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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결혼한 지 13년. 결혼 초기 비슷했던 생각이 많이 달라졌음을 확인하면서 '다르게 바라보기'를 서로의 관점에서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 그 남자의 다르게 들리지만 다르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 '그 여자 그 남자의 다.다.다.'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 남자 이야기는 남편 지용민 시민기자가, 그 여자 이야기는 아내 박보경 시민기자가 썼습니다. - 기자 말
 
본가냐 처가냐, 어디를 먼저 갈 것인가(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본가냐 처가냐, 어디를 먼저 갈 것인가(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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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이야기] 명절 때마다 맘 불편한 한 남자 이야기

이제 또 다시 민족대명절인 설이다. 어른이 된 뒤로는 추억의 힘으로 산다. 어렸을 적 설은 기다려지는 명절이었다. 오랜만에 인사를 하는 집안 어른들이 반가웠는데, 그들이 주는 세뱃돈 때문이었다. 어떤 때에는 엄마가 대신 '저금'을 해준다며 가져갔다. 아직도 그 돈은 감감무소식이다. 어떤 때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만지작거리면서 상가를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내 기억 속 설은 그러했다.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나는 가정을 이뤘다. 결혼 초기부터 지금까지 우린 제법 잘 어울렸다. 나의 생각과 느낌으로 종합해보건대 우리는 서로에게 불만이 없다. 내부가 평온하면 대부분의 위기는 외부에서 찾아온다. 결혼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를 동안 나는 명절이 힘들었다. 언론에서는 '명절증후군'이라며 명절의 고통을 언급하며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 가끔 남자가 힘든 경우는 막히는 길의 '운전 노동' 혹은 오랜만에 뵙는 장인어른, 처가 식구들과의 술자리 정도?

내가 명절이 힘들던 까닭은 아내가 '무남독녀'였기 때문이다. 5월에 결혼한 새신랑, 새신부에게 첫 명절은 추석이었다.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학생부부였던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향후 명절의 '원칙'을 약속했다. 원칙은 단순했다. '본가 체류 50%, 처가 체류 50%'였다. 다만 본가에서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명절 아침'을 보내는 곳은 본가로 합의했다. 차례를 지내고 이른 점심을 먹은 뒤 '뒤도 안 돌아보고' 처가로 향한 것이다.

지금 고민의 출발점이 된 13년 전, 장모님의 진심

그로부터 13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100%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2003년 추석 당일 처가로 향하는 길이었다. 전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루 종일 전과 각종 차례 음식을 하느라 몹시 놀란 집사람을 틈틈이 방으로 불러서 어깨도 주물러주고, 쉬는 시간을 갖는 등 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아내는 화가 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가로 향하는 발걸음은 오히려 편했고 기분이 좋았다. 장모님과 통화하기 전까지는.

처가 앞에서 장모님과 통화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무슨 일이지?' 전화를 끊은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길을 걷다가 아내에게 물었다.

"장모님 무슨 일 있으시대? (첫 명절을 겪은) 당신이 걱정돼서 그런 건가?"

"화가 나신 거 같아. 왜 이제야 오냐고."

"본가 50%, 처가 50%이니까 지금 도착하는 건 서운해 할 일이 아니잖아."

"당신네는 3남매고, 나는 무남독녀니까 그러신 거 같아."

"그건 내가 이해가 안 되는데? 장모님 입장에서는 3남매와 무남독녀를 비교할 순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 부모님은 당신과 같은 의미야."

그 후로도 우리의 50% 대 50% 원칙은 불변이다. 선(先)본가 후(後)처가 원칙도 잘 지켰다. 섭섭해하는 무남독녀를 둔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위해서 명절 때마다 처가 식구들과 여행을 다닌다. 그분들의 섭섭함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 섭섭함을 풀어드리고 싶어하는 아내를 생각해서였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서 우리 부모님과 여행을 다녀본 것은 몇 번이었는지를 생각했다.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나도 명절 때 우리 부모님과 여행을 다니고 싶다.

더 시간이 흘렀다. 결혼한 지는 13년이 됐다. 나에게는 8살 된 딸이 있다. 6살 아들도 있다. 올해 설 명절에도 우리의 원칙은 동일하다. 수·목요일은 본가에서 차례 준비를 하고 차례를 지낸다. 갈수록 명절 차례상이 간소해지는 추세다. 목요일 저녁 때 처가로 이동한다. 금·토요일 이틀은 두 분을 모시고 속초로 여행을 떠난다. 바다 구경을 하고, 설악산도 갈 예정이다. 속초 맛집도 다 찾아놨다.

아내와 '이런 명절,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나눈 건 지난주였다. 핵심은 '명절날 아침을 왜 꼭 본가에서 보내야 하는가'이다. 내가 차남이고 아내는 무남독녀이기에 가능한 발상인지는 모르겠다. 조상님께 드리는 차례의 의미가 점점 변형되는 과정이기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는 드러내놓고 가족 간에 토론해야 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딸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설 당일 아버지, 어머니와 형님 가족들과 모여서 진지하게 화두를 꺼내볼 계획이다. 설에는 본가에 와서 차례를 지내고 처가에 가고, 추석에는 처가에 먼저 가서 명절 아침을 보내고 본가에 오고 싶다고. 1년에 민족대명절은 두 번 있다. 한 번은 선(先)본가, 다른 한 번은 선(先)처가로 한다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나도 다가오는 추석에는 우리 부모님과 여행을 다니고 싶다. 그런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결정적으로 나는 명절날 아침을 우리 딸네 가족들과 보내고 싶은 맘이 크다. 나도 아들이자, 사위이자, 딸을 둔 아버지다.
 
추석에는 처가 먼저 가겠다고 하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추석에는 처가 먼저 가겠다고 하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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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이야기] 고마운 시엄마의 말 "너는 내 딸이 아니다"

25살. 지금 생각해보니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결혼을 했다. 결혼식을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께서는 어린 둘째 며느리(나)를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며느리는 며느리지 딸이 아니다."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네'라고 대답했다. 그 후 시어머니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실천하셨다. '남의 집 딸'이인 내게, 며느리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으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대체로 순조로운 고부 간으로 지낼 수 있었다. 고부갈등이 며느리에게 딸의 역할까지 기대하는 욕심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나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때때로 불협화음이 있기도 했지만 새로 형성된 가족끼리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결혼한 내게 어렵던 것은 오히려 친정엄마와의 관계였다. 형제 없이 혼자 자란 내게 부모 외의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싶던 부모님은,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큰 반대 없이 결혼에 찬성하셨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친정엄마는 딸을 '시집 보낼' 마음의 준비는 덜 된 것 같다. 

결혼 후 첫 명절인 추석. 시댁에서 부지런을 떨고 우리 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렸을 적 명절에 친가에서 외가로 향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라 내심 뿌듯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왜 이제 오니? 너네 기다리다 엄마 아빠는 목 빠지잖아?!"

"그렇게 늦지도 않았는데 왜 그래?"

예상 외의 차가운 반응에 놀랍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친정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여전히 차가웠고 아빠는 엄마와 나 사이를 오고 가며 안절부절못하셨다. 어색한 명절이 지났다.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엄마가 왜 그랬을까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며칠 뒤 엄마를 다시 만났다. 엄마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 있지. 한 번도 자식을 한 명만 낳은 걸 후회한 적이 없는데 이번 명절엔 정말 후회가 되더라. 내가 왜 너 하나만 낳았을까…. 지난 번엔 미안했어. 나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되더라. 명절에 시댁부터 가는 거 말이야.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론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엄마는 긴 한숨처럼 속마음을 토해냈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알기 어려운 엄마의 마음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의 명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마련한 방법은 명절에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기다리는 우리 부모님도 기다림의 시간이 설렘의 시간이 될 테니까 부모님의 서운함도 덜 수가 있었다. 우리의 계획은 성공적이었고 지금은 그런 스트레스 없이 명절을 보낼 수가 있다.

나 역시 결과가 궁금한 13년차 부부의 문제제기

며칠 전 남편과 자연스레 명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남편은 내게 명절증후군이 없느냐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시댁에 가서 차례상 준비하는 일이야 1년에 두 번이니 크게 힘들지 않았고, 또 그 시간이 지나면 나름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 별 불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명절에 처가에 먼저 간다고 하면 어떨까? 당신은 어때? 명절이 두 번이니까 한 번은 본가에 먼저 가고 다음엔 처가에 먼저 가고. 형은 나랑 반대로 하는 거지. 서로 번갈아가면서 본가에 먼저 가는 거야. 이번에 가서 형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려볼까?"

뜻밖의 제안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남편의 제안이 고마웠다. 그러나 이 제안은 우리 둘이 협의를 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양해를 해야 하는 시댁 어른들이 계시고 더욱이 형님과도 협의가 돼야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편의 제안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요즘처럼 너나 없이 자식이 귀한 세상에, 명절날 무조건 시댁으로 먼저 향하는 발걸음을 조금은 바꿔보자는 것이니 말이다. 어떤 집에서는 당연한 인사와 차례가, 어떤 집에서는 막연한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이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댁에서 명절을 준비하고 지내는 것은 우리의 전통이다. 이것을 한 순간에 깨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명절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그동안 함께하지 못하던 가족과 만나는 고마운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제안하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설과 추석, 명절 아침을 시댁과 친정에서 한 번씩 보내자는 우리의 생각은 정녕 있을 수 없는 제안일까?

덧붙이는 글 | 설날 아침을 뜨겁게 달굴 우리 가족의 문제제기 결과는 다음 번 '다.다.다'를 통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태그:#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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