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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못한다. 그래도 대학은 졸업하였기에 형편없진 않을 것이라 생각 하고 살았다. 하지만 웬걸 난 강아지보다도 못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남편보다 6살 많은 시누에게서 이달초 연락이 왔다.

"큰딸 부부가 일본 여행 중이야. 한국에 일주일 가량 머물고 싶다 하니 숙식을 제공해줄 수 있니?"

여러 가지 문제가 예상되었다. 시누는 친척이 있는데 호텔에 묵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거실에 재우건 된장찌개만 매일 해주건 상황에 맞게 대해달라고 했다. 그래도 고민이 되었다. 조카 부부 일주일 데리고 있는 게 '뭐 어때서?'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언어였다. 조카는 혼혈이다.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른다. 거기다 조카사위는 미국인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준비를 해야 했다. 신혼부부인데 거실서 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대적인 가구 이동과 아울러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그러는 데는 먼저 일본을 거쳐 온다는 께름칙한 사실도 한 몫 했다. 깨끗한 거리와 정갈한 집들... 몇 년 전 일본 여행 중 느꼈던 충격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 곳을 먼저 보고 한국에 온다니 미국인 조카사위에게 얕잡아 보이기 싫었다.

매운 건 잘 못 먹을까 봐 심심한 물김치를 종류별로 준비했다. 주변에 물어 거부감 없을 것 같은 음식들로 일주일치 식단도 준비했다. 몸살이 났다. 대화는 두 아들을 믿기로 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들에게 그동안 들어간 영어 사교육비 효과를 이참에 보려니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첫날부터 계획은 구멍이 났다. 통역을 담당하기로 한 큰아들은 새내기 뒤풀이를 하느라 전화 연결도 어려웠다. 작은 아들은 야간 자율학습에 빠질 수 없다고 했다.

영어로 한 인사말 세 마디, 딱 거기까지였다

"Hi! Hello!"
"How are you. nice to meet you!"
"......"

딱 거기까지였다. 무어라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신발 벗는 것, 잠잘 방, 화장실 안내를 손짓과 미소로 대신했다.

"나보단 당신이 훨씬 잘 하잖아."

남편에게 떠넘기고 차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주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어떻게 하나 귀를 쫑긋하고 기다렸다. 아무 말도 안 하고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손님들 앞에 놓고 뭐 하는 건가 싶어 다가가니 번역 앱을 깔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라도 믿어 봐야지."

처음 사용하는 거라 서툴러 제대로 번역되는지 확인할 새도 없었다. 우선 일본 여행은 어땠느냐는 말로 시작했다.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매우 깨끗했고, 매우 조용했다"면서 내가 알고 있는 감탄사와 찬사를 다 쏟아냈다. 왠지 듣고 있기가 불편했다.

"그래 니들이 역사에 대해 뭘 알겠니... 영어가 웬수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소리가 되어 나왔다. 앱에 물어볼 말을 입력하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들이 대답할 때 알아들을 수 있는 주제로 질문해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날씨 어떠냐고 물어봐?"
"뜬금이 없지 않어? 저녁은 먹었느냐고 물어봐야 하나?"

계속되는 일본여행 이야기에 알아듣는 것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렇게 길어지면 곤란한데... 저게 뭔 소린지 단어 검색해봐."

표정관리하랴 스마트폰으로 단어 검색하랴 우리 둘은 정신이 없었다.

"시누는 뭐 한 거야? 보내려면 이곳 상황을 확실히 교육해 보내지 않고..."

단어 검색이 뜻대로 되지 않자 또 생각이 소리가 되었다.

"그러게... 영어공부 좀 잘하지..."
"누가 할 소리... 빨리 시누에게 전화해서 통역하라고 해. 한 문장에 세 단어 이상 넘기지 말라고..."

영어 때문에 진땀 흘리던 그때! 코코가 등장했다

미국인 조카부부가 집에 왔을때 영어를 못하는 가족을 대신해 그 역활을 톡톡히 한 강아지 코코다.
▲ 우리집 강아지 코코 미국인 조카부부가 집에 왔을때 영어를 못하는 가족을 대신해 그 역활을 톡톡히 한 강아지 코코다.
ⓒ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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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하다간 부부싸움이 되지 싶었다.

"퍼피(강아지)?"

검색하느라 잠깐 조용해진 틈에 조카사위가 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관심을 보이며 물어왔다.

"Ok(맞아)!"
"Oh! I love puppy(난 강아지 좋아해요)."

조카사위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폈다. 조카도 함께 '퍼피 퍼피' 하며 두리번 거렸다. 3년째 푸들을 키우고 있는데 이름은 코코다. 외부인이 집에 들어오면 심하게 짖는다. 그날도 짖을 걸 예상해 그들이 아파트 입구에 왔을 때 미리 안방 화장실에 넣어놓고 깜빡했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짖어서 놀랄까봐 먼저 들어가 품에 안고 데리고 나왔다.

"코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주자 두 부부는 강아지 이름을 부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단어를 검색하던 남편도 그들의 행동에 안심이 되었는지 슬쩍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다음부턴 단어 검색할 일이 전혀 없어졌다. 코코도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앉아' '기다려' '손' 과 같은 말을 배우고 해보는 동안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야 너 사료값 한다."

분위기가 맘에 들었는지 남편도 거들었다.

그들이 머물다 가는 동안 낮엔 관광하고 밤엔 코코와 놀았다. 첫날처럼 어색한 상황은 더 이상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몇 개 안되는 영어 단어들로도 충분했다. 나머지는 강아지 코코에게 맡겨 놓으면 되었다. 조카 부부가 지루하지 않도록 손님 접대를 확실히 했다.

"아이 러브 코코..."

떠나는 날 강아지를 끌어안으며 조카사위는 눈물을 글썽였다. 시누에게서 촬영해간 코코를 보고 있는 조카부부 모습이 카톡으로 왔다. 내가 몸살 나며 준비한 음식, 깨끗한 방 그들은 잊을 것이다. 그들이 감탄하던 일본이나 서울의 관광지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집 강아지 코코만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교류를 위해 애쓴 코코에게 표창장 대신 닭 가슴살 특별 간식을 수여했다.

영어 때문에 두려웠던 미국인 손님은 강아지의 접대로 완벽했다.


태그:#영어, #외국인 손님,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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