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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동이 아닌 원래 동네 이름 '탑골'을 살린 탑골공원은 1897년 지어진 오래된 공원이다.
 낙원동이 아닌 원래 동네 이름 '탑골'을 살린 탑골공원은 1897년 지어진 오래된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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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많은 시민과 외국 관광객이 찾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거리 건너편엔 또 다른 분위기로 북적이는 거리가 있다. 바로 낙원동이다. 찻길 하나 사이에 있는 인사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장년층 아저씨들이 많이 보인다는 점과 음식 값이 '여기 서울 맞아?' 할 정도로 싸다는 것이다. 나 또한 주로 인사동에만 갔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통해 낙원동을 알게 됐고 종로에 갈 적마다 꼭 들르게 된 동네가 됐다. 

아버지는 낙원동에선 단돈 만 원이면 이발을 하고 식사나, 푸진 안주에 술 한 잔 할 수 있다고 자랑처럼 말하곤 했다. 술을 좀 드시면 흔히 하던 아버지의 과장된 허풍이겠거니 여겼는데, 직접 가보니 요즘 아이들 말로 '백퍼' 사실이었다.

4천 원 하는 이발소가 낙원동 거리 일대에 열 곳이 넘고, 2천 원짜리 선지 해장국 집이 흔한가 하면 한우 쇠고기 국밥, 돼지고기 순댓국밥, 동태찌개, 닭칼국수 등이 5천 원을 넘지 않았다. 낙원상가 옆 '추억 찾기'라는 추억 돋는 이름의 카페에서 파는 커피와 차는 모두 2000원. 아버지가 자랑할 만한 동네였다.

어르신들의 낙원이 된 동네 

각자의 고향을 따라 들어갈 수 있는 낙원동 순대국밥 골목.
 각자의 고향을 따라 들어갈 수 있는 낙원동 순대국밥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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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를 찾는 사람들이 꼭 들리는 낙원상가.
 악기를 찾는 사람들이 꼭 들리는 낙원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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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동에 들어서면 맨 먼저 보이는 탑골공원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5천 원이면 궁합, 사주, 택일, 해몽, 승진, 합격 등 별별 인간사를 다 봐준다는 천막 점집들이 눈길을 끈다.

주변 사진을 찍으며 밖에 잠시 서 있어 보니 나이 지긋한 점집 할아버지는 손님과 거의 인생 상담에 가까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원 담장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자식들 키우고 대학 보내느라 팍팍해진 주머니에, 'LTE급'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이 버거운 어르신들의 낙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탑골공원 담장길따라 난 점집들.
 탑골공원 담장길따라 난 점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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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동엔 가게 이름만큼 소박하면서 정겨운 분위기의 식당들이 많은데 가격도 저렴하지만, 음식들이 '집밥'과 가장 가깝다는 점이 참 좋다. 양껏 먹을 수 있어 배도 부르고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져 마음도 푸근해진다.

이 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발소다. 이발소의 상징 삼색등이 빙빙 돌아가는 가게 앞에는 하나같이 '이발 3500원, 염색 5000원'이라고 쓴 가격표가 붙어 있다. 이런 '착한 가격'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어르신들이 지하철을 갈아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멀리 천안에서도 낙원동 거리를 찾아온다고.

낙원동 거리 상점들의 가격은 정말 낙원스럽다.
 낙원동 거리 상점들의 가격은 정말 낙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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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저녁 무렵이 되면 포장마차의 안주인이 능숙한 솜씨로 만들어내는 김치찜, 생선 구이가 철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나면서 퇴근길 장년층 아저씨들이 속속 모여든다. 유난히 이곳엔 동네 이름에서 따온 '낙원'이라는 이름의 식당과 업소 간판이 많다. 넉넉지는 않아도 어르신들을 정답게 품어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정말 '낙원'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지금이야 이렇게 어르신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물가 싼 동네지만, 알고 보면 낙원동엔 화려한 역사가 숨어 있다. 1960년대 낙원동엔 '초고급 주상복합건물'인 낙원상가아파트가 세워졌다. 한 건물 안에 상가와 시장, 영화관, 아파트가 들어간 복합 건물은 당시 시민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 재래시장이 지하로 들어간 것도 전에 없던 발상이었다. 45년이 넘은 서울 최초의 지하 마트는 아직도 동네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당시 낙원상가 아파트는 삼풍 삼원아파트, 외인아파트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아파트로 손꼽혔단다.

낙원동의 원래 이름이 들어 있는 탑골공원

탑골 혹은 탑동(塔洞)의 유래가 된 국보 2호 원각사지10층 석탑, 탑골공원 안에 있다.
 탑골 혹은 탑동(塔洞)의 유래가 된 국보 2호 원각사지10층 석탑, 탑골공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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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동 제1의 명소는 역시 탑골공원이다. 누구나 들어오라는 듯 늘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이 공원은 크지는 않지만 오랜 역사 속 이야기와 사연들이 담겨있다. 이곳은 구한말 고종 때인 1897년(광무1) 탁지부(지금의 재무부)에 고문으로 와 있었던 영국인 J.M. 브라운이 설계해 파고다 공원이라는 이름의 서구식 공원으로 꾸민 서울 최초의 근린공원이다. 3·1운동 당시 많은 시민이 이곳에서 만세를 외쳤으며, 당시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도 잘 보존돼 있다.

높이 12m의 국보 제2호 원각사지(圓覺寺址十層石塔) 10층 석탑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석탑은 조선 전기 도성 내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사찰 원각사에 있던 탑이다. 전체를 대리석으로 건조했는데, 수려하고도 기교적인 면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우리나라 탑파사상(塔婆史上) 손꼽히는 걸 작품이라고 한다. 기단부터 탑신부 꼭대기까지 온갖 동·식물과 인물상이 빈틈없이 조각돼있다. 요즘엔 탑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 보호각으로 감싸놔 자세히 살필 수 없어 아쉽기도 했다.

이렇게 탑골공원 자리엔 고려 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가, 조선 전기 세조 때(1464년)는 원각사(圓覺寺)가 있었던 명당 자리다. 문득 공원 이름 앞에 붙어 있는 '탑골'의 유래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탑이 많은 고을이라서?' 유추하기 쉬운 순수 우리말의 특성대로였다. 흥복사, 원각사, 국보가 된 원각사지 10층 석탑 등 동네에 유명 사찰과 탑들이 많다 보니 낙원동의 원래 이름은 사동(寺洞), 대사동(大寺洞), 탑사동, 탑동(塔洞), 순수 우리말로 탑골이었다.

그럼 탑골 혹은 탑동에서 무슨 사연으로 낙원동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됐을까 궁금했다. 알고 보니 낙원동은 1914년 10월 1일 일제가 대대적인 행정 구역 개편을 하면서 새로 생겨난 동네 이름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창씨 개명처럼 서울의 당시 이름인 '한성'을 없애고 경성부(京城府)로 고치는 등 우리의 산, 강, 지명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이를 '창지개명(創地改名)'이라고 한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부르기 쉽고 정겨운데다 마을의 문화와 특성이 잘 담겨 있었던 우리 토박이 지명은 조선 시대 한자 지명화됐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됐다.

서울 최초 지하마트였던 45년 전통의 낙원시장, 남대문 시장의 축소판이다.
 서울 최초 지하마트였던 45년 전통의 낙원시장, 남대문 시장의 축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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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창지개명

낙원동 또한 일제가 동네 지명을 재편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1894년(조선 31) 갑오개혁 당시 낙원동 일대는 교동(校洞), 어의동(於義洞), 한동(漢洞), 원동(園洞), 탑동(塔洞), 주동(紬洞)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교동, 탑동, 어의동 각 일부와 한동, 원동을 병합하면서 시내 중앙의 낙원지라 할 만한 탑골공원에서 '낙(樂)'자를 따고, 이곳에 있던 원동(園洞)이라는 동리의 '원(園)'자를 따서 합성해 낙원동이 탄생하게 된다.

낙원동 이웃에 있는 인사동도 마찬가지. 관인방(寬仁坊)의 '인'자와 옆 동네 대사동(大寺洞)의 '사'를 강제 결합시켜 지은 합성 지명이다. 현재의 인사동 지역에는 조선 초기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이 있었다. 방(坊)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수도의 행정 구역 명칭의 하나로, 성안의 일정한 구획을 말한다. 전국 '방방곡곡'이란 표현의 유래가 된 말이다.

해질녘 퇴근길의 중장년층 아저씨들이 낙원동으로 속속 모여든다.
 해질녘 퇴근길의 중장년층 아저씨들이 낙원동으로 속속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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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의 낙원동, 관수동, 동숭동, 공평동, 권농동, 예지동, 원남동, 원서동, 청운동, 옥인동, 통인동 같은 동 이름은 일제가 그 곳에 있던 토박이 땅 이름을 뭉개고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심지어 서울에 있는 북한산과 북악산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원래 삼각산(三角山), 백악산(白岳山)이라는 정기가 깃들고 의미 있는 이름을 잃어 버렸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서울 옛 지명 되찾기 사업' 자료집에 따르면 동명과 가로명 등 모두 72건이 왜곡돼 변경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만 이 정도인데 전국적으로 따지면 부지기수일 것이다. 서울을 지나다 마주치는 낙원동의 탑골공원, 반포의 서래섬, 노량진의 노들섬, 상도동 장승배기역, 합정동 양화(楊花, 버들꽃)대교 등을 보면 정겨운 우리의 옛 지명을 그리워하고 잊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이 느껴지곤 한다.

해방 혹은 광복을 맞은 지도 어언 70년, 옛 지명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한 걸음 더 해 우리 국토의 지명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하 '창지개명(創地改名)'의 흔적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그대로 쓰다 보면 그게 일본식 조어임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진 지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원남동이 그런 사례다. 종로구 원남동(苑南洞)은 원래 순라동(巡邏洞) 등으로 불리다가 1911년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뒤 '창경원의 남쪽'이라고 해서 원남동으로 바뀌었다. 이에 지난 2003년 서울시는 원남동이라는 지명 변경을 추진했다. 창경원은 일본이 창경궁을 멋대로 동물원으로 만들어 깎아내린 명칭이니 그것을 계속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민의 찬반 투표에서 지명 변경을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아서 지명 변경을 제대로 추진해 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다. 많은 사람에게 '원남동'이라는 지명이 입에 익고 익숙했기 때문이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내 손안에 서울'에도 송고하였습니다.



태그:#낙원동, #탑골공원, #창지개명, #탑동, #서울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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