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 토리노>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그랜 토리노>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크리스 무니는 저서 <똑똑한 바보들 : 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이란 매우 논쟁적인 제목의 책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한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지구온난화가 실제고 인간이 유발했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백인 남성 보수주의자고, 인간이란 종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다는 진화론에 대해서도 저항한다는 것이다. 다소 과격하고 논쟁적인 그의 논지를 몇 개 추려 보면 대략 이러하다.

"보수(주의자)에게는 확실성, 안정성에 대한 욕구나 변화에 저항하는 심리가 나타난다."
"진보주의자는 공감을 중시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는 예의를 중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의 변화는 과거 옳고 좋았다고 느끼는 것을 회복하는 방향일 가능성이 크다."
"보수주의자들은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신념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논증을 한다. 다시 말해, 증거를 부정하고 신념을 따른다."

'오바마주의자'나 '민주당 지지자'에 가까운 저자의 주장을 비틀어 보면, 극으로 치달은 '꼰대' 진보주의자 역시도 보수로 회귀할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오죽했으면, 진보를 잠시나마 보수로 만드는 방법을 들며 "공포와 위협적인 상황"이라고 적시했을까. 이데올로기와 신념을 먹고 사는 이 '주의자'들 중 극적으로 '변절'한 이들의 예를 굳이 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기, 뚝심 있게 한 평생을 보수주의자의 외길을 걸은 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한 참전용사이자 공화당 지자자로 유명하다. 구조적·개인적 폭력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이면을 묘사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는 바로 올해로 85살이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지난 15일 개봉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 노장 감독이 말하는 '보수의 품격'과도 같은 영화다. 그리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히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전달한다.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던 그, 어떻게 스나이퍼가 됐나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크리스 카일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크리스 카일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아버지에게 사냥을 교육 받은 그 남자는 '진짜'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9·11 테러가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그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해병대에 자원하고, 미국 최고의 치명적인 저격수로 거듭난다. 1000일 동안 4번 참전해 공식적으로 160명(비공식 255명)의 적군을 사살한 그의 이름은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 분)이다.

이 미국산 전쟁 병기는 2009년 제대 후 외상 후 스트레스를 앓는 후배들을 위해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자서전을 집필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부문에 20주간 1위에 오르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남자의 자서전을 드라마틱한 전쟁실화로 스크린에 옮겼다.

지난 주말(16일~18일), 미국에서 흥행 대박(주말 수익 9020만 달러, 한화 약 971억 원)을 터트린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그 자체로 미국인들이 열광할 전쟁영화일지 모른다. 근래 들어 최고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명장면의 향연, 자기반영성을 갖춘 백인 전쟁영웅 그리고 그 남편이자 아버지를 걱정하는 가족의 이야기까지….

"크리스의 업적과 사적인 면을 모두 담아내는 게 정말 흥미로웠다. 영화에서는 가족의 일원이 위험한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그의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준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어떤 위험이 있는지, 그들이 치르는 희생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이 '보수주의자' 할아버지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 전쟁(과 살상)이 주는 고립감과 인간성 파괴는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전달된다. 심지어 이라크와 미국이 핸드폰으로 연결되는 현대전 아닌가. 그러나 전쟁터에서 동료들이 죽어나갈 때, 그들의 조국은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적에게 조용히 총구를 겨냥하는 스나이퍼야말로 그러한 고독감을 느끼기에 최적의 위치다. 그렇게 전쟁은 카우보이의 영혼을 망쳐 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래서 이 전쟁을 최대한 미국인의 시선에서 '종합적'으로, 예의바르게 그리려고 한다. 그래야 크리스 카일의 품위가, 보수주의의 품위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 마냥 말이다.

이 보수주의자가 보여주는 절묘한 균형 감각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그 예의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변된다. 전쟁터에 대한 무시무시한 생동감과 현실감 있는 묘사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한 병사들 개개인의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자는 취지로 수렴된다. 그간 반성적인 할리우드산 전쟁영화들이 걸어온 길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감독은 끊임없이 가족과 적의 자리를 환기 시킨다. 크리스의 아내 타야(시에나 밀러 분)야말로 아주 평범한, 참전용사를 전장으로 떠나보낸 가족을 대변한다.

여느 전쟁영화와 달리 영화 전반부부터 지속적으로 그 관계가 강조되는 아내 타야는 남편을 말려도 보고 읍소도 하며 눈물을 떨군다. 하지만 마치 연어처럼 전장으로 복귀하는 크리스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물론 제대 후 따뜻하게 환대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이 영화의 관객, 특히 미국 관객들은 전쟁터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들의 자리로 소환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 반대편엔 크리스의 맞수인 적군 무스타파가 자리한다. 크리스가 '미치도록' 잡고 싶어 하는 그 대상은 실상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저격수다. 가족과 단란한 가정을 꾸린 것도 같다. 감독은 언뜻언뜻 대사 없이 무스타파를 크리스의 그림자처럼 배치한다. 일종의 균형 감각이자 반성적인 시선을 견지하고자 한다.

누구는 이 설정을 영화적인 장치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또 누구는 지극히 미국적인 시선이라 비판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 모두를 아우르며 극을 마지막까지 성찰적으로 끌어나가는 힘이야말로 거장의 연출력일 것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말미가 바로 그런 보수주의자의 품격을 증명하는 명징한 예다.

진보·보수를 아우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균형감과 품격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 아내인 타냐가 전장터에 나간 크리스의 전화를 받고 오열하고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 아내인 타냐가 전장터에 나간 크리스의 전화를 받고 오열하고 있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카일은 제대 후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러나 후배들을 위해, 전우들을 위해 사격훈련을 돕거나 정신외상환자들을 만난다. 그러다 한 상이군인의 총을 맞고 사망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국민적인 추모행렬과 애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그 광경을 담은 실제 화면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그야말로 이 정중한 애도는 크리스의 심리를 내밀하게 쫓는 영화 전편의 궤적과 맞물려 꽤나 깊고 절절한 감정을 도출해 낸다.

그가 변화하는 계기가 9·11 테러라는 점은 실화임을 감안해도 분명 상징적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라크 전쟁의 사회적·정치적 맥락은 크게 개의치 않고 크리스 카일의 내면으로 침잠한다. 대신 그 내면의 상처와 파괴를 포함해 전쟁이 개인과 가족에게 주는 물리적·심리적 상처와 상흔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거기서 국가의 자리는 크지 않다. 신과 조국, 가족이라는 크리스 카일의 신념은 국민들 개개인이 수호해 나가는 정치적 국가보다 영토적 국가의 개념이 더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이 보수주의자가 전쟁 군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바치는 최고의 위로와 헌사였을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미군과 일본군의 시선을 동등하게 다룬 반전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2부작을 만든 바 있다.

예의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바라보기에 전쟁은 그런 것이다. 조국을 위해 나간 전쟁터에서 개인이 영혼을 파괴 당하는 지옥. 전우들이 떠난 자리에 돌아갈 가족마저 없다면 영영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드는 블랙홀. 조국을 사랑하는, 그래서 공화당을 지지하고 오바마의 낙선을 염원했던 그는 노년으로 갈수록 주어진 조건에 최선을 다하는 인간을 예의를 다해 그렸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그랜 토리노>의 숭고한 죽음이 대표적이다.

자, 현실로 한 번 빠져나와 보자. 미국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한국은 <국제시장>에 열광하는 중이다. 전자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상이군인을 상처받은 '히어로'로 애도한다면, 후자는 영화 속 시대를 통과한 이 땅의 아버지들 모두가 '영웅'이라고 설파한다. 대신 전자는, 제스처에 그쳤다는 비판이 있을지언정, 반성적·성찰적 시선이 존재한다. 후자는 휘발적인 눈물과 아버지 세대에 대한 감동어린 헌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자신의 '신념'을 텍스트로 설파하는 영화감독에게 어쩌면 보수·진보는 중요치 않을 수 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그 안에서 어떤 균형과 어떤 품위를 지켜낼 것인가는 그래서 더 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이데올로기를 넘어 전세계 관객들을 설득할 줄 아는 이 보수주의자 할아버지, 그를 '대표감독'으로 보유한 미국이 부러운 이유 되겠다. 이러한 균형과 품격이야말로 한국의 보수 혹은 진보주의자들이 경청하고 학습해야 할 덕목이 아닐까.

아메리칸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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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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