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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이 2014년 1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의 경우 3세기 중후반에 착공하여 4세기 중반 이전에 처음 완공되었고, 이후 4세기 말과 5세기 중반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고 한다.
▲ 풍납토성 발굴 모습 문화재청이 2014년 1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의 경우 3세기 중후반에 착공하여 4세기 중반 이전에 처음 완공되었고, 이후 4세기 말과 5세기 중반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고 한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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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와 온조는 남행하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명의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직 이강 남쪽의 땅이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있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혀 있어서, 하늘이 내린 험준함과 지리적 이점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비류는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떠나 그곳에 머물렀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명의 신하들로 보좌토록 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답사여행의 길잡이15 - 서울> 27쪽)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이어진 고대국가다. 백제의 역사는 한성백제시대(BC18~475), 웅진백제시대(475~538), 사비백제시대(538~660)로 구분된다. 우리들에게 각인된 백제의 역사는 185년(475~660) 동안 도읍지였던 웅진과 사비시대다. 반면 678년의 백제 역사 중 493년 동안 이어진 한성백제시대는 잊혀지고, 홀대받고 있다.

백제의 역사는 웅진·사비시대도 찬란하지만 최전성기는 한성백제시대였다. 한성백제시대인 고이왕대(234~286)에 이르러 백제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았고, 근초고왕 재위(346~375) 시절 최전성기를 맞았다.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근초고왕은 남으로는 마한을 정복하고, 북으로는 평양성을 공격(371)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였다. 그러나 백여 년이 지난 475년에 이르러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 대군을 이끌고 한성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장수왕은 한성백제의 왕성을 장악하고 개로왕을 죽이는 한편, 8천 명의 백제군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때의 패배로 백제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고 한성백제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정도 2천 년으로 확장된 서울의 역사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풍납토성 축성 모형. 풍납토성은 판축기법(돌을 판판하게 깔고 위에 흙을 다지는 것)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은 평지토성이다.
▲ 풍납토성 축성 모형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풍납토성 축성 모형. 풍납토성은 판축기법(돌을 판판하게 깔고 위에 흙을 다지는 것)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은 평지토성이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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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태풍은 기록적인 대홍수를 동반했다. 7월 16일부터 사흘간 지속된 집중호우로 서울 이촌동을 비롯한 뚝섬, 잠실, 신천, 풍납동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 을축년대홍수로 기록된 이때의 물난리로 4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2천 호의 가옥이 유실됐다.

기록적인 피해를 동반했지만 을축년대홍수는 뜻밖의 선물을 남겨놓았다. 서울 암사동의 선사유적지와 한성백제의 왕성이 있었던 풍납토성을 역사의 깊은 잠에서 깨운 것이다. 한강의 범람으로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석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납토성에서는 청동초두, 금귀걸이, 유리옥 등 백제의 유물이 발견됐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로 평가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백제의 첫도읍지인 하남위례성 위치는 학계의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라는 기록에 근거해 충남 천안시 직산면이 지목되기도 했고,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었다. 1937년에는 일본 학자 야유카이 후사노신이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사적 11호로 지정(1963년 1월)된 다음 해인 1964년 김원룡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발굴팀이 풍납토성을 처음 발굴조사한다. 이때의 발굴조사로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유적으로 확증됐다. 그 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몽촌토성 일대에 올림픽공원이 조성되는 상황 속에서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로 인정 받게 된 계기는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됐다. 1997년 1월 4일 선문대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풍납토성을 찾은 이형구 교수가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던 아파트공사장에 잠입, 수많은 백제 토기 파편이 박혀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형구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에 제보했고 즉각적인 현장검증과 긴급구제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15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한성백제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7년 긴급구제발굴을 시작으로 풍납토성 일대에 대한 발굴은 여러 차례에 진행됐다. 성벽 절개 발굴을 비롯, 왕성터로 추정되는 경당지구와 미래마을에 대한 발굴을 통해 수많은 유물들이 수습됐다. 이를 토대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였다는 것이 입증됐다.

또 풍납토성 발굴로 한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으로 구성된 이성(二城)체계였다는 사실이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이로써 서울의 정도(定都) 역사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때부터 600년이 아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한 때로부터 2000년으로 그 시기가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잊혀진 왕도, 풍납토성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9대 왕인 책계왕대에 이르면 위례성과 같은 의미로 도성을 지칭하는 한성이 등장한다. 비류왕 24년(327)에는 북한성(北漢城)이라는 명칭이 쓰이고, 392년 아신왕 원년에 다시 한성이 등장한다. 그후 전지왕대와 한성백제의 마지막왕인 개로왕대에 이르기까지 한성이란 명칭이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연유로 2012년 4월 서울 올림픽공원 안에 신축 개관한 박물관의 명칭은 한성백제박물관으로 명명됐다.

학계에서는 한성을 왕성인 풍납토성과 방어용인 몽촌토성을 묶어 구성된 이성체제로 추정한다. 외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백제는 위례성을 확대해 북성과 남성의 이성체계로 정비하고 이를 한성이라 했다는 주장이다. 즉, 북성인 풍납토성은 왕성으로 평상시 왕이 생활하며 외적이 침입할 경우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이동해 전투를 치르는 이성체계라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풍납토성을 5권역으로 구분하여 관리하고 있다. 1권역은 매입완료지역(적색 부분)이며, 2권역은 왕궁터 추정지역(녹색 부분), 3권역은 백제문화층 유존지역(청록색 부분), 4권역은 백제문화층 파괴지역(회색 부분), 5권역은 토성외곽 인접지역(미색 부분)이다.
▲ 풍납토성 권역도 문화재청은 풍납토성을 5권역으로 구분하여 관리하고 있다. 1권역은 매입완료지역(적색 부분)이며, 2권역은 왕궁터 추정지역(녹색 부분), 3권역은 백제문화층 유존지역(청록색 부분), 4권역은 백제문화층 파괴지역(회색 부분), 5권역은 토성외곽 인접지역(미색 부분)이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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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이 위치한 북서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이성산과 검단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과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봉은사가 위치한 수도산과 그 주변에는 평야지대가 있으며, 남쪽은 몽촌토성이 위치한 남한산자락과 방이동, 가락동에서 성남에 이르는 평야지대가 있다.

타원형에 가까운 사각형 모양으로 축성된 풍납토성은 연인원 138만 명이 동원되어 8톤 트럭 20만대(150만톤) 분량의 흙으로 최고 5층 아파트 높이로 쌓은 거대한 토성이다. 문화재청이 2014년 1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의 경우 3세기 중후반에 착공하여 4세기 중반 이전에 처음 완공됐다. 이후 4세기 말과 5세기 중반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풍납토성은 한강에 인접한 북서쪽 성벽은 대부분 사라지고, 동남쪽을 비롯한 3면만 남아 있다. 몽촌토성의 2배 크기인 풍납토성의 전체길이는 3470m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서벽 일부와 북벽, 동벽, 남벽의 길이는 2100m 정도다. 평지토성으로 쌓은 성의 하부 폭은 40m이며 높이는 9~15m로, 성벽을 포함한 넓이는 26만 평이다.

문화재청의 풍납토성 토지매입 금액
 문화재청의 풍납토성 토지매입 금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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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풍납토성을 5개 권역으로 구분하여 관리한다. 1권역은 매입완료 지역이며, 2권역은 왕궁터 추정 지역, 3권역은 백제문화층 유존 지역, 4권역은 백제문화층 파괴 지역, 5권역은 토성외곽 인접 지역이다. 2015년 3월 현재 풍납토성 내부에는 1만6196세대, 4만295명이 거주하며, 발굴 면적은 7만6855㎡로 전체면적의 8.7%다.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보조금관리에관한법률시행령에 따라 7:3의 비율로 재원을 부담해 풍납토성 내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고 있다. 그동안 풍납토성 매입에 투입된 예산 5202억 원으로, 희망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순차적으로 매입해 왔다. 그 결과 2015년 1월 현재 총 87만8795㎡ 중 24만8503㎡의 토지를 매입한 상태다.

풍납토성 보존을 위해 2·3권역 시급히 매입

풍납토성 2·3권역을 매입하는 데 필요한 재정은 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 문화재청 부담액은 1조4천억 원이며, 나머지 6천억 원이 서울시 몫이다. 현재와 같은 토지매입 추세라면 풍납토성 왕궁터 추정지역인 2권역을 매입하는 데 20년, 백제문화층 유존지역인 3권역을 매입하는 데 40년이 소요된다.

이를 이유로 문화재청은 올해 1월 10일 '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을 변경했다. 변경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다. 2권역과 3권역 모두를 매입하는 기존 방침을 2권역만 매입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3권역의 신축 건물의 높이를 최고 15m(5층)에서 21m(7층)로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문화재청의 기본계획 변경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동안 풍납토성을 시굴 조사한 136개소 중 132개소가 백제시대 문화층임이 확인됐으므로 모든 지역을 사적으로 지정,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 서울시 입장이다. 건축규제의 완화로 21m 높이의 건물을 신축하게 될 경우, 지하 4m 이상의 기초공사가 필요하고, 이럴 경우 지하 2~3m에 집중된 유물층 파괴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풍납토성을 현 상태에서 더 이상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존하기 위해 5년 이내에 2권역과 3권역 전체를 매입하자고 문화재청에 제안했다. 매입에 필요한 재원마련을 위해 채권을 발행할 용의도 있다는 입장이다. 조기 매입과 발굴을 통해 서울시는 2014년 2월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한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역사유적과 연계, 확장하는 방식(extention)으로 풍납토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는 계획이다.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이견을 보이는 가운데 지난 20년 동안 풍납동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와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다. 주민들은 현재와 같은 속도라면 주민 모두가 보상 받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리므로 2·3권역 전체를 조기에, 일괄적으로 매입하라고 요구한다. 조기에 일괄적인 매입이 아니라면 건축규제를 해제하여 건물신축을 막지 말라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올해는 을축년대홍수로 풍납토성에서 백제 유물이 발견된 지 90년이 되는 해다. 1997년 풍납토성 내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백제유물을 발견한 때로부터도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풍납토성은 표류하고 있다.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의 국가적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며, 이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의 성공은 한반도 중부의 지역 문화가 새로운 국가사회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12월 3일 발표한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발굴조사와 학제간 융합연구의 성과' 보도자료의 일부다. 4대강 공사와 자원외교로 수십조 원의 혈세를 낭비하면서 언제까지 예산 부족을 핑계로 한성백제 5백년 역사를 방치해 두어야만 하는가. 잊혀진 왕도, 풍납토성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더없이 절실한 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컬라밍(www.columning.kr)에도 함께 싣습니다. 전상봉 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민연대에서는 '한성백제역사문화강좌'를 4월 30일부터 6월 27일까지 9주간(실내강의 5회, 현장답사 4회)에 걸쳐 진행합니다. 강좌의 자세한 내용과 수강신청은 한성백제역사문화강좌 블로그 http://hanseongbaekje.tistory.com/2를 방문하시면 됩니다.(강좌 문의: 070-8834-4002)



태그:#풍납토성, #몽촌토성, #한성, #한성백제, #위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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