉬엄 기어올라 산과 집을 나누고 구렁이 기어가듯 굽이굽이 휘어져 산등성을 파고 들었다
▲ 한주종택 담 한주종택 바깥담장은 쉬엄쉬엄 기어올라 산과 집을 나누고 구렁이 기어가듯 굽이굽이 휘어져 산등성을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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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옆 쪽문, 그 안에 한주정사가 숨었다. 해묵은 소나무와 치렁치렁하는 버드나무, 산수(山水)를 받아 만든 쌍지(雙池)가 그럴듯하다. 한주정사 바깥 담장은 쉬엄쉬엄 기어올라 산과 집을 나누고 구렁이 기어가듯 굽이굽이 휘어져 산등성을 파고 들었다.

정사누각에 오르면 앞이 훤하다. 양반 댁 누각은 머슴이 논에서 게으름 피우나 안 피우나 살피기 좋은 곳이라는 잔인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 집 누각은 그런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앞내와 앞산, 논과 밭을 끌어드린 차경(借景)이 좋다.

삼사십 걸음 물러나 한주종택 대문을 봤다. 극와고택 돌담과 한주정사 흙돌담이 감싸안은 고샅과 잡귀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는 회화나무가 그려낸 정경(情景)은 조선시대 그림에 나오는 한 장면. '다정(多情)도 병'이란 말인가. 내 가슴에 방망이질이 그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겸손한 평대문과 돌담과 흙돌담이 감싸 안은 고샅, 한그루 회화나무가 자아내는 정경은 글 솜씨 좋은 작가가 상상하여 꾸며낸 장면 같다
▲ 한주종택 대문과 담 겸손한 평대문과 돌담과 흙돌담이 감싸 안은 고샅, 한그루 회화나무가 자아내는 정경은 글 솜씨 좋은 작가가 상상하여 꾸며낸 장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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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고대무덤으로 발길을 옮겼다. 탯줄마냥 이어진 생(生)과 활(活)의 공간에 이어 이제 죽음의 공간(死)에 이른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독립운동에 두 아들을 앞세운 심산 김창숙과, 두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대계 이승희, 모두 나라가 어려울 때, 학문에만 몰두하지 않고 대의를 따른 사람들이다.

삼국시대 성산가야의 고분군으로 성주가 내세우는 생·활·사 공간 중에 사(死), 죽음의 공간이다
▲ 성산동고분군 삼국시대 성산가야의 고분군으로 성주가 내세우는 생·활·사 공간 중에 사(死), 죽음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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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세상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별동네' 고대무덤 앞에서 답을 구해본다. 태어나서 죽고 사는 것은 불교에서는 모두 고통이라 한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 대의를 저버리고 욕망의 덫에 걸려든 순간 올무에 끼여 바동대는 짐승처럼 더 큰 고통을 맞이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4월 11일에 경북 성주, 경남 의령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성주는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생(生, 세종대왕자태실)·활(活, 한개마을)·사(死, 성산동고분군)의 공간을 다 갖춘 고을로 生·活·死를 테마로 성주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태그:#한개마을, #성주, #북비, #교리댁, #한주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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