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국내 포스터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국내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미국 박스오피스를 휩쓸고 있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트와일라잇>시리즈의 팬픽에서 시작해 '주부들의 해리포터',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별칭을 얻으며 미국 전역을 초토화시킨 원작소설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출간된지 3개월 만에 2100만 부가 팔렸고 지금까지 전세계 1억 부 이상을 판매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조차 쉽지 않다.

소설을 먼저 접한 이들은 장면마다 쏟아지는 베드신의 양이 압도적인 수준이었다고 전하는데 막상 개봉한 영화에는 여러모로 순화한 흔적이 역력하다. 방대한 소설을 한 편의 영화 안에 담으려다 보니 다양한 에피소드를 덜어낼 수밖에 없었고 영상매체의 특성을 고려해 성행위의 수위 역시 조절한 게 아닐까 싶다. 반면 철저하게 여성의 판타지를 구현한 원작의 감성 만큼은 그대로 살리려 노력했다. 영국 출신의 여성 연출자 샘 테일러-존슨이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 영화가 필모그래피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작품으로 남을 듯하다.

주연은 다코타 존슨과 제이미 도넌이 맡았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크리스챤 디올, 켈빈 클라인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톱 모델로 활동했던 제이미 도넌은 탄탄한 몸매와 북아일랜드의 이국적인 악센트를 통해 여성 관객들을 매혹시킨다. 상대역인 다코타 존슨은 화려한 할리우드 배우들 사이에서 평범함이 묻어나는 외모를 가졌다고 평가받아 왔지만 노출을 마다하지 않는 열연으로 자신의 매력을 뽐냈다.

이 영화 호불호가 명백히 갈리는 이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레이가 건넨 연필을 물고 묘한 감정을 느끼는 아나스타샤(다코타 존슨)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레이가 건넨 연필을 물고 묘한 감정을 느끼는 아나스타샤(다코타 존슨)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먼저 개봉한 미국에서는 호평과 악평이 극명히 엇갈리는 모양새다. 유력한 평가사이트인 IMDB와 로튼토마토에서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일찌감치 최악의 영화로 낙인을 찍었는데 신선하지 않고 완성도 역시 떨어진다는 것이 대략적인 이유였다. 일부 관객들은 BDSM(결박,지배,사도마조히즘 성행위)과 여성비하를 서슴치 않는 불온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영화를 비난하기도 했다. 돈 많은 남자가 순진한 여자를 유혹해서 변태적 행위를 자행하는 걸 미화하고 있다는 것.

국내 영화관련 사이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같은 의견은 다소 과도한 구석이 있다. 오히려 영화는 불온한 격정멜로라기보다 순진무구한 팬픽션에 가깝다. 줄여서 팬픽이라고도 하는 팬픽션은 만화·소설·영화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인기를 끄는 작품을 대상으로 팬들이 2차 창작한 작품을 뜻한다. 국내에서도 아이돌 팬카페 및 각종 온라인 사이트를 중심으로 팬픽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는데 문학적 수준이 뛰어나진 않지만 팬들이 적극 참여해 만들고 즐기는 파생문화로써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트와일라잇>의 팬픽에서 시작했지만 인기를 얻으며 거의 모든 내용에서 수정을 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심이 되는 갈등이나 캐릭터에서 <트와일라잇>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팬픽 특유의 아마추어적이고 전형적인 특징이 묻어나온다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영화는 활자매체와 영상매체의 차이를 고려해 성행위의 수위를 조절하면서도 원작의 기세를 등에 업고 제작된 작품답게 기존 장점을 최대한 녹여내려 했다. 줄거리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데 서로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끼는 청춘남녀의 이야기와 변태적 욕구와 사랑 사이에서 고통받는 연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영화에는 팬픽 특유의 오글거리는 설정과 묘사, 대사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이를 차원이 다른 뻔뻔함을 통해 장점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진지한 멜로물을 가장한 코미디 영화가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익숙한 설정들의 등장...그럼에도 빠져든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밤마다 상의를 탈의하고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크리스챤(제이미 도넌 분)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밤마다 상의를 탈의하고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크리스챤(제이미 도넌 분)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학교 졸업을 앞둔 순수한 아나스타샤다.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젊고 잘생겼으며 일견 차가워보이지만 따스한 마음을 가진 어마어마한 부자, 크리스챤 그레이를 알게 된다. 그들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아나스타샤는 크리스챤의 압도적인 매력에 순식간에 빠져들지만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성향을 마주하면서 깊은 혼란에 빠진다.

능력있고 남자답지만 한 편으론 지적이고 섬세하며 오직 나에게만은 따뜻한 남자. 완벽해보이는 이 남자에겐 딱 한 가지 비밀스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온갖 비현실적 설정이 뒤범벅된 이 영화는 전형적인 팬픽물의 특성을 드러낸다. 시대에 맞게 변주된 백마 탄 왕자님께서 내세울 건 딱히 없지만 마음만큼은 동화 속 공주 못지않은 주인공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괴롭히는 역경을 진심과 사랑을 통해 극복해 나간다는 게 그렇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아무 것도 갖지 않은 나를 그토록 원할리가 만무하며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유일한 결점을 나만이 채워줄 수 있을리도 없을 텐데 이런 류의 영화와 소설, 드라마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건 백마 탄 왕자와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상당 수 독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줄리아 로버츠의 출세작 <귀여운 여인>부터 시작해 적지 않은 수의 영화와 드라마가 이와 같은 설정이었다. 주요 얼개까진 아니어도 신데렐라 스토리를 부분적으로 반영한 작품을 찾아보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 속 크리스챤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인물이다. 드레스와 노트북, 자동차를 아낌없이 선물하고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와 위험 같지 않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적극 보호하며 헬리콥터와 경비행기로 낭만적인 데이트를 선사하는 사람이다. 차가운 남자라는 평을 듣지만 내게는 질투도 많고 귀여운 구석이 있으며 더없이 따스하기까지 하다. 영문학을 전공한 나와 대화가 가능할 만큼 지적이며 매일 밤 차가운 달빛 아래 거실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감성까지 갖췄다. 잘생긴 얼굴과 근육질 몸매, 고급스런 취향은 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만취해 옷에 구토까지 한 나를 옷까지 갈아입혀 고이 침대에 눕히고는 손 끝 하나 대지 않는 신사적인 태도. 상처를 줄까 두려워 멀리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가서는 낭만적인 모습. 이런 부분들에선 본능적으로 피를 갈구하지만 사랑하기에 벨라를 멀리했던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가 떠오른다. "상처주고 싶지 않지만 나는 본원적으로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어. 그게 나니까.", "나는 50가지 그림자로 얼룩진 남자야." 따위의 말 같지도 않은 대사들은 이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입을 통하는 순간 믿기 어려운 무게를 갖는다. 영화는 허영심에 찌든 여자의 상상에서나 등장할 법한 상황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데 진지함을 가장한 뻔뻔함에 진심어린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일찌기 움베르토 에코는 '한 두개의 클리셰는 웃음만 나오게 하지만 수백 개의 클리셰는 우리를 감동시킨다'고 했는데 이 영화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격정 멜로나 BDSM 행위 없지만 볼 가치는 충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아나스타샤 역을 맡아 노출을 감행한 다코타 존슨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아나스타샤 역을 맡아 노출을 감행한 다코타 존슨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이라면 만족할 만한 작품이지만 격정멜로나 적나라한 BDSM 행위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하기 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온갖 종류의 채찍과 수갑 등을 보여주지만 사용되는 건 넥타이, 로프, 가죽수갑, 공작꼬리부채, 채찍 따위가 전부다. 크리스챤은 BDSM 행위랍시고 아나스타샤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찰싹 때려대는데 계속 보다보면 이마저도 낭만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러니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영상을 기대했다면 집에서 성인물이나 찾아보는 편이 낫겠다.

아무튼 영화는 세간에서 혹평하는 것 만큼 허접한 작품은 아니다. 이야기의 전형성과 유치함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음을 제작진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 영화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불온함과 유치함을 지적하지만 <아마겟돈>의 잣대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바라봤다면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은 지금껏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편견 없이 편한 마음으로 상영관에 들어간다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클리셰가 어떻게 우리를 감동으로 이끄는지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영화가 취향에 맞지 않았다 해도 대니 엘프먼이 공들여 작업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 만큼은 만족할 수 있을테니 이 영화를 보는 건 차라리 안전한 선택이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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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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