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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노비의 모습.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노비의 모습.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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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나라 노동자나 대개 안정적인 종신 고용을 희망하기 마련이지만 모든 노동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냥 비정규직으로 남기를 갈구한 이들도 있었다. 일부 조선 시대 노동자들이 바로 그러했다.

조선 시대 노동자를 법적 신분으로 구분하면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고용주에게 평생 동안 종속되는 노비 노동자고, 또 하나는 노비가 아닌 양인(良人, 자유인) 노동자다. 여기서, 양인 노동자의 대표적 유형은 머슴(한자로는 雇工, 고공)이었다. 노비와 주인의 관계가 '물건 대 인간'의 관계였던 데 반해, 법적으로 볼 때 머슴과 주인의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였다. 물론 법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옛날 고용주들은 자기한테 신분적으로 예속된 하인이 아니면 평생 고용하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에 대한 통제 시스템이 미비했던 탓에, 고용주들은 자신들과 신분적으로 대등한 노동자를 다루는 것을 불편해 했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에 고용주들은 머슴 같은 양인 노동자들을 기간제로 계약했다. 길어봤자 몇 년 정도 계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이런 양인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에 비유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비정규직, '양인'

이에 비해, 노비 노동자는 특정 주인에게 평생 고용됐다는 점에서는 정규직에 비유될 수 있었다. 평생 고용이 보장됐다는 점에서는 정규직 노동자였지만, 노비는 오늘날의 정규직과 달리 불리한 점이 많았다.

노비는 법적으로 주인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말하면 주인은 노비에게 봉급을 주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노비들은 봉급을 떼이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에 속한 공노비(관노)도 그런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례로, 세종 2년 11월 7일 자(양력 1420년 12월 11일 자) <세종실록>에는 '봉급을 못 받은 공노비들이 도주하는 사례가 많으니 앞으로는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처럼, 과거에는 정규직 노동자가 봉급을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노비 노동자는 법적으로도 불리했다. 조선 시대 형법전 중 하나인 <대명률직해>에 따르면, 노비가 주인이나 주인의 친척을 폭행하면 참수형에 처했다. 살해한 경우에는 참수형이 아니라 능지처참이었다.

이에 비해 주인이나 주인의 친척이 노비를 폭행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비를 살해하는 경우에도, 관청에 사전 신고만 하면 처벌을 면했다. 조선 후기에 서유영이 편찬한 실화집인 <금계필담>에 따르면, 이서구라는 사대부는 사전 신고 없이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을 피했다. 이서구가 사전 신고 없이 노비를 살해한 행위를 두고 당시의 노비 소유자들은 "젊은 사람이 번거로움을 피하고 조용히 일을 잘 처리했다"며 두고두고 칭찬했다.

평생 고용 정규직, 노비? 좋기만 했을까

이처럼 종신제 노동자인 노비는 여러모로 불리했다. 평생 한 곳에 근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봉급을 떼이거나 무자비한 폭행이나 살해를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열악했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불만을 품고 나름대로 항거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말손(末孫)'이라는 노동자다.

조선 중종 임금 때 사람인 말손은 사옹원이란 관청에 근무했다. 이곳은 왕궁에서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관청이었다. 말손은 이곳의 숙수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는 팀장급 셰프였다. 한편, 그의 신분은 자유인인 양인이었다. 평생 고용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비정규직'이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보여준 것과 달리, 실제로 궁궐에서 음식 장만을 책임진 이들은 남자 숙수들이었다. 수라간 궁녀들은 체력 상의 한계 때문에 이들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다. 그래서 말손처럼 힘 좋은 남자들이 궁궐 주방을 책임졌던 것이다.

궁궐에서는 수백 명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솥 같은 주방 용품도 크고 무거웠다. 또 하루에 보통 두 끼만 먹은 일반인들에 비해 왕족들은 훨씬 더 자주 식사를 했기 때문에, 궁궐 주방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음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숙수 일은 이만저만 힘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옹원은 노동력 확보 때문에 항상 골머리를 앓았다. 궁궐 주방을 기피하는 남자 숙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궁궐 주방에서 근무하다가도 중노동을 못 견디고 도망가는 숙수도 많았다. 그래서 숙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사옹원의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

선조 임금 때인 1605년에 제작된 <선묘조제재경수연도>라는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 숙수들. 그림 제목은 ‘선조 때 여러 재상들이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고자 벌인 파티를 묘사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남자 숙수들은 선조 임금이 이 파티를 지원하고자 파견한 사람들이다.
 선조 임금 때인 1605년에 제작된 <선묘조제재경수연도>라는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 숙수들. 그림 제목은 ‘선조 때 여러 재상들이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고자 벌인 파티를 묘사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남자 숙수들은 선조 임금이 이 파티를 지원하고자 파견한 사람들이다.
ⓒ <선묘조제재경수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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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7년 3월 16일 자(1512년 4월 2일 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오늘의 주인공인 말손도 궁궐 주방이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출근이 힘들어졌다. 당시에는 해 뜨는 시각에 근무가 시작됐기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출근을 준비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말손은 그런 것이 귀찮아졌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부터 궁궐에 출근하지 않았고, 그런 날이 5개월이나 계속됐다. 반년 가까이 무단 결근을 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런 일은 매우 흔했다. 힘들다고 도망가는 숙수가 많았기 때문에, 말손처럼 무단 결근하는 것은 어찌 보면 '귀여운 저항'이었다. 그런데 사옹원 책임자인 사옹원 제조는 특단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말손에 대한 중징계를 생각한 것이다.

주로 왕족이나 사대부 중에서 임명된 사옹원 제조들은 숙수들의 고충을 잘 몰랐다. 당시의 사옹원 제조도 그랬다. 그는 말손을 단단히 혼내줌으로써 일벌백계의 효과를 거두는 데만 치중했다. 그래서 법에도 없는 징계를 내렸다. 양인 신분인 말손을 사옹원 노비, 즉 종신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사옹원 노비가 되면 법적으로 평생 근무가 보장된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근무 조건이나 형법적인 면에서는 매우 불리했다. 사옹원에서는 일손이 항상 달렸기 때문에, 굳이 사옹원 노비가 되지 않더라도 숙수 본인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오래 근무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인 출신의 숙수가 사옹원 공노비가 되면 공연히 근무 조건이나 형법적 지위만 악화할 우려가 있었다.

무단 결근한 말손, 결국...

말손은 5개월씩 무단 결근할 정도로 배짱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사옹원 제조의 불법적 징계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는 아내를 내세워 법적 투쟁에 나섰다. 말손의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서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사옹원 제조의 징계가 불법적이고 부당하니 취소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징계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한 셈이다.

이 탄원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중종 임금이었다. 신하들은 말손에 대한 징계가 법에도 없는 것이라며 너무 과하다고 비판했다. 징계 철회를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중종의 생각은 달랐다. 징계가 위법한 것은 사실이지만 숙수들의 근무 행태를 고쳐놓으려면 이참에 본 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게 중종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중종은 말손의 아내가 제기한 탄원을 기각했다.

이로써 말손은 사옹원 노비가 되어 죽을 때까지 궁궐 주방에서 일하게 됐다. 비정규직에서 종신직으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평생 직장이 보장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평생 직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근무 조건과 법적 지위였다. 노비 노동자에게는 이것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종신직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비정규직으로 남기를 원했던 것인데, 이런 소박한 꿈마저 그에게는 이뤄지지 않았다.

말손은 평생 직장을 원치 않았고, 우리 시대 노동자들은 평생 직장을 원한다. 이 점에서 말손과 우리는 다르다. 하지만 말손은 인간다운 근무 조건과 법적 지위를 원했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는 정부의 징계에 대항했다. 이 점에서 말손과 우리는 통한다.


태그:#비정규직, #미생, #장그래, #숙수, #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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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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