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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제(범죄자와 일정한 친족 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 책임을 지우는 것)는 지난 1980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3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상흔은 우리 사회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안용수씨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안용수씨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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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혼란기와 6·25 등을 거치면서 가족의 사상적 문제 때문에 신원특이자로 분류된 후 사회 생활에서 여전히 각종 불이익을 당하고 있기 때문. 갑자기 찾아온 한파로 서울이 온통 꽁꽁 얼어붙은 9일 오전, 서울교육청 앞에서는 35년간 맺힌 연좌제의 한을 풀려는 듯 노신사의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서울시교육청은 강제해임 당한 베트남전 국군포로 납북자 피해자 안용수 교사를 즉각 복직시켜라!"
"부친도 동생도 해임됐다! 2월말 정년 넘기려는 지연술을 중단하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자신의 복직과 관련해 '긍정적 검토'를 약속했음에도 8개월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아무런 답변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노신사는 즉각적인 복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주인공은 지난 1980년 9월 5일 보안사와 교장, 교감 그리고 동부교육청장이 합세해 자신을 강제 해임시켰다고 주장하는 안용수(62) 전 초등학교 교사였다.

베트남 파병 장병이었던 안씨의 둘째 형은 1966년 9월경 공무수행 중 베트콩에게 포로가 된 후 북으로 납치되었다. 안씨는 해당 부대와 관련 기관들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형을 월북자로 규정했다고 규탄했다.

또 이로 인한 연좌제로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이 강제로 사직 당하는 등 각종 피해에 시달렸다면서 이제라도 서울시교육청은 자신의 복직을 허용해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절규했다.

납북된 형 '고 안학수 하사'로 인해 힘들었던 35년 

1966년 제1이동외과병원이 있던 붕따우의 성당에서 나오는 안학수 하사(오른쪽)
 1966년 제1이동외과병원이 있던 붕따우의 성당에서 나오는 안학수 하사(오른쪽)
ⓒ 안용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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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베트남 전쟁에 비전투부대원으로 파병된 후 귀국 1주일을 앞둔 1966년 9월 9일 사이공(현 호치민)에 공무 출장을 나갔다가 베트콩들에게 포로가 돼 북한으로 강제 납북된 고 안학수 하사(아래 안 하사).

안 하사는 이후 행방이 묘연하던 중 6개월여 만인 1967년 3월 27일 북한 대남방송에 출연하면서 생존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안 하사는 이날 방송에서 북한체제를 찬양하면서 자신은 의거입북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안 하사의 행위는 북한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자수한 남파 간첩 등의 진술에 의해 확인되었다. 또한 안 하사가 북한에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체포된 후 1975년 말경 평양근교 사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과는 달리 안 하사가 북한체제를 동경해 월북한 것으로 왜곡되면서, 가족들의 삶은 서슬 퍼런 연좌제에 걸려 처참하게 망가져야만 했다. 안 하사의 부친이 교장직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형제들 또한 형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안 하사의 형제들은 보안사에 수시로 강제소환 당해야만 했다. 상시적 사찰, 구타, 고문 등의 가혹행위는 물론 대학입학 제한, 취업제한, 취업 후에도 인사상 불이익 등 갖가지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안 하사의 막내 동생은 어렵게 은행에 들어갔지만 얼마 안 돼 강제 해임당했다. 이후 그는 한국의 현실에 절망해 미국으로 건너가 목회를 하고 있다. 넷째 동생 안씨는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보안사에 끌려 다니면서 고초를 겪은 후 1975년 교편을 잡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 국보위 시절 교사직을 강제로 그만둬야 했다.

부친 안영술씨는 학교에서 쫓겨난 후 임시노무원으로 강제 취업되어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2001년 9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모친 남금순씨 또한 자식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지켜보다 2001년 6월 25일 사망했다.

가슴에 품었던 자식들 때문에 한을 품고 돌아가신 부친 안영술씨가 넷째 아들 안씨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네 형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너는 꼭 교사직에 다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선친의 유언... 한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안 하사가 베트콩에게 포로가 된 후 일련의 처리 과정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1966년 9월 9일 포로가 되어 귀대할 수 없었는데도, 조사 및 일일전투상보에 의한 보고는 이행되지 않은 채 수개월 동안 정상 근무자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안 하사가 돌연 1967년 3월경 대남 방송에 나와 자신의 의거입북을 주장하고 나서자 가족들의 처지는 급전직하했다. 안 하사와 그 가족 관리는 당시 방첩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로 업무가 이관됐다. 이때부터 안 하사의 남은 가족들의 고난은 시작됐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피할 길 없는 연좌제의 굴레였다.

1973년 3월 주월 파병 이세호 사령관은 귀국보고회에서 '한국군 포로는 1명도 없다'고 보고했다. 이후 공식적으로는 월남전에서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안 하사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여기에 더해 1973년 3월27일 국무회의에서 안 하사 등 8명의 베트남전 포로가 탈영자 및 월북자로 규정되면서 명예회복의 길은 더욱 험난해졌다.

하지만 끈질긴 안 하사 가족들의 노력에 의해 하나씩 그 진실이 드러났다. 자수한 남파간첩 등에 의해 안 하사는 월북이 아닌 베트콩에게 포로가 된 후 북한으로 강제로 납북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 

이 같은 사실이 입증되면서 법원은 물론이고 정부도 가족들의 진실규명에 힘을 실어줬다. 통일부 납북피해자심의위원회는 안 하사가 납북된 지 42년 만인 지난 2009년 4월28일 자진해서 북한으로 갔다는 '월북'에서, 강제로 납치되었다는 '납북'으로 관련 기록을 정정했다.

안씨와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법원은 안 하사의 납북 사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가족들에 대해 연좌제 피해 사실을 인정했다. 법원은 '안용수와 가족들에 대해 연좌제에 의해 1967년부터 1990년대까지 정보기관의 불법행위가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정보기관 공권력에 의해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국가는 위자료로 2억5천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법원은 위자료는 인정했지만 신청금액 40억 원인 손해배상은 소멸시효를 내세워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1967년에서 1990년까지 공권력으로 갖가지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시효가 소멸되었다는 이유였다. 판결은 2012년 8월23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안씨는 2011년 12월7일 납북피해자 보상및 지원 심사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 같은 청구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은 2013년 4월25일 안씨를 납북피해자로 인정했다. 계속해서 안씨는 아버지의 유언을 되새기며 2013년 9월 서울시교육청에 복직 신청을 냈다. 그러나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교원지위회복 소송을 제기했다.

교원지위를 회복시켜달라는 청구취지에 대해 1, 2심 재판부는 안씨가 연좌제로 오랜 기간 고초를 겪은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사직을 결심할 만큼 강압이 심했다고는 볼 수 없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문제는 교사로서 안씨의 정년이 오는 2월 말까지라는 것. 이 때문에 그가 택한 마지막 수단은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었다. 안씨는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를 오는 13일까지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계속해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월 정년 넘기기 전에 복직시켜 달라"

서울시교육청 앞에 내걸린 안용수씨 복직을 촉구하는 현수막
 서울시교육청 앞에 내걸린 안용수씨 복직을 촉구하는 현수막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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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안씨는 9일 오전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연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해 7월 조희연 교육감님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교육감님이 긍정적 검토를 약속해 기다리고 있지만 8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무런 답변이 없다"고 말했다.

안씨는 또한 "2012년 9월 경 처음으로 복직 민원을 제기했을 때 교육청 관계자는 사직 당시의 문서들은 조사조차 하지 않은 채 '복직시키라'는 법원 판결문을 받아 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원생활 중 인사상의 문제였다면 판결문이 필요하겠지만, 정보기관과 상급자에 의해 연좌제 대상이라는 이유로 사직을 강요당한 점은 정무적 판단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정년이 지나면 대법원에서 '실효가 없다'며 각하시킨다는 것을 (교육청에서) 잘 알기에 계속 시간을 끌면서 정년에 근접하도록 한 것"이라면서, "2심 때도 특별한 이유가 없이 교육청 소송 대리인이 두 번이나 재판 날짜 연기를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35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또 8개월을 기다렸다. 서울시교육청이 저를 복직시켜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변호사 8인의 의견서도 제출했다. 예산이 필요하다고 해서 한 푼도 안 받겠다고도 말했다. 법으로 그게 안 되면 그 돈을 기부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저는 서울시교육청에 양보에 양보를 했다. 교육감님의 속을 알 수가 없다. 교육감님은 반성해야 한다. 제가 복직을 할 수 있도록 동지들이 힘을 실어 달라. 연좌제 때문에 35년 전 떠난 교단에 다시 서게 해달라."

한편 서울시교육청은 이같은 안씨의 복직요구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내놓았다. 교육청은 "법원의 판결에 따라서 적법한 절차를 따르겠다"면서 "교육청에서 자의적으로 할 수는 없다"고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안학수 하사, #연좌제, #안용수, #서울시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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