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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말이 없다. 승용차 안 분위기가 무겁다. 설 명절을 큰집에서 보낸 다음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이젠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어색하다.

"이 못난 놈 같으니라구. 빨리 겨 들어가지 못해!"

벌써 15년 전 일이다. 어머니께서 급작스럽게 우리 집에 오셨다. 아내는 '어머님이 시장하실 테니 쌀을 씻어 놓으라'는 말을 남기고 찬거리를 사러나갔다. 내 어머님을 위한 일인데, 쌀을 씻는 게 뭐 어렵겠나. 

"이놈아, 옛말에 사내 자슥이 부엌에 들어오면 불알 떨어진다는 말이 있어. 이리 내! 내가 할 테니."

처음 듣는 새로운 정보였다. 만약 어머니 말씀이 사실이었다면, 이미 뉴스에 몇 명의 뭐가 떨어졌다는 기사가 나왔을 법도 한데,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굳이 해석하자면 남자들의 도리가 있고,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씀이겠다.

그 이후로 아내는 빨래를 털어달라는 부탁은 해도 부엌일은 시키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될까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내겐 싫지 않은 일이었다.

천사, 무표정, 늑대... 아내의 변화무쌍한 표정

설날 우리집 제사풍경. 올려진 음식을 차리는 건 아내 몫이다.
 설날 우리집 제사풍경. 올려진 음식을 차리는 건 아내 몫이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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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그 많은 음식 언제 다 하냐. 사 가지고 가면 좋을 텐데."

명절이 다가오면 아내는 음식장만부터 걱정했다. 우리 아이들과 형님, 조카들까지,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이면 8명이다. 아내가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가족들이 모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제사음식 때문이었다.

나의 형님은 스님이다. 조그만 암자에서 쇠는 제사는 철저하게 불교식이다. '스님이 무슨 아이들이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형님은 결혼 이후 출가의 길을 걸었다. 조카들은 형님과 어머님의 손에 의해 자랐다.

명태 찜, 숙주나물, 콩나물, 고사리무침, 부침개, 시금치무침, 전병, 튀김, 전 종류만 해도 대여섯 가지는 족히 넘는다. 설날 제사상엔 만둣국이 필수다. 제사를 위해 이 많은 음식을 만드는 건 오롯이 아내 몫이다.

"쉿! 조용히 해, 엄마 왔다."

건넌방에서 TV 채널권을 놓고 아이들과 티격태격하다가 그대로 멈췄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곤 부엌으로 향했다. 무언의 경고다. 무슨 의미일까. 자신은 음식 만드느라 힘들게 일하는데 아이들과 희희낙락하는 내 모습이 꼴사나웠음이 틀림없다. 이럴 때 방법은 딱 한 가지다. TV 채널권을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부엌으로 나가 얼쩡거리는 거다.

"당신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애들과 싸우기나 하고..." 

역시 나오길 잘했다. 표정은 그대로지만 아내의 말투가 다소 누그러졌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부엌 출입금지를 이해했지만, 계시지도 않는 마당에 그렇게 마누라를 부려먹고 싶냐'는 표정이다.

"제수씨, 힘드시죠?"
"아니에요.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일인 걸요. 근데 여보는 언제 나왔어. 빨리 들어가. 호호."

형님의 말에 아내의 얼굴에 천사가 떴다. 일류배우 뺨치는 연기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형님 앞에서는 한 번도 불만을 말한 적이 없다. 그 많은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끝낼 때까지 '엄청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건 집에도 있는데, 뭘 이렇게까지..."

말만 그렇게 하지, 아내는 큰집에서 바리바리 싸주는 것들을 거절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일을 시킨 게 미안했던지 어머님은 돌아가시기 1년 전까지 쌀, 콩, 감자, 호박 등 큰집에 있는 것들을 못줘서 안달이셨다.

아내의 가식은 끝났다. 그녀가 차에 탄 순간 슬슬 불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천사 같던 얼굴이 무표정을 거쳐 늑대로 돌변할 일만 남았다.

명절에 출근하지 않으려면 아내 말을 들어라

아내와 아이들을 태운 차량이 큰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불안은 가중됐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당신 큰집에서 한 게 뭐야?"
"마늘 까래서 깠잖아."

대꾸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한 마디에 아내는 마치 따발총을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빠르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논리정연하기까지 하다. 틀린 말이라도 한 마디 했다면 비집고 들어가련만,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말이 반복되면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당신이 맏며느리라고 생각해봐. 매일 집안일 해야지, 빨래해야지, 세상에 그런 사람 많아. 그나마 나 만난 거 복 받은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아내는 "그래서 당신이 집에서 이불을 한 번 갠 적이 있느냐"부터 시시콜콜한 몇 년 전의 일까지 다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집사람이 이렇게 머리가 좋았었나' 라는 감탄할 틈도 생기지 않았다. 완전히 벌집을 쑤셔놓은 형국이다. 쓸데없이 내뱉은 내 대꾸 한 마디에 설 명절 연휴 내내 냉전이 이어졌다.

"휴일에 왜 나왔어?"
"어~ 바쁜 일이 있어서..."

냉전이 지속될 땐 집에서 탈출하는 게 최고다. 가족, 친지들과 모여 있을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술 한 잔 하자는 것도 실례다. 결국 탈출구는 사무실이다. 명절 당직자의 질문에 '급한 일이 있어 나왔다'고 했지만,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 인터넷만 뒤적이곤 했다. 이후 명절 '아내의 말에는 무조건 수긍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나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여우 같기도 하고 때론 천사 같기도 한 아내와 생맥주를 같이했다
▲ 마눌님 소개 어느 날. 여우 같기도 하고 때론 천사 같기도 한 아내와 생맥주를 같이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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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에게 선물 뭐 할래?"

지난 15일, 아내는 직원들에게 뭘 선물할 거냐고 물었다. 돌이켜보면 아내는 그동안 설 명절을 앞두고 윗사람들에게 뭘 줄지 물어본 적이 없다. 챙겨야 할 사람들은 상급자들이 아닌 직원들이란다. 어쨌든 당신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은 직원들 아니냐는 말이다. 윗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선물은 자칫 '잘 봐 달라'는 청탁으로 비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설 명절이 끝난 후 시력검사를 해 봐야겠다. 깡패 같던 아내가 천사로 보이니 말이다.


태그:#설날, #설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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