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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벚꽃은 화가의 크로키처럼 빠르게, 동시다발적으로 핀다.
▲ 섬진강 벚꽃 섬진강의 벚꽃은 화가의 크로키처럼 빠르게, 동시다발적으로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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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에서 4월, 전남 동부의 지리산 자락은 갖가지 꽃으로 넘쳐난다. 2월 말부터 꽃봉오리를 머금는 봄의 전령사 매화가 피어나면 구례 사람들은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슬슬 논밭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3월 중순의 구례는 노랗다. 샛노랗다. 지리산온천지구로도 유명한 산동면 일대의 지리산 아래는 산수유꽃을 감상하러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섬진강 따라 서서히 북상하는 매화를 산수유꽃이 마중 나가는 형국이다.

예쁘디 예쁜 두 꽃이 만나 사랑을 하면 어느 새 분홍빛깔 벚꽃이 들판과 산 중턱에 소담스레 피어난다. 벚꽃은 섬진강과 나란히 달리는 동서 양안의 국도를 따라 화가가 크로키를 하듯 빠르게 빠르게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린다. 꽃 잔치. 들녘은 이미 밭 일구는 농부들로 왁자지껄하다.

벚꽃에 이어 진달래 개나리 산천이 구례에 올 즈음이면 구례사람들은 또 한 가지 기다리는 것이 있다. 4년 전부터 해마다 봄이 되면 막을 올려온 구례 극단 '마을'의 정기공연이 그것이다.

올 봄에도 어기지 않고 극단 마을은 연극 공연을 한다. 작품은 <구례! 우리 읍내>.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손톤 와일더(Thornton Wilder)의 저 유명한 퓰리처상 수상작 <우리 읍내(Our Town)>를 구례의 현실에 맞게 각색했다. 원작은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삶과 죽음, 일상의 에피소드는 세계의 어느 마을에 가져다 놓아도 딱 들어맞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다.

목수, 농부, 디자이너, 회사원, 주부, 학생 등 20여 명의 단원들은 모두 현직이 있다. 주경야독의 전형으로 지난 4년 간 정기공연을 성공리에 일궈냈다.
▲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군민극단 목수, 농부, 디자이너, 회사원, 주부, 학생 등 20여 명의 단원들은 모두 현직이 있다. 주경야독의 전형으로 지난 4년 간 정기공연을 성공리에 일궈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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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제목 그대로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일상을 소재로 한다.

1막에서는 두 집의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아버지들은 가족을 건사하느라 바쁘며 어머니들은 시시콜콜한 일상으로 잡담을 나눈다. 2막에서는 어느 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든다. 3막에서는 갖가지의 이유로 삶을 마친 마을 사람들이 마을 공동묘지에 모이면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잔잔했던 삶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준다.

일상(1막), 사랑(2막), 죽음(3막)으로 이어지는 인간 삶의 유한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삶과 죽음은 한 가지라는 생사일체(生死一體)의 소중한 철학, 즐겁다가 괴로워하다가 아파하다가 기뻐하는 매 순간이 소중한 삶의 한 조각이라서 현실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의 울림이 감동적이다. 극 중 주인공 '미자'가 던지는 대사 한 마디가 우리에게 큰 무게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순간마다요?"

전국 최초의 자생적 군민극단 '마을'

구례에 극단 마을이 생긴 것은 우연이었다. 2011년 어느 여름날, 구례로 귀촌한 세 명의 청년이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이야기하다가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태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 삼으며 한 발짝 한 발짝 '연극 속으로' 들어갔다.

연극의 작품성을 짊어진 이는 이상직씨, 그리고 또 한 명은 배우와 기획을, 또 한 명은 무대와 섭외를 맡았다. 입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연극을 직접 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구례 군민들은 극단으로 모여들었다. 문화, 그 중에서도 연극에 목말라 있던 지방의 현실을 보여주는 역설이었다.

구례 극단 '마을'은 전국 최초의 자생적 군민극단이다. 연출가 이상직 씨의 지휘 아래 단원들의 공연 연습이 한창이다.
▲ 공연 연습 중인 구례 극단 '마을' 단원들 구례 극단 '마을'은 전국 최초의 자생적 군민극단이다. 연출가 이상직 씨의 지휘 아래 단원들의 공연 연습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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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을 맡은 이상직씨는 2010~2011년 국립극단 공연 <오이디푸스>와 2013년 <바냐아저씨>의 주연을 맡아 열연했고, '2000년 백상예술대상', '2004년 히서연극상 올해의 연극인상'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정통 연기파 배우. 다른 두 명도 서울에서 각각 잘나가던 회사를 다니다 뜻한 바 있어 구례로 귀촌한 사람들이었다.

약 6개월 간의 연습과정은 힘들었지만, 수평적 토론과 하나 된 열정으로 기어코 창단공연의 막을 올리고 만다.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역공연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유료공연이었지만 320여 석의 섬진아트홀 객석은 콩나물시루처럼 관객으로 빼곡했다. 심지어는 객석 복도를 마다 않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중앙언론은 물론 지방언론까지 앞다투어 구례 군민극단 '마을'을 보도했다.

연이어 그해 5월에 우리의 옛이야기를 소재로 다룬 아이들을 위한 가족극 <사랑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를 올리면서 군민극단 마을은 구례라는 고장에 연극이라는 '생소한' 문화 장르의 터잡기에 나선다. 어린이날 선물로 이만한 게 또 있을까.

이듬해 3월의 <슈퍼마켓습격사건>(원작 다리오 포의 <안 내놔 못 내놔>), 2014년 3월의 <겨울 해바라기>(원작 재일교포작가 정의신) 등 두 편의 봄 정기공연은 군민극단 마을이 명실상부한 지역 극단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프로 배우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두 작품을 아마추어 배우들이 소화하는 데에 어려움은 컸지만, 연극에 대한 그들의 열정으로 고비 고비를 어렵사리 넘길 수 있었다.

목수 회사원 디자이너... 다채로운 직업의 배우들

그리고 이제 제5회 봄 정기공연을 올리려 한다. 구례문화예술회관 개관 기념으로 열리는 이번 공연의 특징은 일주일간 막을 올린다는 것. 특히 평일 저녁 공연의 반응 정도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지역 극단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이번 공연 스케줄은 그동안 극단이 내내 갖고 있던 화두인 '실험정신'을 놓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동시에 지역 극단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구례라는 조그마한 지역에서 평일 공연이 될 수 있을까'라는 회의 섞인 반응에도 꿋꿋이 밀고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설혹 관객이 적게 들더라도 극단 마을의 구성원은 실망하지 않을 태세다. 애당초 무에서 유를 만든 경험이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면면도 이채롭다. 각색을 맡은 조영호씨는 회사원이다. 낮에는 순천에서 회사 일을 하면서도 밤에는 작품 각색에 매달렸고, 단원이 함께 간 모꼬지에서 나눈 배우들의 많은 이야기 속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1막이 다듬어지고, 리딩을 하는 과정에서 2막, 3막이 수정되고 보완되었다. 여기에는 구례에서 태어나고 한시도 이곳을 떠난 적 없는 배우 고상철(대장간 이샌 역)씨가 큰 역할을 했다. 현직 목수인 그는 1960년대에서 1980년대를 아우르는 시대의 구례에 대한 고증은 물론 구례 사투리까지 하나하나 점검해가면서 희곡의 완성도를 더했다.

미국 극작가 손톤 와일더(Thornton Wilder)의 퓰리처상 수상작 <우리 읍내(Our Town)>를 구례의 현실에 맞게 각색한 <구례! 우리 읍내>는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의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인 '카르페 디엠'을 소재로 한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상징적 메시지 미국 극작가 손톤 와일더(Thornton Wilder)의 퓰리처상 수상작 <우리 읍내(Our Town)>를 구례의 현실에 맞게 각색한 <구례! 우리 읍내>는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의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인 '카르페 디엠'을 소재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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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상상 이상이었다. 주말마다 순천의 각지에서 한 곳에 모여 자동차 한 대로 빠짐없이 연습실을 찾는 순천 출신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곡성군 죽곡면의 산촌에서 버스 세 번을 갈아타고 찾아오는 정두리(영자 역, 학생)씨도 있었다.

"학교 끝난 뒤 보성강 따라 섬진강 따라 구례로 오는 길이 너무 예뻐요. 버스 창 너머로 겨울이 지나가고 이제 봄이 왔네요. 이번 작품 성공하면 좋겠고요, 다음 작품도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어요."

해맑은 청춘의 봄날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피어난다.

서울 공연 같으면 스태프가 맡아 해야 할 무대장치며 의상 등도 대부분 배우들이 직접 제작하고 구하는 실정. 이는 그동안 축적돼온 극단 배우들의 적극적 자발성에 기인한다. 목수,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 소속 배우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기술도 크게 한몫했다.

심지어는 공연 포스터까지 직접 도안해 구례 곳곳에 붙일 정도. 기획을 맡은 김지호씨는 "이번에는 타이틀이 좀 바뀌었지만 그동안 '군민극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온 게 자발성을 만드는 데에 기여한 것 같다"면서 "그래서 더욱 값진 구례의 문화 장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많은 이들의 수고가 있었겠지만, 어느 한 사람 한 사람을 특정하기보다는 단원과 스태프 모두가 일심을 모아 달려왔기에 지금의 극단 마을이 있다고 이들은 믿는다. 가까이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큰 산 지리산처럼 이들의 마음자세가 포근하면서도 듬직한 이유다.

현직을 따로 갖고 있는 배우들이 낮에는 일을 하며 짬을 내 6개월여의 연습 끝에 막을 올리는 이번 공연은 일 주일 간의 '평일 공연'을 자처함으로써 극단의 또 다른 '실험 정신'을 엿보게 한다.
▲ 2015 구례 극단 '마을' 제5회 정기공연 <구례! 우리 읍내> 포스터 현직을 따로 갖고 있는 배우들이 낮에는 일을 하며 짬을 내 6개월여의 연습 끝에 막을 올리는 이번 공연은 일 주일 간의 '평일 공연'을 자처함으로써 극단의 또 다른 '실험 정신'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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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규화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주in>에도 송고되었습니다.



태그:#구례 군민극단, #지리산, #우리 읍내, #섬진강,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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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도 되지 않는 자본의 권력가를 위해 99%의 희망 없는 삶으로 지내왔던 지난 날을 통렬히 후회하며, 조금더 나은 삶을 찾아 보고자 지리산과 섬진강 도도한 전남 구례로 이사 왔습니다. 농사도 짓고, 여행도 하면서 사는 일상이 흥미롭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결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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