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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혼자 기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부안 내소사. 아이 둘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오로지 나 혼자 결행한 당일치기 여행. 집-회사, 회사-집이 아닌 이런 시간이 얼마 만이었는지.

무궁화호 3호차 좌석 59번. 몇 번이나 전자티켓을 확인해 봤다. 혼자라는 것도, 기차가 연착된다는 안내방송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따뜻한 카페라떼까지 한 잔 사서 떠나는 기분을 맘껏 냈다. 기차 타고 남쪽으로 가는 길. 이제 막 봄이 찾아온 들판을 찍어 친한 언니들 단톡방에 올렸다.

'봄맞이 하러 가는 길, 봄이 올라오고 있삼.'
'뭐야... 황량한데?'

언니들의 뜨뜻미지근한 반응도 상관없었다. 내 마음속 봄은 이미 오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직장맘이 평일에 그것도 '혼자' 떠날 수 있다는 건 부러움을 살 만한 일. 언니들 입에서 '부러운 뇨자'라는 말이 나온 건 그래서였을 테다. 생각해보니, 모든 게 감사한 일이었다.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갈 데가 있다는 것도, 거기서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날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 건 '행복이 뭐 별 건가?' 싶은 그 당연한 진리를 일깨워 주는 책 <행복> 때문이다. <무지개 물고기>로 유명한 작가 마르쿠스 피스터가 쓰고 그림도 그렸다.

아이들이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마르쿠스 피스터가 쓰고 그림 <행복>
 마르쿠스 피스터가 쓰고 그림 <행복>
ⓒ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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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레오의 단짝 친구. 어느 날 조가 레오에게 묻습니다.

"너 행복이 뭔지 알아?"
"그게 뭐야?"

조는 레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겨울 하늘에 하얀 눈송이를 먹는 거, 아름다운 조약돌을 찾는 거, 허공에 떠다니는 보드라운 깃털을 지켜보는 거, 이런 게 다 행복이라고.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레오가 말합니다.

"주머니 속 치즈 조각을 발견하는 것도 행복이지?"

조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민들레 홀씨를 날려 보는 것도, 커다란 웅덩이에 뛰어드는 것도, 콧등에 내려앉는 따뜻한 햇살을 느끼는 것도 다 행복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와 레오가 동시에 "OO와 함께 연을 날리는 것도 행복이야"라고 외칩니다. OO은 과연 뭘까요?

두 시간 반 기차를 타고 달려간 내소사. 절 입구까지 소박하게 펼쳐진 전나무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비가 온 뒤라 나무가 뿜어내는 향이 짙었다. 그때부터는 A와 동행했다. 떠나는 건 혼자 해도, 혼자 걷는 건 외로우니까. 함께 걸은 그 길, 진심으로 좋았다.

'행복이 뭐 별건가, 좋은 사람이랑 이렇게 걷는 게 행복이지', 그때였다. 잊고 지냈던 내 안에 소소한 행복의 기억들이 펼쳐진 건. 남편과 아이가 똑같은 자세로 자고 있을 때, 흔한 재료로 뚝딱 만들어낸 반찬을 먹으며 "또 달라"는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 일찍 재우고 남편이랑 예능 삼매경에 빠질 때,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놀이 방법을 찾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때, "엄마가 제일 좋다"는 소리를 들을 때, "엄마가 제일 예쁘다"고 할 때, 낮이고 밤이고 기분 좋게 자고 일어나 크게 웃어줄 때...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아이들은 어떨까? 책을 읽어주던 아빠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언제가 행복해?"
"<아이엠 스타> 볼 때요."

다섯 살 꼬맹이, 고작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볼 때 행복하다니... 아홉살 큰아이는 그래도 "엄마 아빠랑 놀 때 제일 행복하다"고 했는데... 그런 남편은 어떤지 물었다.

"다다 아빠는 언제 행복해?"
"지금 이 순간."
"응?"
"근데 너무 짧아. 행복의 순간은."

맞다. 짧다. 짧아도 너무 짧다. 그러니 아웅다웅 살지 말자. 행복도, 인생도 별거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누리며 살자. 그리고 한 가지, 부모나 아이들이나 그 옆에 행복한 순간을 나눌 만한 친구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PS. OO이 뭔지 눈치채셨어요? 정답, ㅜ ㄱ ㄴ ㅣ ㅊ.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베이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행복

마르쿠스 피스터 글.그림, 안온 옮김, 파랑새(2015)


태그:#그림책,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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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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