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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아빠(좌)와 최창덕님 4월 16일 세월호1주기 집회장에서 영석아빠와 함께하고 있다.
▲ 영석아빠(좌)와 최창덕님 4월 16일 세월호1주기 집회장에서 영석아빠와 함께하고 있다.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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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 세월호 천막 농성장에 가면 서명대와 천막 주변을 온종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가 있다. 자원봉사자 최창덕(53)씨다. 지난해 7월부터 자원봉사를 하며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천막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세월호 사고 이전에 그 어떤 집회나 시위에도 참석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 역시 다른 봉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뭐라도 해야겠어서'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

지난해 봄, 건강상의 문제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던 중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 처음부터 자원봉사자로 있던 것은 아니다. 희생자 가족과 함께 단식농성을 하던 중 '일반 시민들까지 단식을 감행하게 할 수 없다'는 희생자 가족들의 설득으로 나흘간의 단식을 중단했다. 이후 천막 농성장에서 상황실 스태프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광화문 지킴이'로 통한다.

단식하러 왔다가 '광화문 지킴이'로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천막에 찢긴 부분이 있는지부터 천막 내부의 전기용품들까지 일일이 살피는 것으로 그의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이후 서명대 천막을 열고 서명에 필요한 인쇄물을 비롯해 서명대에 비치될 물품들을 빠짐없이 챙긴다. 또 농성장 주변에 설치된 조형물들을 꼼꼼히 살피는 것도 언제나 그의 몫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천막과 광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이나 시설물들이 제자리에 온전히 있는지부터, 밤사이 쓰레기나 못 보던 물건들이 있는지도 봐야 해요. 무엇보다 주의 깊게 살피는 건 아무래도 희생된 아이들 얼굴이 인쇄된, 광장 전면부에 걸려 있는 대형사진이에요. 혹시라도 훼손된 부분이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해요. 희생자 가족들에겐 사진이 곧 아이들이거든요."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면 천막 정리를 하느라 미처 사진이 인쇄된 현수막을 걷지 못하고 비를 맞히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 차량통행이 많은 곳이라 어쩌다 조금만 방치해도 사진 액자에 새까맣게 먼지가 앉는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희생자 가족들이 이런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 앞에 주저앉아 속상해하며 우는 모습을 볼 때면 안쓰럽고 죄스러운 마음에 본인이 더 안타까워 한다.

어느 순간, 어느 것 하나에도 소홀할 수 없어 몸이 열이라도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 그에게 다른 봉사자들은 '최 기자' '광화문 귀신'이라고 한다. 또 지나치게 꼼꼼한 일처리에 '최씨 아줌마'로 부르기도 한다. 그가 몸에 항상 지니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희생된 아이들의 명단이다. 이제 이름만 들어도 몇 반 아이인지 대략 안다.

광화문지킴이 최창덕님 세월호 진실규명 서명과 함께 풍선나누기 행사중
▲ 광화문지킴이 최창덕님 세월호 진실규명 서명과 함께 풍선나누기 행사중
ⓒ 최창덕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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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지킴이 최창덕님 세월호 진상규명 서명 중
▲ 광화문지킴이 최창덕님 세월호 진상규명 서명 중
ⓒ 최창덕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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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월호 1주기를 치르며 광화문 광장에서는 삭발식을 비롯해 촛불집회와 거리행진이 이어졌다. 집회나 행진이 끝나면 대다수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가지만 광장에서 노숙을 하는 가족들도 적지 않다. 가족들이 거리 행진을 할 때나 노숙을 할 때면 그도 함께 걷고 함께 노숙을 했다. 가족들이 집회 중 물대포와 최루액을 맞으면 그도 함께 맞았다. 그는 광화문 지킴이일 뿐 아니라 희생자 가족들의 지킴이기도 하다. 늘 농성장에서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를 유가족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아무리 힘들다고 한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보다야 힘들겠어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니까 큰 힘은 못 돼도 옆에라도 있어주는 거지요."

그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빠짐없이 광화문 농성장의 상황을 전하며 알리미 역할도 하고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최 기자'다.

"작은 애가 '우리는 아빠딸 아니냐'고... 미안했죠"

집에 들어가는 날이 고작해야 한 달에 한두 번뿐이다 보니 가족들의 원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딸 모두 직장 생활을 하는 성인이기는 하나 아직은 아버지의 자리가 필요하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크게 반대를 하는 건 아니지만 한 번은 작은 애가 '우리는 아빠딸 아니냐'고 서운해 하더라고요. 많이 미안했죠. '너희들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지내지만 그 아이들은 아빠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못하고 그렇게 갔는데 너희들이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나와 똑같은 마음이 들 거고 이해하게 될 거다'했죠."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야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그렇게 두 딸을 달래다가 결국 서로 부둥켜안고 울며 화해를 했다. 자식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곁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서명대 앞에서 구호를 외치다 보면 하루에 몇 차례씩은 꼭 욕설을 듣게 된다. '지겹다', '애들 팔아서 장사할 거냐', '그만 좀 해라', '돈을 얼마나 더 받으려고 이 난리냐', 여전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내는 이들이 있다.

"한 번은 유가족들하고 봉사자들이 피켓 시위를 하던 날인데 노인 한 분이 지나면서 큰 소리로 욕을 퍼붓고 가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쫓아가 소리를 막 질렀지요. 그랬더니 이 양반 하는 말이 '내가 나이가 구십인데 어디다 대고 소리 치냐'고 하는 겁니다. 나이가 벼슬도 자랑도 아닐 텐데 그 세월을 살아온 어른이라는 사람이 고작 한다는 말이..."

자신에게 던지는 욕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희생자 가족들 앞에서까지 욕을 할 때면 평소 말수가 적은 그도 같이 악을 쓰며 큰소리를 친다.

광화문지킴이 최창덕님 광장생활이 지속되면서 피부가 몹시 검게 변했다.
▲ 광화문지킴이 최창덕님 광장생활이 지속되면서 피부가 몹시 검게 변했다.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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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지킴이 최창덕님 22일간의 노숙농성을 마쳤다. 유가족이 비를 맞으며 노숙농성을 하면 그도 함께 비를 맞으며 곁을 지켰다.
▲ 광화문지킴이 최창덕님 22일간의 노숙농성을 마쳤다. 유가족이 비를 맞으며 노숙농성을 하면 그도 함께 비를 맞으며 곁을 지켰다.
ⓒ 최창덕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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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보다 무섭고 힘든 것이 시민들의 무관심이다. 광화문 일대는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많은 인파가 밀집되어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호 참사에 무관심한 시민들이 많아지면서 서명구호를 외치느라 서명지기 봉사자들의 목이 멀쩡할 날이 없다.

"서명지기 여덟 명이 교대로 서 있어요. 다들 직장에 다니고 가정 일이 바쁜데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함께 하고 있는데 다들 저 같은 마음이겠지요. 가장 필요한 게 시민들의 관심이고 참여예요."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하루 세끼를 꼬박 찾아 먹기는 힘들다. 고작해야 하루 한두 끼 먹는데, 일정한 시간에 먹기도 힘들고 한 끼 정도는 대부분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쑤다. 이는 희생자 가족이나 봉사자들 모두 마찬가지다. 장기간 불규칙한 식사 탓에 체중이 5kg이 줄었다.

"먹는 게 워낙에 부실한 상황인 데다 자리를 오래 못 비우기 때문에 먹는 게 늘 비슷해요. 제일 생각나는 건 아무래도 집밥이죠. 뭐 그 정도면 괜찮아요."

그에게 불규칙한 식사와 체중감소는 크게 중요한 것도 힘든 것도 아니다.

"밤엔 영석 아빠나 민우 아빠하고 자주 당직을 서는데 밤이 되면 허전해서 그런지 애들 아빠들이 자주 울어요. 낮엔 사람들도 많고 정신없이 보내니까 괜찮다가, 주변이 조용해지면 애들 생각나서 많이 울죠. 영석 아빠는 한쪽 무릎에 십자인대 파열로 철심을 박아놓은 상태예요. 제거 수술을 하면 거동이 불편하니까, 영석이가 방학하면 자기가 돌봐줄 테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이 녀석이 그렇게 돼서... 그래서 행진이나 집회 때 오래 걷거나 서 있으면 통증 때문에 절룩거리고 힘들어해요.

민우 아빠가 항상 손목에 차고 다니는 두껍고 알이 큰 시계가 있는데 민우가 물에서 나올 때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예요. 무심히 있다가 손목에 시계를 보면 애 생각나니까 울컥하죠. 얼마 전부터 (시계를) 텐트에 보관하고 있는데, 아이들조차도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은 그것도 부러워하니까 그 분들 보기 죄스럽고 마음 아프다고 안 차고 다니더라고요. 밤이 돼서 다시 울더라도 낮엔 되도록 밝게 지내려고 애쓰고 해요. 매일 매일이 아프고 고통이죠."

영석군과 민우군은 같은 2학년 7반이다.

"희생자 가족들은 새로운 가족,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함께 봉사하고 있는 김진영씨는 수유역과 광화문 광장을 오가며 1인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창덕샘은 늘 자신을 낮추고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고 배려를 아시는 분이에요. 가족 분들의 슬픔의 양을 아시는 것 같아요. '막연하게'가 아니라 그때그때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요. 가끔은 (유가족들을) 웃게도 하고, 가끔은 차라리 실컷 울어 버리도록 자리를 펴주기도 하거든요. 때때로 화가 날 땐 오히려 유가족분들보다 더 큰 소리로 화를 내세요."

광화문을 지키며 유가족들과 함께 천막에서 숙식을 한 지도 어느덧 10개월에 접어들었다. 하루 24시간을 밖에서 지내다 보니 감기는 늘 달고 살기 마련이다. 밤이 돼도 차량통행이 많은 곳이라 잠시도 조용할 사이가 없다. 대형차량이 지날 땐 노면의 출렁임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진다.

어쩌다 집에서 잠을 자는 날은 오히려 고요함이 익숙하지 않아 좀체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 또 영석 아빠와 민우 아빠가 밤새도록 우는 건 아닌가 걱정돼서 갈아입을 옷가지만 챙겨서 기어이 광화문으로 다시 나온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형님 동생하며 마치 형제지간처럼 스스럼없이 지내기도 하지만, 아이들 얘기만큼은 좋은 얘기든 안 좋은 얘기든 민감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족들이 간혹 본의 아니게 감정적인 말 실수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때는 중간에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희생자 가족이라 해도 일반 시민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 가족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광화문에 머물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분위기가 점점 장기전으로 가는 것이 당연시될 때는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도 되죠. 그러다가도 아이들 아빠엄마 보고 있으면 '어떤 결과로 끝이 나든 끝까지 함께 가야지' 그래요. 희생자 가족들이 이제 제겐 새로운 가족이에요.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아픈 가족이죠. 가족들이 모두 광장을 떠나기까지는 같이 있어야죠. 시작이 어떻든 크나큰 인연이잖아요."

말을 마치고는 허탈한 듯 웃었다. 그리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당부하듯 다시금 말을 이었다.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시민 분들의 참여예요. 아직도 배 안에는 아홉 명의 사람이 있고 희생자 가족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건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그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왜 구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진실규명이거든요.

정부가 내세우는 말도 안 되는 시행령을 폐기하고 하루빨리 세월호를 인양해서 나머지 실종자들도 가족들 품으로 가게 해야지요. 힘들고 수고롭겠지만 부디 광장으로 나오셔서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분들 곁에서 잠시라도 피켓을 들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곁에서 함께 하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죠."

겨울 동안 추위로 인해 시민들의 참여가 많이 저조했지만, 세월호 1주기 이후 시민들의 참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허나 아직은 더 많은 시민들의 도움과 참여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에 대한 어떤 일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세상에 헛된 수고란 없다. 광화문 지킴이 최창덕씨는 오늘도 그의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기 위해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최창덕씨와의 인터뷰는 3,4월에 걸쳐 여러차례 진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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