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빈호아 초등학교의 아이들
 빈호아 초등학교의 아이들
ⓒ 김형배

관련사진보기


빈호아로 향하는 버스 안은 차분했다. 어제까지 호치민에서 마주했던 즐거움이 아직 머릿속에 가득할 텐데, 더구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재잘재잘 떠드는 그런 나이임에도 아이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차분했다.

시골길을 지나 마을이 보였다. 순간 섬뜩했다. 50여 년 전에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따이한'이라 불리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걸었을 길이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빈호아 마을 인민위원회 관계자로부터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받았으나 우리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 우리의 표정도 굳어있었고 인민위원회 관계자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우리를 따라다니던 베트남 공안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들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민위원회를 나와 마을을 관통하는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세 개의 조형물이 있었다. 책에서 보았던 위령비와 증오비였다.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숙여졌다.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느껴져 머리는 더 무거워졌다. 마을의 제일 중심에 있는 증오비.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이 증오비를 보며 살아왔을 생각을 하니 그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 보이는 것 같았다.

430여 명의 민간인, 특히나 그 대부분이 노인, 여인, 아이들이었던, 그들이 무참하게 죽어간 장소에 다다를수록 미안함보다는 무서움이 느껴졌다. 증오비에 쓰여있는 문구들, 주민들이 잊지 않기 위해 새겨놓은 그 문구들, 처참한 죽음을 기록해 놓은 그 문구들이 무서웠다. 주민들의 분노와 증오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주민들이 만든 증오비, 정부에서  만든 위령비, 그리고 영국인이 만든 위령비에 대해 차례로 설명을 들었다. 한국정부는 이 마을에 위령비 하나 세워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울화와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아이들의 표정은 더욱 무거워졌다. 한 시간이 넘게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예를 다해 참배하고 묵념했다.

 아이들은 증오비와 위령비에 마음을 모아 참배했다.
 아이들은 증오비와 위령비에 마음을 모아 참배했다.
ⓒ 김형배

관련사진보기


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향을 준비했다. 향 묶음에 불을 지피고 바닥에 문질러 불을 껐다. 향 묶음에서는 진한 연기가 올라왔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매워서인지 미안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아이들에게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갑자기 꺼진 향 묶음이 다시 불타기 시작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갑자기 꺼진 불이 다시 붙어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커져버린 불에 너무 놀랐다. 아니 무서웠다.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과거의 사람들이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빈호아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실뜨기 놀이를 알려주고 있다.
 빈호아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실뜨기 놀이를 알려주고 있다.
ⓒ 김형배

관련사진보기


무거운 마음으로 우리는 빈호아 마을 초등학교로 이동했다. 반쯤 열려져 있는 철문이 마을사람들의 마음 같았다. 한국사람들의 방문을 환영할 수도 없지만 막을 수도 없는. 철문이 더욱 무거워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진입로를 걸어가는데 우리 아이들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저 멀리 건물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를 맞이해주는 아이들의 그 밝은 표정에 무거운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누런 빛이 바래버린 건물에서 교복을 이쁘게 입은 40여 명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걸어나왔다. 그 아이들은 우리들 앞에서 환영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줄을 맞추라고 웃으라고 사인을 보내는 선생님의 모습이 매우 낯익었다.

우리는 실뜨기 놀이를 빈호아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몸짓으로 따라할 수 있는 놀이를 준비한 것이다. 종이 울렸다. 하교 시간인지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한 여름이었지만 이들에게는 1월은 1월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외투와 털모자를 썼다. 그 와중에는 헬멧을 쓴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몰려든 아이들은 전부 사복을 입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왜 교복을 입고 있지 않지, 하는 의문이 들어 물어보니 이 아이들이 입고 있는 교복은 개인 것이 아니라 행사를 위한 공용 교복이란다. 교복을 맞추어 입을 형편이 되지 못하는 가정이 많기 때문이란다.

 빈호아 학살의 생존자 도안응이아 아저씨댁에서 모질고 힘겨웠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빈호아 학살의 생존자 도안응이아 아저씨댁에서 모질고 힘겨웠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 김형배

관련사진보기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당시 기적적으로 생존한 도안응이아 아저씨댁을 방문하였다. 그는 당시 생후 6개월. 어머니의 품에 쌓여 있어서 간신히 생명은 건졌지만 핏물과 화약물이 눈에 들어가 양쪽의 시력을 잃었다. 어둠속에서 울고만 있었던 아기. 엄마품의 따스함이 식어갈 때, 엄마가 움직이지 않을때 아기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허름한 아저씨 댁에 우리들은 비좁게 앉아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눈물과 콧물 때문에 더 이상 아저씨의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가 없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아저씨 댁을 나와 바람을 쐬었다. 얼마 되지 않아 집이 소란스러워져 달려가보니 우리 청소년 한 명이 쓰러진 것이다. 아이를 들춰 업고 버스에 뉘었다. 아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되는 건 아닌 건지 걱정되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다른 인솔교사가 차분하게 아이를 주무르고 말을 건네 아이를 안정시켰다. 아이의 혈색이 점차 좋아졌다. 창문을 열어놓았음에도 버스 안은 더웠다. 그 선생님은 한 손으로는 아이를 주무르고 한 손으로는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만큼 선생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아침 먹었던 것이 소화가 잘 안 된 상태에서 더위 속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서서 설명을 들어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듣고 있으니 마음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저씨와의 만남이 끝날 때까지 그 선생님은 계속 아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버스 주위에 있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사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아저씨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빈호아 중학교에 방문하였다. 중학교 아이들은 영어를 배워서 그나마 우리 아이들과 간단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축구를 했다. 운동장 저 편에 소와 염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우리가 불청객 같았다. 운동장에는 돌도 많았다. 열악했다.

빈호아 중학교 아이들이 유니폼을 갖춰 입고 등장했다. 맨발인 아이들이 있었다. 축구화를 살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돌밭에서 맨발로 축구를 한다는 것이 상상도 안 가지만 그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으나 우리 아이들은 급격한 체력저하를 보여주었다. 외관상으로는 훨씬 더 키가 크고 튼튼해보였으나 이미 달리는 속도는 떨어졌고 얼굴은 열기로 인해 붉어졌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7:1은 너무한 거 아닌가.

여자 아이들은 또래끼리 이야기 꽃을 피웠다. 단어 중심의 영어를 구사하며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깔깔대고 웃었다. 빈호아 중학교 여선생님들은 역시 우리팀의 여자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빈호아 중학교 선생님이 우리 여자 선생님에게 첫 번째로 물어본 것이 "결혼은 했냐? 왜 아직까지 안 했냐?" 였단다. 세상 어디가나 아주머니들의 대화 방식은 비슷한가 보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연락처를 나누기 시작했다. 빈호아 아이들의 대부분이 주소 이외에 가르쳐줄 연락처가 없었다. 그 중에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아이디를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었다. 빈호아 아이들은 우리의 버스까지 따라 왔다. 세 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몇몇 빈호아 아이들에게는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 할 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헤어짐의 아쉬움을 포옹으로 달랬다.

 빈호아 중학교 아이들과 헤어지면서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있다.
 빈호아 중학교 아이들과 헤어지면서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있다.
ⓒ 김형배

관련사진보기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양국의 아이들이 서로 안아주는 모습이 눈가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50여 년 전에 어른들이 만든 상처, 분노, 증오가 수십 년이 지나 아이들의 미소, 포옹으로 인해 아물어가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우리를 반겨주었던 빈호아 사람들의 그 밝은 미소 때문에 더욱 미안했다. 빈호아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의 미소는 어른들의 상처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의 미소는 어른들의 상처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 김형배

관련사진보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