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후 떠나는 뒷 모습에 스프레이와 먼지가 엉겨 있다.
▲ '몽진' 떠올리는 박근혜 뒷모습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후 떠나는 뒷 모습에 스프레이와 먼지가 엉겨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중남미 4개국 순방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6일 오후(현지시간) 첫 순방국인 콜롬비아 보고타 엘도라도 국제공항 군항공수송사령부에 도착, 환영인사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
 중남미 4개국 순방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6일 오후(현지시간) 첫 순방국인 콜롬비아 보고타 엘도라도 국제공항 군항공수송사령부에 도착, 환영인사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박근혜 대통령은 어디론가 '나가고' 있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 1주기였던 지난 16일, 박 대통령은 나라를 떠났다. 보기에 따라서 이 모습은 마치 머리에 먼지(塵)를 뽀얗게 덮어 쓰고(蒙) 달려가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는 '몽진(蒙塵)' 중인 것이다. 그가 정말로 몽진 중이라면, 그는 세월호 참사라는 중대 사안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이 '나가다'에 대해서는 잠시 뒤 '공자'가 한마디 할 것이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군주가 국난을 피해 도성을 떠나는 것을 몽진이라고 했다. 군주가 급하게 도성을 떠나게 되면, 몸이나 옷에 흙먼지를 묻히는 것으로 상징되는 갖가지 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를 몽진이라고 표현했다.  

군주의 '몸'이 아니라 '정신'이 나라를 버린 게 문제

<춘추>. 중국 북경(베이징)의 공자 사당인 공묘에서 찍은 사진.
 <춘추>. 중국 북경(베이징)의 공자 사당인 공묘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몽진이 군주가 도성을 떠나는 것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의 왕제(王制) 편에서는 "천자는 5년에 한 번씩 제후를 순행한다"고 했다. 군주가 제후를 순방할 목적으로 도성을 떠나는 건 당연시됐다. 또 군주가 해외 정벌을 위해 도성을 떠나는 것 역시 정상적인 일이었다. 이는 군주가 도성을 떠나는 행위 자체가 금기시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군주가 도성을 비우느냐 안 비우느냐 자체는 몽진의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무책임·무능력이다. 군주가 직무를 버리고 무책임·무능력하게 도성을 떠나는 게 몽진의 여부를 가르는 핵심이었다.

지난 16일, 박 대통령은 콜롬비아·페루·칠레·브라질을 향한 중남미 순방에 나섰다. 이 순방 자체만을 두고, 그가 세월호 책임으로부터 '정치적 몽진을 했다' 혹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세월호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다. 진실의 인양과 국가의 반성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고 있느냐다. 만약 대통령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면, 그의 몸이 세월호 1주기 기간에 중남미에 있었든, 청와대에 있었든, 심지어 팽목항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정치적 몽진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로 세월호로부터 몽진하고 있을까?

글 서두에서 공자(기원전 551~479년)를 언급했다. 그는 적어도 2000년 이상 동아시아에서 핵심적 사상가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 공자가 군주의 몽진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가를, 그가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춘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춘추>는 주나라의 분열시대인 춘추시대를 공자의 출신국인 노나라의 관점에서 정리한 역사서다. 이 책에 노나라 '희공'편이 있다. 희공은 주나라의 제후로서 기원전 659년부터 627년까지 노나라를 통치한 군주다. 이 시기에는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약해서 제후들의 독립성이 강했다. 공자가 문제시한 몽진의 사례가 바로 이 희공편에 기록되어 있다. 

희공이 노나라를 통치하고 있을 때, 중앙의 주나라에서는 양왕(재위 기원전 652~619년)이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 양왕은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정(鄭)이었다. 그의 도읍은 지금의 낙양(뤄양)이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에서 낙양은 대체로 중앙에 있다. 황하의 흐름과 중국의 중앙이 만나는 곳이다.

양왕 희정은 등극 당시부터 정치적 권위가 약했다. 그의 선임자이자 아버지인 혜왕은 희정보다는 희대(姬帶)를 더 총애했다. 희대는 희정의 이복동생이었다. 혜왕이 희대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희정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약했다.

이런 상태에서 혜왕이 죽었다. 희정은 희대가 차기 천자가 되는 걸 막고자 아버지의 사망 사실을 일단 숨겼다. 그리고 강력한 제후국인 제나라의 지원을 확보한 후, 아버지의 국상을 선포하고 왕권을 이어받았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는 등극 후에도 카리스마가 약했고, 희대의 정치적 도전을 받게 됐다. 

그런 가운데, 양왕 희정은 천자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만한 일을 자초했다. 낙양에서 동쪽으로 바로 옆에 정나라라는 제후국이 있었다. 정나라가 천자의 권위에 도전하자, 양왕은 북적(北狄)으로 통칭되는 북방 이민족의 힘을 빌렸다. 그는 그들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이민족의 여성을 왕비로 맞이했다.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것이다.

'화장실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더니, 화장실을 나온 양왕의 마음은 뒤바뀌었다. 북적의 지원으로 정나라를 제압하자, 북적 출신 왕비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 오히려 그는 왕비를 내쫓으려고 했다.

배신감을 느낀 왕비는 남편의 라이벌인 희대와 손을 잡았다. 왕실은 콩가루가 됐다. 북적과 희대는 연합군을 결성했다. 연합군의 공격에 패한 양왕은 기원전 636년, 낙양을 버리고 정나라로 도망갔다. 문제의 몽진이 바로 이 대목에서 나왔다.

몽진 후 레임덕에 직면한 양왕... 박근혜 대통령도?

주나라의 군인들. 중국 북경의 군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주나라의 군인들. 중국 북경의 군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양왕이 도성을 버리고 정나라로 도망간 행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공자는 "천왕(천자)이 나가서 정나라에 거하셨다(天王出居于鄭)"라고 기술했다. 양왕의 몽진을 '나가다(出)'로 표현한 것이다.

정나라는 주나라 천자가 떼어준 땅에 세워진 제후국이다. 정나라도 크게 보면 주나라의 일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나라 천자가 정나라에 가는 것은 결코 '나가는' 행위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정나라는 '외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자가 제후의 나라에 가는 것은 위에서 소개한 <예기>에서도 인정된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공자는 양왕의 몽진을 '나가다'로 표현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양왕의 몽진에 대한 공자의 불편한 심기가 담겨 있다. <춘추> 해설서인 좌구명의 <춘추좌씨전>에서는 공자가 '나가다'로 표현한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천자가 나가서 정나라에 거하셨다'고 기록한 것은, 동생이 일으킨 난리를 피해서 달아났기 때문이다."

'동생이 일으킨 난리를 피해서 달아났기 때문'이라는 구절 속에는, 천자가 동생 하나도 다스리지 못해 동생의 반란을 자초하고, 도성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비난의 뜻이 담겼다. 왕비와 동생의 배신을 자초하게 된 과정의 지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공자가 양왕의 몽진을 '나가다'로 표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천자가 자신의 직무와 책임을 고수하지 못하고, 영역 밖으로 나간 행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속뜻을 '출(出)'이라는 글자에 담았던 것이다. 

또 다른 <춘추> 해설서인 <춘추곡량전>에서는 '나가다'란 표현을 쓴 이유를 좀 더 직설적으로 풀이했다. 이 책에서는 "'나가다'라고 한 것은 천하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천자가 나갔다'라는 표현 속에 '천자가 천하를 잃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설한 것이다. 그만큼 천자의 몽진이 무책임·무능력한 일로 인식됐다.

양왕도 자신의 몽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정나라에 몽진해 있는 동안에 상복을 입고 있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인 천하, 즉 나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상복을 입고 있었던 셈이다.

군자가 급할 때 몽진했다가, 상황이 수습된 뒤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몽진에서 핵심적인 것은 군주의 '몸'이 도성을 떠나는 게 아니다. 군주의 '정신'이 도성을 떠나는 것이다. 양왕의 몽진에서 핵심은 무책임과 무능력이다. 그의 몽진이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군주가 존경을 받는 것은 군주가 강해서가 아니다. 돈이 많아서도 아니다. 잘나서도 아니다. 그것은 군주가 자기 책임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몽진을 하게 되면, 군주는 백성들의 존경을 잃고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양왕의 경우도 그랬다. 그의 몽진은 곧바로 '레임덕'으로 이어졌다. 정나라에 몽진해 있는 동안, 양왕은 강력한 제후국인 진(晋)나라의 문공에게 도움을 구했다. 진(晋)나라는 낙양 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진시황의 진(秦)나라와는 다르다. 양왕은 진나라 통치자인 문공의 힘으로 희대를 몰아내고 낙양을 되찾았다. 하지만 양왕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세상에 공짜 뇌물이 없듯, 공짜 파병도 없는 법이다. 양왕은 진문공의 군대를 사용하는 대신, 그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넘겨줘야 했다.

양왕은 자신이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해야 했다. 기원전 632년, 문공은 천토(踐土)라는 곳으로 자기를 만나러 오라고 양왕을 불렀다. 천토는 지금의 하남성(허난성) 신향시에 속한 곳으로,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제후가 천자를 오라 가라 했으니, 몽진으로 인해 양왕의 위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주나라 양왕의 몽진은, 중국 고대사에서 두고두고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됐다. 하필이면 훗날 위대한 사상가가 될 공자가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바람에, 공자의 <춘추>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양왕의 몽진을 알게 됐다.

세월호 참사 같은 중대 국정현안에 대해 대통령이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고 정치적 몽진을 감행했다. 양왕의 몽진에 대한 고대 중국인들의 평가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는 스스로 나라를 버리고 '나가는' 것인 동시에 '천하'를 포기하는 행동이다.

이런 통치자의 5년이 어떻게 평가될 것이며, 나머지 3년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나갈' 것인가? 그래도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쓸 것인가?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몽진, #주양왕, #세월호, #박근혜, #춘추
댓글1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