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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완구 국무총리마저 불명예 퇴진했다. 인사청문회 당시 불거진 초유의 '언론외압' 논란을 뚫고서 취임한 그였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역대 총리·총리 후보가 뒤집어썼던 '멍에'는 피할 수 없었던 셈이다.

사실 박근혜 정부의 총리 '잔혹사'는 인수위 때부터 시작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직전인 2013년 1월 24일 첫 총리 후보로 김용준 당시 대통령인수위원장을 지명했다. 김용준 총리 후보는 대법관(1988년)·헌법재판소장(1994년) 등을 지낸 데다 장애인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인사로 평가됐다.

그러나 그는 지명 직후 두 아들의 병역면제 논란과 부동산 투기 의혹에 휩싸인다. 사퇴 결정은 빨랐다. 김 총리 후보는 지명 닷새만인 같은 달 29일 사퇴했다. 갓 출범한 정부의 초대 국무 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조차 거치지 않고 자진 사퇴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었다(관련기사 : ① "김용준 지명자 장·차남, 7-8세 때 수십 억 부동산" ② 인사청문회 시작도 안했는데... 김용준 총리후보자 사퇴).

박 대통령은 이를 '망신주기 청문회' 탓이라고 치부했다. 박 대통령은 2013년 1월 30일 당선인 신분으로 새누리당 소속 강원 지역 의원들과 오찬을 하면서 "공직 후보자를 불러다가 너무 혼을 내고 망신을 주는 식의 청문회가 이뤄지니까 나라의 인재를 불러다 쓰기 참 힘이 든다"라고 말했다. 야권은 이에 "청문 대상자를 정확하게 추천하지 않고 제도가 잘못됐다고 하는 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임식을 마친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지난 2월 1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입구앞에서 장관들과 인사를 마치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다.
▲ 손 흔들어 인사 하는 정홍원 전 총리 이임식을 마친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지난 2월 1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입구앞에서 장관들과 인사를 마치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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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이은 정홍원 전 국무총리도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쳤다고 볼 수 없다. 정 전 총리는 2013년 2월 8일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정 전 총리는 2012년 총선 당시 새누리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이 지난 총·대선 때 자신을 도운 인사들로 총리를 '돌려막기'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 전 총리 역시 부동산 투기 및 위장 전입 의혹을 받았다. 하지만 야당은 "국민은 준비된 책임총리를 바랐지만 결과는 과락을 겨우 면했다"라며 그를 박근혜 정부 첫 각료로 임명하는데 동의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 전 총리는 2014년 4월 27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참사 발생 11일 만이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수습 후 정 전 총리의 거취를 결정하겠다며 이를 '조건부 수용'했다(관련기사 : ① 정홍원 총리, '세월호 참사' 책임 사의 표명 ② 사표 수리 미룬 박 대통령, 29일 고개 숙일까).

하지만 박 대통령의 뜻과 달리, 정 전 총리의 재임기간은 계속 길어졌다. 총리 후보로 지명된 안대희 전 대법관과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이 연달아 낙마했기 때문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2014년 6월 26일 전례 없는 '유임' 결정을 내렸다. 사의 표명 후 60일 만이었다. 정 전 총리는 이완구 국무총리 취임 전까지 계속 자리를 지켰다. 이 때문에 세월호 참사에 책임지고 물러난 고위 공직자는 아무도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관련기사 : 세월호 참사 책임진다던 정홍원 국무총리 유임).

안대희·문창극 후보 연속 낙마로 '총리 잔혹사' 정점 찍어

'안대희·문창극 후보자 연속 낙마'는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 잔혹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2014년 5월 22일 정 전 총리의 후임으로 '국민검사'로 불렸던 안대희 전 대법관을 택했다. 안 전 대법관은 "대통령을 진정으로 보좌하기 위해 헌법과 법률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국가가 바른 길·정상적인 길을 가도록 소신을 갖고 대통령께 가감 없이 진언하도록 하겠다"라고 지명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명 엿새 만에 사퇴했다. '전관예우' 논란이 결정적이었다(관련기사 : 안대희 '5개월 16억 수임' 전관예우 받은 사람이 국가개조?). 이에 안 전 대법관은 법관 퇴임 이후 늘어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입장도 밝혔지만 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에 안 전 대법관은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이후 전관예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오해로 인해 국민 여러분을 실망시켜 죄송하다"라며 후보직을 사퇴한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2014년 6월 24일 오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후보사퇴 입장 발표를 위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사퇴 발표 앞 둔 문창극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2014년 6월 24일 오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후보사퇴 입장 발표를 위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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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후임으로 '깜짝' 지명된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은 오히려 박근혜 정부의 인사시스템 문제만 더욱 부각시켰다. 문 전 주필은 지명 하루만인 2014년 6월 11일 역사인식 논란에 휩싸였다.

문 전 주필이 2011년 교회 강연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로 발언한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관련 기사 : "일제 식민지배�남북분단 하나님 뜻 게으르고 자립심 부족한 게 민족 DNA").

문 전 주필은 지명 15일만인 2014년 6월 24일 '지금 시점에서 제가 사퇴하는 것이 박 대통령님을 도와드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라며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때도 인사청문회를 탓했다. 박 대통령은 "국회 인사청문회를 하는 이유는 그를 통해 검증을 해서 국민들의 판단을 받기 위해서인데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앞으로는 부디 청문회에서 잘못 알려진 사안들에 대해서는 소명의 기회를 주어 개인과 가족이 불명예와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취임 63일 만에 사의 표명한 이완구... 6번째 지명자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이완구 국무총리가 16일 국회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이 열린 본회의장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이완구 국무총리가 16일 국회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이 열린 본회의장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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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국무총리도 이 '잔혹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 총리는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아들과 본인의 병역특혜 논란과 언론외압 논란을 겪었지만 가까스로 국회 인준을 통과했다. 그러나 자원외교 비리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시신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가 발견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특히 성 전 회장이 숨지기 전 인터뷰에서 "2013년 충남 부여·청양 재선거 당시 3000만 원을 (이 총리에게) 줬다"라고 주장하면서 여야 모두의 사퇴 압박을 받았다.

스스로 위기를 키웠다는 평가도 있다. 이 총리는 지난 13~1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성완종 리스트' 등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증거가 드러날 때마다 '말 바꾸기'를 하며 자신의 해명에 대한 신빙성을 떨어뜨렸다(관련기사 : '목숨' 발언까지 왔다갔다... 불신 자초한 이완구).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 총리 측 비서관은 이 총리와 성 전 회장의 '독대'를 진술한 전직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맞추고자 했고, 이 총리의 또 다른 측근 인사는 지난 15일 지역언론사 소속 기자라 사칭해 종합편성채널 MBN에 출연, 이 총리의 해명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관련기사 : 이완구 총리 측근이 기자사칭 종편 출연?).

이 총리는 결국 취임 후 63일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박 대통령의 사표 수리 시점까지 고려할 때 재임 기간이 좀 더 길어질 수는 있으나, 1980년 이후 가장 짧은 기간 재임한 총리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6번째 지명자를 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이완구, #박근혜,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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