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유재민과 정다정 뮤지컬 <아보카토>에서 유재민 역할을 맡은 배우 이규형과, 정다정을 연기한 홍지희가 지난 7일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다. 두 배우의 합이 상당히 잘 맞는다.

▲ 유재민과 정다정 뮤지컬 <아보카토>에서 유재민 역할을 맡은 배우 이규형과, 정다정을 연기한 홍지희가 지난 7일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다. 두 배우의 합이 상당히 잘 맞는다. ⓒ 곽우신


나의 첫사랑은 '짝사랑'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두 살 어린 친구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키 크고 잘생긴, 노래 잘하고 옷 잘 입는 남자친구에 비하면 나는 초라했다.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어느 겨울날, 그 사람과 단 둘이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늦은 시각, 인적이 드문 길.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그때. 그 사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오빠, 나 좋아해요?" 아무리 꼭꼭 숨기려 해도 어디에선가 감정이 새어나왔을 테다. 어설프고 설익었던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잠시동안 침묵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라는 나의 대답에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다행이네요"라고... 그 순간 말하지 않으면 영영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때, 그렇게 첫사랑에게 고백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복잡미묘했던 감정들을, 지금 와서 설명하려해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새로울 것 없는 평범한 드라마, 공감 포인트를 짚다

뮤지컬 <아보카토>의 배우들 왼쪽부터 이기섭, 홍지희, 이규형 배우가 뮤지컬 <아보카토>의 7일 저녁 공연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특히 멀티 역할을 맡은 이기섭의 연기가 탁월하다.

▲ 뮤지컬 <아보카토>의 배우들 왼쪽부터 이기섭, 홍지희, 이규형 배우가 뮤지컬 <아보카토>의 7일 저녁 공연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특히 멀티 역할을 맡은 이기섭의 연기가 탁월하다. ⓒ 곽우신


감정이란 것이 그렇다. 감정은 색깔이다. 우리가 무지개를 편의상 일곱 가지 색깔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한에 가까운 색들의 스펙트럼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색은 100% 순수한 원색이 아니다. 채도·명도·대비가 제각각이다.

100% 순수한 사랑은 없다. 사랑은 수만 가지 감정들의 혼합체다. 두근거리는 설렘과 더 보고 싶은 아쉬움이 섞인다. 그 위에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상대에게 소유되고 싶은 심정이 동시에 들어간다. 연인에게 인정받고 싶고, 상대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싶다. 상대를 만나면 기쁘면서도 슬프고, 좋으면서도 싫다.

이 복잡다단한 감정의 총아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뭉뚱그려 칭한다. 특히나 첫사랑, 대개 실패로 끝나는 그 경험의 감정은 훨씬 더 미묘하다. 뮤지컬 <아보카토>(아트원씨어터, 2월 15일까지)는 그런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각자의 추억을 프리즘으로 투영하게 만든다.

아보카토(Abboccato)는 이탈리아 와인의 당도를 구분 지을 때 쓰는 말이다. 네 단계로 구분되는 당도 가운데, 아보카토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중간 당도를 의미한다. 같은 와인인데도, 달달할 때가 있는 반면 쓰고 떫을 때가 있다. 같은 사람과 같은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결과물의 원재료는 계속 바뀐다. 뮤지컬 <아보카토> 속 사랑은 아보카토 와인처럼 100% 달콤하지도, 100% 쓰지도 않은 평범한 우리네 첫사랑 이야기다.

뮤지컬 <아보카토>에 새로운 건 없다. 첫사랑이라는 소재부터 우선 그렇다. 음악을 하는 남자와 글 쓰는 여자의 애정 구도도 낯익다. 두 주인공은 예쁘게 사랑하다가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며 오해가 쌓인다. 결국 연인은 이별을 맞이하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그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된다. 어디에선가 많이 보던 드라마다.

작 중 정다정의 "진부하고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던 글은 결국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평범함이 관객들을 주인공의 사랑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극 전반부의 아기자기한 연애 스토리는 여느 캠퍼스 커플을 보는 것 같다. 누구나 한번쯤 품어봤을 감정의 조각들, 한번쯤 겪어봤거나 상상해봤을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여기에 '마이마이'가 등장하고, PC통신 이야기가 나온다. 1990년대 감성을 입힌 아이템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있다.

관객과의 '밀당'(밀고 당기기)도 훌륭하다. 화려한 무대장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소극장 무대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며 관객을 '조련'한다. 관객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며 소통하는 기술은 일품이다. 특히 멀티 역할을 맡은 배우 이기섭의 매력이 발군이다.

뮤지컬 <아보카토>는 분명 여러 단점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오랜 쇼케이스·리딩 등을 거쳐 드디어 초연에 나선 작품이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손봐야 할 부분이 있다. 스스로를 '로맨스 판타지'로 정의하지만, '로맨스'에 비해 '판타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적고, 개연성도 없다. 별 다른 곁가지 없이 큰 줄기를 따라 흐르던 이야기는 급전직하로 마무리된다. 그 과정에서 갑작스런 '판타지'의 등장이 뜬금없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연상시키는 사고 설정도 너무 갑작스럽다. 작 중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 전철이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복선도 없이 전철 사고로 인해 남자 주인공이 사망하는 설정은 부자연스럽다. 시간의 공백에 대한 설명도 불충분하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그들의 만남과 이별이 순차적으로 차곡차곡 쌓여왔던 데 비해, 사고 후 갑자기 2010년으로 시점이 뛰어버리는 데 대한 이유가 없다. 만났던 시간만큼의 기간이리라 추측 정도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괜찮은' 드라마다. 식상하게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관객은 자신의 추억을 꺼내어보고 스토리에 투사할 계기를 갖게 된다. 가장 평범한 것이 특별할 수 있다는 역설을, 상당히 잘 표현한 작품이다.

그들이 겪는 갈등, 청춘 모두의 고민

배우 홍지희 뮤지컬 <아보카토>에서 작가지망생 정다정 역할을 맡은 배우 홍지희가 지난 7일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배우 홍지희 뮤지컬 <아보카토>에서 작가지망생 정다정 역할을 맡은 배우 홍지희가 지난 7일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 곽우신


그(유재민)와 그녀(정다정)는 1996년에 처음 서로를 만난다. 그렇게 캠퍼스 커플이 된 이들, 그러나 그들이 겪었던 현실적 어려움은 2015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이다. 1997년 IMF에 대한 묘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흔적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여자는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서 휴학을 고민한다. 힘겨운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모아야 한다. 문학을 공부한 여자는, 자신의 대학 공부를 써먹을 곳이 없다. 꿈을 펼칠 공간이 없다. 작가 등단은 요원한 일이고, 학원 강사를 전전한다. 그나마도 "영어와 수학에 밀려서" 신통치 않다. "너의 꿈이 되어줄게"라던 재민의 약속도, 당장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인문학이 위기인 시대, 대학교의 인문학과는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아 통폐합된다. 인문학 전공자들이 취업 시장에 내몰려 생존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입사의 문은 좁고, 인문학도 취업에 필요한 소양 정도로만 평가된다. 유용성의 가치로 재단된다.

"취업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취업에서 필요한 소양으로서의 인문학, 취업을 하고 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기계발을 위한 인문학을 생각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사회부총리이자 교육부장관이 지난 4일 남긴 이 한마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청춘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대한민국 청춘이 자유롭게 연애하지 못하는 현실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중 '경제 문제'는 상당히 강력한 요인이다. 정다정과 유재민의 오해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항상 제자리에서 정체된 것만 같은 여자. 먼저 꿈을 이뤄가며 한발자국 앞서 나가는 것 같은 남자. 상황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를, 그리고 오해의 소지를 만든다.

유재민의 소속사 합격에 정다정이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 채 울어버린 이유도, 정다정이 유재민에게 걸려온 전화를 오해한 것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내 친구도 그랬다. 참 보기 좋게 연애했던 캠퍼스 커플이었다. 참 오랫동안 서로를 아꼈지만, 취업이라는 현실이 둘을 갈라놨다. 각자가 처한 다른 현실은, 서로에게 오해와 불신을 쌓았다. 그리고 그 오해가 커져 결국 이별하고 말았다.

그러한 현실이, 무대 위 인물과 관객석의 우리가 모두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든 시대가 참 아프다. 어쩌면 그래서, 작품의 캐릭터와 스토리에 더 깊이 공감하고 기억 속에 예쁜 모습으로 남아있는 그때를 떠올리는지 모른다.

몇 주 전, 첫사랑이었던 그녀를 다시 만났다. 어쩌다보니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이, 내가 고백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때 그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오빠의 첫사랑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나는 순간 12년 전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잠시간 침묵했다.

"비밀"이라는 나의 대답에 그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아마 나는 영원히 그녀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달콤 씁쓸했던 그때 그 추억 그대로만 남아있을 테다. 그래서 다시, 연애하고 싶다.

뮤지컬 <아보카토>의 포스터 창작뮤지컬 <아보카토>가 2월 7일부터 15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관객을 만난다.

▲ 뮤지컬 <아보카토>의 포스터 창작뮤지컬 <아보카토>가 2월 7일부터 15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관객을 만난다. ⓒ 문화집단 플랜



덧붙이는 글 뱀다리. 아보카토와 발음이 비슷해 헷갈리는 명사들이 몇 개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열대 과일의 이름은 아보카도(Avocado)이다.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이용한 디저트는 아포가토(Affogato)다.
뮤지컬 아보카토 문화집단 플랜 황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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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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