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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우리 사회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획해 인터뷰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 기자말

무려 2005년 7월 5일부터 시작된 싸움이다. 2015년 4월, 목련은 지고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벚꽃이 진 자리에서는 이파리가 돋아나겠지. 여름이 오면 녹음이 짙을 것이다. 그렇게 또 가을이, 겨울이 지나갈 것이다. 벌써 열 번째 벚꽃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녀들이 겪은 십여 년이 어떠했을지 상상했다. 상상하기 힘들었다. 상상해 보려 애썼다. 그렇지만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2005년 7월 5일부터 시작해 2015년 3월 말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머리칼을 잘랐고, 세 차례 단식농성을 했고, 하이서울페스티벌 폐막식이 열리던 날 18m 높이 조명탑에 올랐고, 수없이 국회를 찾아갔고, 포클레인 위에 올라섰고, 눈을 맞으며 길 위에 엎드렸다. 회사는 복직을 약속했으나 이는 끝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약속을 저버린 채 야반 도주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열 살을 더 먹었다. 지난 3월 17일,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을 만났다.

2005년부터 시작된 투쟁, 열 번의 벚꽃이 피었다

2005년 사진이다. 기륭전자는 해고 노동자들이 정문 앞에 모이기만 해도 정문을 걸어 잠궜다.
▲ 회사 정문 앞에 서 있는 기륭 해고 노동자들 2005년 사진이다. 기륭전자는 해고 노동자들이 정문 앞에 모이기만 해도 정문을 걸어 잠궜다.
ⓒ 기륭전자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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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상상이 잘 안 가요. 십 년 동안 그렇게 투쟁으로 보내면 어떤 생활인 걸까….
"생활은 뭐, 거의 바닥이죠. 처음에 투쟁할 때는 훨씬 심했어요. 최저임금이 월 64만 얼마였는데, 그것보다 10원 더 받았으니까(당시 최저임금은 64만1840원으로, 기륭 노동자들은 64만1850원을 받았다)."

- 최저임금이 아마 시간당 3000원 정도였죠?
"3000원이 채 안 됐죠. 2천 얼마 됐을 거야."

2005년 당시 최저임금은 정확히 시간당 2840원이었다. 2004년엔 2510원이었다. 330원이 올랐다. 이어서 2006년엔 360원이 올라 3100원이 됐다. 2007년, 내가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무렵 최저임금은 370원이 오른 3480원이 됐다.

2005년 당시 최저생계비는 월 113만 6000원이었다(4인 가구 기준). '최저치', 아니, 최저치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는 휴일 없이 48일을(하루 8시간 기준) 일해야 했다.

그녀들이 파업 농성에 들어간 2005년 당시, 기륭전자의 전체 직원 수 530명 중에 절반이 넘는 300명이 비정규직(계약직 40여 명, 파견직 250여 명)이었다. 파견직 노동자들은 기륭전자 총무과장과 면접을 봤고, 기륭전자 직원에게서 업무 지시를 받았으며, 직접고용 노동자들과 섞여 일했다. 명백한 불법 파견이었다.

- 전 약간 신기한 게, 집회 나가서 사람들이랑 얘기해보면 다들 좀 비슷비슷하게 고생했고, 사연 있고, 상처 받은 기억이 많고 그렇잖아요…. 이건 당연한 건가요?
"당연하다고 얘기하기는 힘들겠지만. 사람들은 다 비슷한데, 각자 하나씩의 아픔은 감추고 사는 것 같아요. 집이 어렵다거나 부모님이 이혼을 했거나 남편이 도박을 한다거나 아니면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다거나. 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것 같아요. 잘 사는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대로 '우리 집안에서 내가 제일 못났어' 같은 사연이 있겠고 고만고만하게 못 사는 사람들은 또 고만고만하게 사연이 있더라고요. 그걸 노동조합 만들면서, 투쟁하면서 알게 된 것 같아요. 일할 땐 일만 하지, 서로 얘기 잘 안 하잖아요. 말 조금만 해도 잡담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하는데. 잡담한다고 잘렸어요, 우리는."

해고를 위한 해고였다. 그녀들은 잡담을 했다고, 잔업을 안 했다고, 관리자에게 밉보였다고 해고 당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세요"라는 문자 한 통으로. 아무런 인간적인 예의 없이, 배려 없이.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농성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이야기를, 삶을 들었어요. (함께 싸우는) 언니에게도, 동생에게도 그 나름대로 아픔이 있고, 다 나름 사연이 있더라고요. 다 나름 재주도 있고. 이런 것들을 그때 알았어요. 투쟁하면서."

그녀와 나는 두리반에 있었다. 칼국수와 비빔밥을 시켜 나누어 먹었다. 칼국수를 먹거나 비빔밥을 떠먹느라 대화는 종종 끊겼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했다고 느끼는 건 언제일까. 또 우리가 서로에게서 이해받았다고 느끼는 건 언제일까. 각자가 "감추고 사는"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녀는 그릇에 칼국수를 담아 내게 건네주었다. 어떤 면에서 기륭전자가 잡담을 이유로 해고한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녀들은 각자의 기쁨, 슬픔, 상처, 아픔을 갖고 살아온 한 인간이 아니라 단지 일하는 기계였을 테니까. 기계는 말없이,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오가는 시간 없이, 어떤 감정기복도 없이, 오로지 일만을 해야 하니까.

- 사실 기륭에 대해서는 많은 기사가 나왔잖아요. 물론 충분치 않게 나왔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기사 많죠.") 기륭 노동자들이 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싸웠는지 같은 정해진 질문들이 있고, 그 정해진 질문지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건 좀… 그랬어요.
"어떤 이야기가 쓰고 싶어요?"

- 특별히 어떤 이야기가 쓰고 싶다기보다는… 사실 전 농성장 가는 걸 좀 어려워하거든요. 할 건 없고, 괜히 밥만 축내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나마 잘하는 거니까.
"부럽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제일 부러운 것 같애. 난 글 한 번 쓰려고 하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는데 정말 못 쓰겠어요."

- 어떤 글이요? 보도자료 같은 거요?
"보도자료 같은 것도 잘 못 써서, 그건 저 말고 전 분회장이었던 김소연 동지가 써요. 저는 주로 기고글, 감상문 이런 걸 써요. 음, 저는 1차 오체투지를 했잖아요. 이어서 2차 오체투지가 있었고. 쌍용차 동지들에게 제안하는 글을 썼었어요."

"오체투지, 일어서기 위해 엎드린 투쟁"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연대 단체 참석자들이 지난해 12월 22일 오전 서울 동작구 옛 기륭전자 본사 앞에서 그 동안 지켜왔던 농성장을 정리한 뒤 비정규직 법·제도 철폐를 호소하며 오체투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오체투지행진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사는 세상을 위해"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연대 단체 참석자들이 지난해 12월 22일 오전 서울 동작구 옛 기륭전자 본사 앞에서 그 동안 지켜왔던 농성장을 정리한 뒤 비정규직 법·제도 철폐를 호소하며 오체투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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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지난해 12월 22일부터 크리스마스까지 4일간 땅 위에 온 몸을 붙였다가 떼어냈다. 기륭본사에서부터 학교비정규직 농성장, 국회, LG유플러스 농성장, 씨앤앰 농성장을 거쳐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농성장까지 갔다. 오체투지를 시작한 첫 날, 최저기온은 영하 10도를 기록했다. 다음 날은 해가 났지만 녹은 눈으로 질퍽이는 거리 위에 몸을 숙여야 했다.

- 오체투지는 어떻게 제안하게 되신 거예요?
"당시 굴뚝에 이창근, 김정욱 동지가 올라가 있기도 했고(그들은 12월 13일 굴뚝에 올라갔다), 교섭이 이루어지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무언가 돌파를 해야 하는데 돌파구는 안 보이고. 정부에서는 비정규직 종합대책 이야기가 쭉 나오고 있었고. 이게 통과되면 이제는, 정규직이라는 말도 없어지겠구나.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이 또 생겨날까 싶었어요. 우리는 십 년 동안 비정규직 투쟁을 했잖아요. 승리해서 일터로 복귀했지만 회사는 야반도주하고. 결국은 승리해도 돌아갈 데가 없어졌잖아요. 근본적인 문제가 뭐였을까?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겼는데도 왜 돌아갈 곳이 없어졌을까?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제는 '부자되세요'가 새해 덕담인 것처럼 오가잖아요. 예전에는 감히 '부자되세요' 같은 말을 덕담으로 안 했거든요. '건강하세요' 같은 말들을 했지. 그런데 어느 날 광고에서 '부자되세요'가 나오더니 이제는 부자가 아니면 사람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렸잖아요. 그런데 부자가 되고 싶어도 부자가 될 수가 없잖아요. 가진 게 있어야지.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오래 일했다고, 연봉 높아졌다고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권고사직이라는 이름으로 해고되잖아요. 정규직인데도. 그리고 그 자리에 값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쓰고 있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1차 오체투지 때 '비정규직 전면 철폐'를 내건 이유예요."

- 그런데 왜 오체투지를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왜 '오체투지'라는 걸 생각하셨는지 궁금했어요.
"(그녀는 잠깐 고민했다) 조합원이 열 명밖에 안 돼요, 그렇죠? 열 명이 할 수 있는 투쟁이 뭐가 있을까요. 일인시위, 집회…. 연대 단위가 아니고서는 열 명이서 하기 힘들어요.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삼보일배? 무릎도 너무 아플 것 같고, 관절도요. (웃음) 우리가 대부분 40, 50대니까. 처음 김소연 동지가 오체투지를 제안했을 땐 조합원들이 많이 반대했어요. 첫 번째, 겨울이라는 조건이 있었고. 우리의 체력으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있었고. 그리고 땅바닥을 다 기면서 간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너무 무너지잖아요.

첫 날엔 눈이 왔어요. 눈밭에서 오체투지를 하는데, 우리는 이겨도 돌아갈 일터가 없잖아요. 그래서 오체투지 하면서 막 울었어요. 기륭 본사에서 대방역까지 가는데 너무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할 때 그 많은 사람 중에 아무도 클랙슨을 울리거나 항의를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 겨울에 이 눈을 맞으면서 어떻게 이러냐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훨씬 많았어요. "무슨 문제로 이래요?" 물어보면서 선전물 받아 가시고. 우리가 누군지, 왜 이런 투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이런 걸 방송으로 틀면서 갔거든요? 그걸 아이랑 같이 서서 다 듣고 가시고. 우리는 엎드려 있으니까 못 보죠. 그런데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비참하지는 않았어요. 엎드리기 전에는 '비참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내가 이렇게까지 진짜, 바닥을 기어야 돼?' 서러움이나 분노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첫 날 해보고 나니까 달랐어요.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비참하다는 생각은 정말 안 들었어요. 그만큼 절박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일어서기 위해 엎드리는 투쟁이었으니까. 개구리가 움츠렸다가 이렇게 (그녀가 손으로 개구리의 동작을 흉내냈다) 뛰어오르잖아요. 저는 그런 투쟁이었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소설가이자 두리반을 운영하는 유채림 씨와(왼쪽) 함께 찍은 사진. 내가 두 분 모두 환하게 나와서 좋다고 말하자, 사진을 본 그녀가 “웃는 건 잘 해요.”라고 말했다.
▲ 두리반에서 소설가이자 두리반을 운영하는 유채림 씨와(왼쪽) 함께 찍은 사진. 내가 두 분 모두 환하게 나와서 좋다고 말하자, 사진을 본 그녀가 “웃는 건 잘 해요.”라고 말했다.
ⓒ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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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좀 개인적인 질문일 수 있는데요. 예전에 굴뚝 앞에 갔을 때 조합원 분들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고맙다고 하시고. 또 오라고 하시고.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농성장 가는 게 정말 어렵게 다가왔어요.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어떠세요? 혹시 힘이 났던 기억 같은 게 있으세요?
"우선 쌍용차 동지들한텐 그게 '에너자이저'였을 거예요. 진짜. (웃음) 기본적으로 투쟁 사업장들은 외롭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럼에도 외롭죠. 투쟁 사업장은 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잊으면 어떡할까, 기억에서 잊히면 어떡할까 걱정하거든요. 사실 투쟁은 계속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정리됐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일터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에 느끼는 마음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3·14 희망행동이 있던 날, 이창근은 비슷한 말을 했다. 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경찰 추산 몇 명, 이렇게 수치화 시킬 거라고. 그럼 주최 측에서도 주최측 추산 몇 명 똑같이 수치화 시켜 버리는데,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온 사람들의 숫자로 규정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고. 투쟁이 이들을 서로 닮아가게 하는 걸까, 아니면 이들이 투쟁하면서 서로 닮아가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장기 투쟁한 사람들 보면 다 비슷하지 않아요?" 물으며 웃었었다.

닮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시작은 억울해서, 노동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임금이 너무 적어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점점 더 깊고 어두운 곳을 가리키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체투지로 청와대를 향해 가면서 "기륭노동자들이 승리했지만 돌아갈 일터도 없고, 수많은 비정규직, 정리해고 사업장 노동자들이 고공에 올라가야 하는 현실 앞에서 이제 기륭 투쟁은 법적 투쟁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면서 "비정규직, 정리해고 제도가 폐기되지 않고서는 국민은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들의 싸움은 기륭만의 투쟁이 아니라 비정규직 전체의 투쟁이라는 것을 공고히 한 것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함께 한 시간 반을 밥상머리에 앉아 얘기했던 것만으로 그녀가 싸운 십 년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물었다.

"외롭지 않으세요? 자신은 혼자여서, 부양할 가족이 없어서 괜찮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지만, 혼자면 훨씬 외로울 것 같아요."

그녀는 웃었다.

"뭐, 다 장단점이 있는 거죠."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 이해했다고, 혹은 서로에게서 이해받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적어도 만난 지 한 시간 반 만에 오진 않을 테니까. 나는 그녀에게서 4월 17일에 열리는 기륭 후원 주점 포스터를 받았다.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았다. "더 물어볼 건 없어요?"라고 묻는 그녀에게 4월 17일에 보면 그때 물어보겠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중에 언급했던, 쌍용차에 2차 오체투지를 제안한 글 "'티볼리'보다 빠른 지렁이들의 '오체투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절망을 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우리를 가엽게 여기고 도와달라는 구걸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현실을 확인하고, 이제라도 다른 삶의 길로 함께 나아가자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그 길을 뚫는 일점돌파의 송곳이 될 터이니, 저 하늘의 나팔소리가 될 터이니, 함께 나아가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4월 17일, 남영역 슘에서 4시부터 11시까지니 낮술을 드셔도 좋습니다.
▲ 기륭전자분회 후원주점이 열립니다 4월 17일, 남영역 슘에서 4시부터 11시까지니 낮술을 드셔도 좋습니다.
ⓒ 기륭전자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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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차소영 기자는 <사람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사람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연재됩니다.



태그:#사람들, #기륭전자, #유흥희, #오체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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