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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우 산 석회암 암벽
 타라우 산 석회암 암벽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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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찼다. 눈앞이 하얘지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부글부글 아랫배가 요동쳤다. 변의가 밀려왔다. 이건 뭐, '총체적 난국!' 체력을 과신했나? 오전 7시, 등반 중이었다. 엘니도 타운 서쪽의 석회암 암벽 타라우 산(Taraw Mountain)에서.

지난밤에 잠을 설친 탓인가. 호기부리며 나선 길인데,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간밤에 닭소리, 돼지소리, '또코! 또코!' 게코도마뱀의 우렁찬 울음소리까지, 잠귀 얇은 나를 달달 볶았다. 새벽 3시께 숙소 주인인, 알빈 호스타 어머니가 빵과 커피와 망고를 들고 오셨다. 그 이른 시간, 떠나는 사람 뭐라도 먹여 보내겠다고. 인자하신 일흔의 미소로. 새벽 4시, 작별인사를 나누고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탔다. 새벽부터 버스에 실려 덜컹거렸다.

시발탄 바랑가이(마을)에서 하루 한 대 나가는 로컬버스는 엘니도 행. 버스는 마을을 돌며 승객들을 태웠다. 전날 예약한 사람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엘니도 타운엔 아침 6시 20분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던져놓고, 곧바로 암벽등반에 나섰다. 낮에는 햇살이 뜨거워 힘들다기에.

'심장 약한 사람은 올라가지 마라' 콧등으로도 안 들었다

날카로운 석회암 타고 가는 등반.
 날카로운 석회암 타고 가는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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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약한 사람은 올라가지 마라. 굉장히 위험하다. 올라가다 포기하는 사람들이 절반이다. 얼마 전에 한 등산객이 떨어져 다쳤다, 아니 죽었다...' 그런 무성한 소문 따위, 나는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의 모험심, 과감성, 무모함 같은 성향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인지. 

'사실 배낭여행에서 '모험심'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요, 고무줄 없는 빤쓰요, 김빠진 콜라요...'(이거, 1980년대 유머인데.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고상한 말을 인용해야겠다)
'참된 여행자에게는 항상 방랑하는 즐거움, 모험심과 탐험에 대한 유혹이 있게 마련이다.'

엘니도의 석회암 기암절벽들을 몸으로 부딪쳐보고 싶었다. 시발탄에 가기 전, 방카를 타고 엘니도 바쿠잇 군도의 석회암 섬들을 둘러보았었다. 환상적인 풍경이었다(관련기사 : 천혜의 풍경 보고 갑자기 우울...설마!) 그러나 나는 그렇게 스쳐보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숙소에서 일하는 필리핀 청년 로니가 가이드를 자처하고 나섰다. 혼자 가면 길을 찾지 못한다며. 나는 다른 등산 팀 꽁무니에 따라붙을 생각이었는데. 로니가 앞장 섰다. '쪼리'를 신고 나서는 폼이, 소문만큼 험한 길은 아닌 것 같았다. 뭐, 고작 1시간 코스라는데. 타라우 산 봉오리 중에 높이 80여 미터짜리 하나 올라가는 건데. 숙소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도보로 3분 거리. 꼬불꼬불 주택가 좁은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엘니도 타운을 두르고 있는 타라우 산 암벽. 사진에 보이는 가운데 봉오리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
 엘니도 타운을 두르고 있는 타라우 산 암벽. 사진에 보이는 가운데 봉오리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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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우 산 등반(모기 물리며...)
 타라우 산 등반(모기 물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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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석회암 절벽 앞에 섰다. 입구부터 가팔랐다. 로니가 물병이 든 내 가방과 카메라를 받아갔다. 3미터 높이쯤 되는 바위절벽을 올라서니 울창한 원시림이었다. 산짐승들이 내려와 물을 먹는다는 물웅덩이를 지나 열대우림 속으로 들어갔다.

몇 미터 못 가, 어질어질 눈앞이 하얘졌다.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것 같았다. 게다가 아랫배가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최악의 순간엔, 아무리 '쪽 팔려도' 엉덩이를 까야 할 판이었다. 이런, 난감할 때가. 등산로에서 벗어나 몸을 가릴 만한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젠장! 석회암 낭떠러지에서 어디로 가 몸을 숨긴단 말인가.

나는 그만 더는 걷지 못하고, 등산로에 주저앉았다. 얼씨구나, 산모기 떼가 달려들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랄' 같은 아랫배의 요동을 가라앉혀야 했다. 10분 쯤 앉아 있었나. 변의가 가셨다. 좀 살 것 같았다. 천만다행이었다.

한눈 팔면 '골로 가기 딱'

몇 발짝 걷다 쉬고, 몇 발짝 걷다 쉬었다. 다른 등산객들이 우리를 제치고 쑥쑥 올라갔다. 속도는 느려도, 나는 물을 마시며 기운을 차렸다. 차츰 눈이 맑아져갔다.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일어선 회색빛 석회암 절벽, 바위를 휘감고 올라간 덩굴나무들,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 내린 열대나무들, 키가 크고 잎이 넓은 나무와 선인장처럼 잎이 뾰족한 나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골짜기에 퍼지는 아침햇살... 생생한 비경이었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등산로엔 루프나 계단 같은 안전장치는 없었다. 등산로를 안내하는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앞 사람의 흔적을 따라 전진해야 했다. 발 디딜 곳을 못 찾고 벼랑에 매달려 '여길 밟아라', '저길 밟아라'... 로니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아찔하게 곤두선 수직 벽을 가랑이 찢어지게 다리를 벌리며 기어 올라가고 또 기어 내려가고... 뾰족뾰족 날카로운 암석을 손바닥 아프게 짚어가며 통과했다. 자칫 한눈팔면 낙상, '골로 가기 딱이었다.'

지세가 험하기 짝이 없었다. 엘니도의 석회암 원시림은 그렇게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청정지역이었다. 수천 종의 야생 희귀식물들이 서식하기엔 알맞은 환경이었다.  

정상에서. 엘니도 타운과 바다 풍경.
 정상에서. 엘니도 타운과 바다 풍경.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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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2시간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앞질러간 필리핀 청년들이 정상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환영했다. "넌, 해냈어!"라며. 정상도 날카로운 바위들이 일어선 좁은 자리. 위태위태하게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삼각주 지형의 엘니도 타운과 푸른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앞바다엔 수백 척의 방카(필리핀 나무 배)가 종이배처럼 떠 있었다. 곧 관광객들을 싣고 바쿠잇 군도로 나갈 배들이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아침 풍경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올 만한 절경이었다. 엘니도 타운을 등지고 돌아서면, 기암절벽으로 이어지는 열대우림 숲이 펼쳐졌다.

간신히 바위그늘 속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며, 로니랑 노닥거렸다. 22살 청년 로니는 엘니도에서 태어난 원주민이었다. 형제 7명. 인상이 얌전해 보이는 친구였다. 등반 가이드로 한 달에 열 번 정도 이 산에 오른단다. 역시 베테랑답게 그는 내 가방과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쪼리'로 거뜬히 올라왔다.

30여 분 앉아 있다가 하산을 시작했다(그때 찍은 사진이 안 나와, 나는 후에 그 산을 또 올라갔다).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벼랑을 휘감으며 정상에서 막 벗어났을 때, 올라오고 있는 유럽청년들을 만났다.

"힘내! 앞으로 세 시간만 더 가면 천국이야!"

세 시간이라고? 내 말이 농담인 걸 알아챈 사람들이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노란머리 아가씨는 거의 초주검 상태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왜 나는 또 바다로 들어가려는 거지?

정오 가까이 되어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난 그대로 내 침대로 기어 올라가 누웠다. 낮잠에 빠졌다. 저녁 때, 비가 내렸다. 밥을 먹으러 나갔다가 우연히 소희씨를 만났다. 25살의 늘씬한 한국 아가씨였다. 엘니도에서 스쿠버 다이빙 마스터 과정을 훈련받고 있다고 했다.

그녀를 만나는 바람에, 나는 다시 다이빙 계획을 세웠다. 다음 날 그녀를 의지해 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몇 번이나 간곡히 부탁했다.

"나, 완전 초짜예요. 소희씨가 잘 챙겨줘야 해요. 진짜 너무 무섭거든요."

그 무서운 바다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떨렸다. 그런데도 나는 왜 또 바다로 들어가려는 거지? 못 말리는, 타고난 모험심 때문인가?  

'물 위의 세계는 우리 모두를 보행자로 만들지만, 바닷속에서 정신은 말보다 먼저, 로마나 비잔틴 세계보다 먼저, 자유를 향해 헤엄친다.'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의 저자인 '제이 그리피스'의 말처럼, 어쩌면 나는 그 '자유'를 동경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어떤 속박과 공포와 한계로부터 벗어났을 때 느끼는 자유.

자다가 한밤중에 깼다. 6명의 배낭여행자들이 모두 잠든 불 꺼진 방. 화장실에 가려고, 비몽사몽 사다리를 타고 2층 침대에서 내려섰다. 발을 헛디뎠다.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헉! 왼쪽 장딴지를 강타하는 통증. 떨어져내리면서 바닥을 디딘 발이... 쥐가 난 거였다. 나는 손으로 발가락을 잡아 힘껏 뒤로 젖히고 웅크렸다. 근육은 더 단단하게 뭉쳐 올랐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으~ 이를 악물었다.

아래층 침대에서 자고 있던 남자가 깼다. 침대 커튼 사이로 플래시를 비추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일어나 침대에서 나왔다. 젊은 유럽 남자였다. 그는 플래시 불빛 속에서 내 발가락을 뒤로 더 꺾어 젖히고, 다리를 마사지 했다. 서서히 통증이 가라앉아갔다. 그때서야 창피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아무튼 침대사다리에서 떨어지고서도 다른 데는 멀쩡했으니, 또 천만다행이었다.

스쿠버다이빙 일행들
 스쿠버다이빙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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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도에서 스쿠버 다이빙
 엘니도에서 스쿠버 다이빙
ⓒ 조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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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도에서 스쿠버 다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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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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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이탈리아 아가씨 알리스, 헝가리 청년 말톤, 그리고 소희씨, 다이버 마스터인 스페인 아가씨 모니카랑,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바다로 나갔다. 우리는 바쿠잇 군도 섬 주변을 옮겨 다니며 다이빙을 했다. 오후 늦게까지, 세 차례 바다로 들어갔다.

초보 다이버가 바다에서 겪을 수 있는 공포를 제대로 체험한 하루였다. 조류에 쓸려가는 공포를 맛보았고, 가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아 일행을 찾으며, 패닉 직전까지 갔었다. 마스크로 물이 들어오질 않나, 호흡기가 빠진 통에 숨 막혀 죽을 뻔 하지 않았나. 장비가 몸에 착 맞질 않아, 공기통이 자꾸 뒤통수를 쳐대기도 했다.

수면까지 급상승 되는 바람에, 잠수병에 걸릴 수 있는 최악의 순간도 겪었다. 그리고는 '바닷속 풍경이 코론보다 못하다'고 말해, 엘니도를 사랑하는 소희씨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무사히 육지로 귀환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바다를 벗어나자마자 나는 또 그 세상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좌충우돌 무리했다. 온몸이 근육통으로 쑤셨다. 내 몸이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는, 짜릿짜릿 기분 좋은 통증이었다.


태그:#팔라완, #엘니도, #타라우 산, #배낭여행,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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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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