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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밭에 쳐놓은 텐트.
 솔밭에 쳐놓은 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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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아빠'의 일탈 그리고 속죄

나이테는 1년에 한 번 긋는다. 봄과 여름에 연한 색 세포를 쌓다가 가을부터 자라는 속도가 더뎌지고 겨울에는 각질에 가까운 진한 색 세포가 제 몸에 동심원을 새긴다. 물결에 이는 파문도 동심원을 그리지만 운동에너지가 소멸하면 흔적도 사라진다. 사람의 기억은 나이테보다 수면 위의 망각에 가깝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우리 가족도 나이테를 새겼다. 나무와 물결, 고체와 액체 그 중간쯤에 동심원을 그렸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쓰는 손글씨 가족신문이 우리 가족의 나이테이다. 1년에 두 번씩 전국 여행지에서 우리의 기억을 기록했다. 그동안 만든 가족신문을 켜켜이 쌓았더니, 작은 딸 가운데 손가락 길이만 한 두께가 됐다.

최근 2년간은 성장을 멈췄다. 큰 딸이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부터다. 공부하기도 벅차다는 이유로 하루치기 여행도 힘들었다. 기억을 쌓을 시간이 그만큼 줄면 신문을 만들기도 어렵다. 방학만 되면 나는 떠나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근질했지만 큰 딸의 의지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엄마보다 키가 큰 녀석이 자기 몸 속에 또 다른 나이테를 긋고 있다.

우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알려드려야 할 게 있다. 행복했던 여행 이야기이기에 우리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도 매일 아침 아이들을 깨우려는 엄마아빠와 두 딸 사이에 고성이 오간다. 누울 자리가 비좁다며 두 딸은 밤늦게 티격태격한다. 아이들의 어지러운 책상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기도 한다. 보통 가정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의 나이테가 나에겐 특별하다. 우리 가족 행복의 기준을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잠깐 동안 맛보았던 행복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행복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잠시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여행지에서처럼 즐겁게 새 길을 찾아 나서고 싶다.  
왼쪽 위가 창간호, 오른쪽 아래가 마지막호인 13호다.
▲ 가족신문 왼쪽 위가 창간호, 오른쪽 아래가 마지막호인 13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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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눌한 나의 기발한 제안

결혼 10년차인 지난 2006년. 우린 일탈을 꿈꿨다.

"겨울방학 때 영산강 하구로 여행 갈까요? 민이 4학년 과목에 강물 퇴적작용도 나오고……."
"그럼, 가족신문 같은 거 한 번 만들까요?"

어눌한 말과 느려터진 행동, 그런 내가 순발력을 발휘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둘째가 태어난 뒤 직장을 그만두고 5~6년 동안 아이들을 키우느라 사회 생활을 접었던 아내에게 미안했다. 가끔 나를 이웃집 아저씨 쳐다보듯 하는 아이들의 시선도 꺼림칙했다. 날이 갈수록 빈도수가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가족신문을 제안한 것은 위기 의식의 표현이었다. 

나는 '새벽 아빠'였다. 결혼 전에는 밤을 새워 쓴 시를 아내에게 바쳤지만 결혼 뒤에는 새벽에 집에 들어가 잠만 자고 일어나 출근했다. 가정보다는 일이 앞섰다. 가족보다는 일과 관련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먼저였다. 알량한 책 몇 권 읽고 일과 놀이가 일치했던 원시공동체 사회를 꿈꾼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에 빠진 워커홀릭 남편이자 아빠였다.
 
이런 나에게 가족신문은 기회였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만져본 뒤에 글을 쓰면 아이들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어린 시절 좋은 추억을 스스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번성하는 논술 학원에 비례해 늘어나는 학원비도 절약할 수 있다. 전국에 널린 현장 교과서를 예습-복습할 수 있기에 아내의 학습 여행 취지를 만족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가족신문은 아빠 위상을 세울 위대한 도구처럼 보였다.

막내 기자의 그림 기사.
 막내 기자의 그림 기사.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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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신문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큰 기대를 거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내가 제안했을 때 아내는 맞장구를 쳤다. 창의적인 그림일기를 보여주면서 아빠를 놀라게 했던 큰 딸도 좋아했다. 당시 네 살이었던 막내딸은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여행지에서 그림일기를 쓴다는 말을 듣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꿩 먹고 알 먹기였다. 날마다 늦게 퇴근하고, 술에 취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모를 불량 아빠였다. 그런데 가족신문을 만들게 되면 기자 경험을 가정에 재능 기부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닌가. 그 전까지만 해도 주말을 빼면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치기도 힘든 하숙생 신세였는데 가족신문을 만들 때는 밥값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던 아내 역할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잠시 면피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무엇보다 네 식구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날아다닐 발이 생겼다. 결혼 10여년 만에 내 몸을 팔아 산 자동차. 2004년 12월엔가 자전거를 타려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자동차에 치었다. 무려 6m 날아가는 대형 사고를 당했는데 보험사에서 목돈을 안겼다. 이 소식을 들은 후배들은 자해공갈단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경찰관도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무릎인대가 90% 떨어져 나갔고 연골이 사선을 찢어져 원상복구가 안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퇴행성관절염이 올 것이기에 자전거를 타면서 다리 근육을 강화하라"고 충고했다. 머리는 뇌출혈 직전까지 갔다. 왼쪽 어깨뼈도 약간 튀어 나왔다. 두세 달 병원에 들락거리면서 몸 고생, 맘고생은 했지만 그 대가로 자동차를 얻었다. 그 때부터 나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자출사'로 다시 태어났다.

엄마 기자의 그림 기사.
 엄마 기자의 그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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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뉴스

가족 시민기자단은 1년에 두 번 취재수첩을 들고 산과 계곡, 강과 바다를 누볐다. 슬리퍼를 신고 지리산을 올랐다. 전국 국립 박물관과 유명 전시관에도 갔다. 셔터 내리는 것을 멈춰달라고 애원하면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독차지했던 적도 있다. 맛집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싼 가격에 산해진미도 맛보았다. 새하얀 별빛 아래에서 캠핑하면서 참숯에 구워먹는 돼지 목살은 일품이었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느낀 감동을 취재 수첩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국 여행지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취재 장소였다. 해수욕장에서, 눈썰매장에서 정신없이 놀면서도 즐거움을 기사에 담았다. 그곳에서 마주친 장면은 싱싱한 뉴스였다. 우리는 일기를 쓰듯 A4용지에 놀이와 감동을 담았다. 산과 계곡, 모텔과 텐트 속, 때로는 자동차 안에서 연필과 볼펜, 그리고 색연필로 총천연색 신문을 만들었다.

매일 저녁에 기사를 쓰는 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에 사나흘이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기에 순간의 느낌을 살릴 수 없었다. 집에 와서 기사로 정리하자면 큰 공사를 벌여야 했다. 결정적으로 여행 가방에 넣고 다닐 노트북이 한 개 밖에 없었다. 손 글씨로 가족신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전략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이었다. 이제와 펼쳐보니 손맛이 느껴지고 우리 체취를 담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럼 나는 1년에 두 번씩 아빠 노릇을 제대로 했을까? 아이들의 황당한 글을 보고 어이없기도 했지만, 녀석들은 아빠의 글쓰기 선생님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글을 쓰면서 바람과 나무, 땅과 하늘조차 의인화하는 어린 눈높이를 배웠다. 그 눈높이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는 이치도 새삼 깨달았다. 아이들은 나에게 색다른 시선과 세심한 묘사를 선물했다.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굳어진 기사쓰기 공식을 파괴하기도 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1인칭 화법으로 자기 느낌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실험했다. 아이들의 글도 나아졌다. 피카소 추상화 같은 그림 한 장과 글씨 한 줄 써놓고 기사라고 우기던 막내 글과 그림이 신문 호수가 올라갈수록 발전했다. 여행지에서 정신없이 뛰어노는 큰 딸의 그림과 글쓰기도 빛을 냈다. 주어와 술어가 따로 놀거나 파편적인 말을 구사하던 녀석들이 자기감정을 글에 담기 시작했다.

가족신문은 마주보기다.
 가족신문은 마주보기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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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나이테

매년 두툼하게 쌓이는 가족신문은 네 식구의 행복한 글쓰기 연습장이자, 아빠 훈련장이고, 가족 놀이터이다. 20~30년이 흐른 뒤에 들춰본다면 우리 가족의 여행 기록이자 역사책이 되어 있을 것이다. 또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두 번에 걸쳐서 쌓이는 성장의 나이테이다. 가족신문은 세상에 하나뿐인 가보다.
 
여행은 일탈이다. 우리는 매년 두 번의 궤도 이탈을 감행했다. 즐거웠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일상에서 옥죄어왔던 일로부터 탈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탈 그 자체에서 우연하게 마주치는 새로움 때문이다. 때로는 그 새로움이 우리와는 다른 생각도 있다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으로 확장됐다. 다른 삶, 다른 세상도 있다는 인식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기록한다는 것은 마주보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여행지에서 본 새로운 것들이 1차적 대상이었다. 그 뒤에 우리의 시선은 각자의 마음속에 머물었고, A4용지에 적힌 기사를 서로 돌려보면서 마주보기를 시작했다. 바깥세상을 보는 데 익숙했던 나의 눈에 우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족 바깥에서 하던 일이 만만치 않다고 느끼면서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가족 안에서 무너지는 나를 봤다. 결혼 10년차, 나는 관성으로부터 일탈할 기회를 잡았다. 새벽 아빠가 속죄할 길이 열렸다.





태그:#가족신문, #10만인리포트, #가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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