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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4년 12월 19일자로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당원이었다. 일반 당원도 아닌, 대의원이었고, 게다가 진보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의 연구위원이었던 나는 헌재의 판결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아마 대다수 당원들이 그럴 것이고, 대다수 깨어있는 시민들이 그럴 것이다. 

이 연재 글은 한 진보당 당원의 항변 글이다. 많은 법률가들이, 많은 지성인들이, 많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헌재 판결의 부당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진보당 당원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 글이 모든 당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이 해산된 진보당 당원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 기자 말

입헌주의 원칙마저 저버린 헌재 8인의 '주도세력=진보당' 논리

헌법재판관 8인은 강령 상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정당 해산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특정한 내용이 없다던 진보적 민주주의가 위헌 강령으로 둔갑한 사연은 무엇일까? 헌재 8인은 강령의 진보적 민주주의에서 특정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자 '진정한 의미'(법무부의 표현을 빌면 '숨은 목적')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당에 도입된 경위, 당 도입 과정에서의 주도자, 주도자들의 이념적 성향 및 지향점 등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사 결과 '진정한 의미'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의미 찾기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헌재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소위 '피청구인 주도세력'이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연합의 주요 구성원 및 이들과 이념적 지향점을 같이하는 당원들"로 정의된다.

판결문은 특히 '진보당 내의 각 정파 즉 경기동부연합, 부산울산연합, 광주전남연합, 일심회, 실천연대를 대표하는 15명의 인물'의 실명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헌재 8인에 논리에 따르면, 이들은 '주도세력의 주도자'라고 불릴 만하다. 이들은 진보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분당과정에서 이석기와 김재연의 제명에 반대하며, 당에 잔류한 후에 당의 주요 의사 결정을 주도한 사람들이 된다.

여기서부터 헌재의 판결은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는데, 헌재의 논의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아닌 이들 주도세력의 형성과정 및 대북자세, 활동상황, 활동경력, 이념적 지향점을 파악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예상했던 대로, 결론은 단순, 명확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의 형성과정, 대북자세 및 활동상황, 활동경력, 이념적 통일성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보면, 피청구인 주도세력의 성향은 북한을 추종하고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헌법재판소 판결문 59쪽)

즉 진보당 주도세력은 종북이기 때문에, 이들의 목적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있다는 것이고, 이들이 당에 도입했던 진보적 민주주의 역시 '북한 사회주의 체제 건설'이라는 숨은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논의는 여기에서 그치고 만다. 이들 주도세력이 어떻게 진보적 민주주의를 당 내에 도입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헌재 8인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들 주도세력이 진보당의 중앙위원 혹은 대의원들을 어떻게 포섭하고, 어떤 공작을 통해 중앙위원과 대의원들이 진보적 민주주의에 동의하게끔 했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당의 강령은 중앙위원회와 대의원대회를 통해 확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결문은 이와 관련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재판의 목적이 통합진보당의 목적과 활동의 위헌성 여부를 판정하여 진보당의 해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헌재 8인은 이들 주도세력의 이적성과 종북성에 대한 판결을 내린 후 이 결론을 바로 진보당에 대입시켜 버린 것이다. 주도세력이 종북이고, 이들이 속해 있는 단체가 이적단체이기 때문에, 진보당 역시 종북, 이적, 위헌이라는 결론이다.

헌재의 판결이 '퍼즐 맞추기'라는 비판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위헌정당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거기에 부합하는 증거와 증언들만 취사 선택해서 판결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같은 결론은 헌재 8인이 스스로 주장했던 입헌주의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헌재 8인은 스스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성'을 정당해산 심판의 중요한 기준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정치적 비판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용도로 남용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당해산심판제도는 매우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에는 자유를 우선시하는(in dubio pro libertate)' 근대 입헌주의의 원칙은 정당해산심판제도에서도 여전히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10쪽)

그러나 심판의 기준이 되었던 이같은 명백성은 심판의 판결에서 사라져 버렸다. '의심스러울 때에는 자유를 우선시하는' 기준이 아니라 '의심스러울 때에는 재판관들의 주관을 우선시하는' 원칙을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헌법 재판관 스스로가 부정한 것이다. 유일하게 소수이견을 냈던 김이수 재판관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피청구인에게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결론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사항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피청구인에게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피청구인 구성원 사이에서 공유하고 있음이 명백한 비밀 강령의 존재를 알아내거나, 피청구인의 드러난 목적, 즉 강령상의 목적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위장막에 불과하다고 볼 설득력 있고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만약 그러한 증거를 '퍼즐조각'에 비유하고자 한다면, 그 '퍼즐 조각'은 그 형태가 달리 가공되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단단한 것이어야 함은 명백하다. 은폐된 목적을 찾고자 하는 해석자의 주관에 의하여 깎이고 다듬어진 것이어서는 아니된다는 의미이다.(148~149쪽)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과도적 단계? : 헌재의 과도기론

헌재 8인은 자신들의 논리 비약임을 의식한 듯하다. 진보적 민주주의 자체를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로 동일시하지 않고, 사회주의 체제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적 체제로 해석했다. 즉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타도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라는 과도적 단계를 거쳐 북한식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헌재 8인은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집권전략보고서'와 2007년 박아무개씨의 '한국사회의 성격과 6·15 시대 변혁운동의 방향'이라는 발표문을 제시하였다.

헌재는 "민주노동당이 집권 직후 수립할 국가와 사회는 민주노동당의 궁극적인 이념과 체제를 실현하는 과정에 있는 과도기다"라는 '집권전략보고서'의 구절과 "한국변혁운동은 민족해방 민주주의변혁으로서 당면 변혁의 전취목표는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연방제 방식의 통일정부의 수립이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되고 연방제 방식의 통일정부가 수립되게 되면 민족자주화의 임무와 조국통일의 임무가 완성되게 되며, 이후 한국변혁운동은 본격적인 계급 해방과제를 제기하고 전진해 나가게 된다"는 '한국사회의 성격과 6·15 시대 변혁운동의 방향'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판결문에 명시되어 있는 '집권전략보고서'는 존재하지 않는 보고서이다. 아마도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자료집 '2017년 집권을 위하여'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헌재는 마치 이 보고서를 진보당의 공식적인 보고서로 인식하고(혹은 그렇게 보이게 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집권전략보고서'라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09년에 발간된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의 '2017년 집권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당시 중앙위원회와 당대회(대의원대회)에 보고되었으나 이 보고서의 내용이 안건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2006년부터 시작하여 1기와 2기를 거쳐 진행된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의 활동과 논의 사항을 보고한 것이다. 집권전략위원회가 작성한 내용을 중앙위원회와 당대회에서 승인하거나 인준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보고서는 '민주노동당의 보고서'가 아니라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의 보고서'였다. 따라서 위 보고서가 당의 보고서가 되기 위해서는 위 보고서를 당의 보고서로 공식 채택한 명백한 근거가 제시되어 한다. 그러나 헌재 8인은 이같은 사실은 무시하였다. 그 결과 최규엽 위원장을 필두로 10명의 사람들이 논의한 결과를 모아 놓은 이 보고서를 당의 공식 보고서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헌재 판결문은 '집권전략보고서'라고 하여 진보당이 채택한 공식 문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보고서는 집권전략위원회가 위원회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 집권전략위원회 보고서 '2017년 집권을 위하여' 표지 헌재 판결문은 '집권전략보고서'라고 하여 진보당이 채택한 공식 문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보고서는 집권전략위원회가 위원회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 장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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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2007년 박아무개씨의 '한국사회의 성격과 6·15 시대 변혁운동의 방향'이라는 글은 민주노동당과 전혀 무관하다.

이 글을 썼던 박아무개씨는 당시 아무런 당직을 맡고 있지 않았으며, 이 글 역시 민주노동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의 직함으로 발표한 것이다. 비록 이 글을 작성한 박아무개씨가 나중에 민주노동당과 진보당의 정책연구소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헌재가 제시하고 있는 위 글은 당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글이다.

김이수 재판관이 소수 의견에서 이미 밝힌 바대로 "당시 박**은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였고, 어떤 당직도 맡고 있지 않은 평당원으로서 당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므로 박**의 말을 곧 민주노동당의 견해와 같이 평가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헌재 8인은 꿰어 맞추기식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로 안정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를 위한 과도기 정부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설정한 것으로 판단된다.(76쪽)

헌재의 꿰어맞추기식 과도기론은 진보당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연동되면서 전혀 새로운 논의로 이어지게 되는데, 헌재 8인은 통합진보당이 제시한 연방제 통일 역시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과도적 체제로 해석한다.

지구상에 서로 다른 체제와 제도가 공존하는 연방제 국가는 없다는 현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다른 체제와 제도가 공존하는 연방제가 장기간 존속한다는 것은 연방국가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민족분단을 극복하는 통일방안으로서 ' l 국가 2 체제 2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통일방안은 종국적으로는 체제통합에 기초한 통일국가의 모습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78쪽)

그런데 진보당이 북한 사회주의 체제로 가기 위한 과도적 조치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 보니 헌재 판결문은 뜻하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진보적 민주주의도, 연방제 통일도 모두 사회주의 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과도적 조치라는 헌법 재판관 8인의 논리에 따른다면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방제 통일 사회'는 상당히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 관계를 입증하려 했던 것일까. 헌재 8인은 아래와 같은 주장을 한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이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이후 추진할 통일국가의 모습은 과도기 단계인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거친 사회주의 체제인 것으로 판단된다. (80쪽)

이같은 헌재 8인의 주장에 의하면 진보당은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 진보적 민주주의 – 사회주의'라는 '3단계 혁명론'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같은 3단계 혁명론에 따르면 헌재가 강조하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한국 사회에 가하는 임박한 위협'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헌재 8인의 논리에 따르면 낮은 단계 연방제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숨은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 연방제가 수립되지 않으면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 역시 수립될 수 없기 때문에, 진보적 민주주의보다 더 임박한 위협 요소은 '낮은 단계 연방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헌재의 판결문은 이같은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임박한 위협'이라고 강조해 왔다. 어느 순간 '임박한 위협'이 뒤바뀌어 버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꼴이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통일뉴스에 동시 게재합니다.



태그:#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진보적 민주주의, #헌법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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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글로벌피스연구원 특임교수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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