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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좌도 복호선착장과 자라도를 오가는 도선 자라호가 다시 자라도로 돌아가고 있다.
 안좌도 복호선착장과 자라도를 오가는 도선 자라호가 다시 자라도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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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선장이 모는 도선(導船)은 미련 남은 인사를 하듯 반원을 그리며 뱃머리를 돌렸다. 선미가 희미해질수록 섬의 윤곽은 더욱 뚜렷해졌다. 망각과 기억의 혼재, 그 섬이 들려준 숱한 이야기 가운데 나는 무엇을 잊을 것이며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안좌도와 장산도 사이에 있는 자라도는 세 개의 섬이 하나로 합쳐진 곳이다. 1949년 염전을 개발하기 위해 간척을 했는데 이때 자라도와 증산도, 휴암도가 한 섬이 됐다. 섬의 생김새가 자라를 닮아 자라도라 했다. 재밌는 것은 한자로 표기하면서도 의미와 상관없이 소리글을 따라 '자라도'(者羅島)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한글과 한자를 함께 쓰는 문화권이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그러고 보면 자라도는 이야기가 참 많은 섬이다. 전해진 유산으로부터 풀어갈 이야기도 많고,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줄 추억의 소품도 많다. 안좌도 복호선착장에서 도선을 타고 20여 분, 해발 106m의 작고 둥그런 망화산을 향해 걷기 시작하면 시나브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상상이나 했을까... 양자가 '매국노'가 될 줄

자라도 선착장 근처에 서있는 '이호준 불망비'. 이호준은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양아버지였다.
 자라도 선착장 근처에 서있는 '이호준 불망비'. 이호준은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양아버지였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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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내를 하는 자라상을 막지 마라고 팻말을 써둔 주민들의 마음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마을 안내를 하는 자라상을 막지 마라고 팻말을 써둔 주민들의 마음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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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도 선착장에 내리면 운치 있는 비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비석엔 '이호준 불망비'라고 적혀 있다. '이호준 불망비'는 자라도(1870년), 옥도(1873년), 하의면 신의(1874년) 등 모두 세 곳에서 발견된다. 같은 논밭에 대해 이중으로 세금을 매기는 일토양세(一土兩稅)로부터 주민들을 구해준 전라도 관찰사 이호준의 은덕을 기려 공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적비의 주인공인 이호준은 누구인가. 그는 고종 즉위 당시 예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지낸 정계 거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친일 매국노'라고 참칭 당하는 이완용의 양아버지다.

고종의 절대 신임을 받으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이호준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나이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지만 후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던 그는 양자를 들이기로 한다. 그때 양자로 들인 아이가 나이 열 살의 이완용이었다. 기구한 운명은 반복되는 것인가, 이호준 역시 생부를 떠나 손이 부족한 집안의 양자로 입양돼 성장했던 인물이다.

수탈당하는 백성을 구휼한 공로로 백성들이 비석까지 세워 잊지 않고 기억하려 애썼던 인물 이호준. 그는 자신이 들인 양자가 민족의 지탄을 받는 매국노로 둔갑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라도에 선 이호준의 공적비가 다소 쓸쓸하게 보이는 까닭은 양자 이완용이 겨레에 저지른 추악한 죄 때문은 아닐까. 

'초전박살'이라는 글귀가 남긴 흔적

금이 간 벽에 흐릿하지만 여전히 살벌하게 새겨진 '초전박살' 구호.
 금이 간 벽에 흐릿하지만 여전히 살벌하게 새겨진 '초전박살' 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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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조제할 순 없지만 간단한 상비약을 팔았던 약국 지정소 간판이 그대로다.
 약을 조제할 순 없지만 간단한 상비약을 팔았던 약국 지정소 간판이 그대로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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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불망비를 지나면 자라도의 상징인 자라상이 마을 안내를 한다.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자라 상 앞에 "앞을 터주시요"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인사도 하고 기본적인 길 안내도 할 겸 자라상을 세웠는데 트럭이나 경운기가 이를 막아버리면 안되니까 이 팻말을 세웠다고 한다. 절로 미소가 번지는 흐뭇한 팻말이다.

마을 안쪽으로 느린 걸음으로 5분이나 걸었을까. 금이 간 시멘트벽에 '초전박살' 네 글자가 흐릿하게 새겨진 집 앞에 선다. 핏발 선 구호로 적대의 감정을 자극해 평온한 일상을 파괴하고, 이성을 흥분시켜 분노로 서로를 통제케 하던 병영국가의 처절한 기표.

이 시대착오적인 기표는 섬에만 남은 것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문화관광부가 우수도서로 선정했던 책의 저자를 하루아침에 '종북'으로 몰아 추방하고, 그와 함께 콘서트를 했던 이를 감옥에 가둬버리는 '초전박살'의 섬뜩함은 이 땅 어디에서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전투구호가 적힌 빈집으로부터 머지않은 곳에 약국 지정소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먼지만 진열돼 있지만 밴드며 두통약 등 조제하지 않은 약품들이 섬마을 사람들의 상처를 쓰다듬어줬을 것이다. 그렇게 버티며 살아낸 세월이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자라분교 운동장에서 망화산을 바라본다. 산봉우리에 동백 숲 울창하다. 동백꽃처럼 홀연히 바친 섬놈의 순정 속으로 석양이 진다.     

자라도로 지는 노을.
 자라도로 지는 노을.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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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안군 작은 섬, #자라도, #이완용, #종북, #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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