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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마일 드라이브

자동차로 미국을 횡단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 중의 하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해서 태평양을 품은 퍼시픽코스트 하이웨이(Pacific oast Highways)를 달려 말리부 해변에 닿으면, 수많은 서퍼들 중에 하나가 될 것만 같았다. 언덕 아래 즐비한 할리우드 스타의 저택 대문에 기대면 마치 영화배우라도 된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눈부신 태평양을 뒤로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시 차에 오른다. 이번에는 푸른 숲에서 컨트리 음악이 흘러나오는 내륙을 가로질러 시카고까지 가는 루트66(Route 66)을 달린다. 옛 노랫말 속에 나오는 미국 풍경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라도 달성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직전, 어떻게든 일행을 구해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겨우 1시간 거리에 떨어진 몬테레이(Monterey)의 17마일 드라이브(17 mile drive)를 달리기로 한 것은 어찌보면 궁여지책이었다. 겨우 27km에 불과한 그 길을 달린다고 해서 이룬 바 없는 내 여행이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마저도 않으면 두 번 다시 캘리포니아의 고속도로를 밟을 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시야를 가득 메운 울창한 숲 너머로 하늘과 맞닿은 태평양 바다가 보인다.
▲ 17마일 드라이브의 입구 - 시야를 가득 메운 울창한 숲 너머로 하늘과 맞닿은 태평양 바다가 보인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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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과도 같은 샌프란시스코의 도심 교통 체증을 뚫고 외곽으로 나서니 그제야 높고 낮은 구릉이며 푸른 숲, 쭉 뻗은 도로가 펼쳐졌다. 17마일 드라이브의 시작은 예상과는 달리 울창한 숲이었던 것이다.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시원하게 펼쳐진 태평양 해안을 기대한 것은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땅에서 자라난 나무들이라 그런지 규모부터가 남다른 17마일 드라이브의 시원한 녹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력이 좋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군데군데 설치된 도로표지판에는 전망을 위한 뷰포인트를 표시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어디에서든 눈이 호강한다. 한참 자리를 찾다 '허클베리 힐'(Huckleberry Hill) 이라고 적힌 표지판 아래에서 바라본 풍경너머에서 마침내 하늘과 연결된 듯한 태평양 바다가 보였다.

여행과 이별하기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셈

 - 17마일 드라이브 중간에 볼 수 있는 태평양 해변. 근처에 타이거 우즈가 가장 사랑한 필드였던 페블비치 골프장과 화려한 별장이 해안절벽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 페블비치(Pebble beach) - 17마일 드라이브 중간에 볼 수 있는 태평양 해변. 근처에 타이거 우즈가 가장 사랑한 필드였던 페블비치 골프장과 화려한 별장이 해안절벽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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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벗어나 바다가 있는 뻥 뚫린 공간으로 들어서니 차를 날려버릴 듯한 강풍이 불었다.  닫힌 창문 밖으로 쉬지 않고 휘몰아 치던 바람은 겨우 자리잡았을 나무를 날려버릴 듯 했다. 그 때문인지 아무도 없는 해안가에는 빈 의자 위로는 밀가루처럼 보드라운 모래가 날릴 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한적한 겨울의 빛을 머금은 태평양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이 바다 너머 저곳에 내가 돌아가야 할 고국이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나는 여행과 이별하기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 해변을 따라 달리다 보면 볼 수 있는 외톨이 사이프러스. 이곳의 바다는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하다.
▲ 외로운 사이프러스 - 해변을 따라 달리다 보면 볼 수 있는 외톨이 사이프러스. 이곳의 바다는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하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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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몰아치는 파도마저 바람소리에 파묻히는 그곳을 따라 계속해서 이어진 해안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줄을 지었다. 태평양 위로 뜬 태양빛을 한껏 받은 그곳에는 유난히 홀로 떨어진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외로운 사이프러스'(Lone Cypress) 라고 불렀다. 뿌리가 굳게 자리잡기 어려워 보이는 그곳에서 버티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이 이름을 붙인 사람도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도 무언가와 이별을 하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별이라는 것이, 그만둔다고 버릴 수 있는 마음인가. 그만둔다고 하는 순간 멀어져도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이지 않은가. 뱃속을 울리는 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점점 가늘어지는 햇볕에라도 의지해 그 자리를 계속 멤돌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영화에서처럼 내일 아침이 7개월 전, 여행을 시작했을 때 케이프타운에서 바닷가를 달렸던 그 첫날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트윈힐즈의 야경

높은 곳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일은 나에게는 마약 같은 것이어서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 도시의 진면목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 흔적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17마일 드라이브에서 돌아오자마자 샌프란시스코의 트윈힐즈(Twin hills)에 올랐다. 산을 둘러싼 나선방향의 도로를 빙글빙글 돌아 오르는 동안 묘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일이면 오를 귀국행 비행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처럼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고개를 오르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 트윈힐즈에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통 빨갛게 빛난다.
▲ 샌프란시스코의 야경 - 트윈힐즈에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통 빨갛게 빛난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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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하면서 다른 것에 집중한 탓인지 이미 밤이 깊었다는 생각도 잊고 있었는데, 막상 트윈힐즈에 오르고 보니 어느새 떠오른 달빛이 도시의 바닷가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불이라도 번진 것처럼 달빛을 따라 줄지은 빛의 행렬을 눈으로 좇다가 하늘 한가운데에 걸친 달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달은 내 마음을 교묘히 비추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돌아가야만 하고 돌아가서도 돌아왔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들킬 사이도 없이 인생의 속도를 내야 할 것이고,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얼마나 천박하게 포장해야할까. 여행의 마지막 날 밤, 달이 뜬 언덕에는 꽃이 피는 봄도 사랑의 여름도 아닌, 빈 마당을 휘돌아나오는 시린 겨울만이 남아 있었다.

여행과 이별

한국으로 돌아오던 그날은 여러모로 놀라운 날이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공항에 무려 네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리고는 쭉 뻗은 활주로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그저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구내 방송에 발걸음이 바빠진 사람들의 움직임에 숨어들어 아무 비행기나 타고 어디론가로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 현실과 공상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면서 흥분한 나머지 몸이 떨리기도 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내가 왜 그렇게 흔한 모습을 무려 세시간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저 특이한 아이일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이 끝도 없이 펼쳐진 모습이 지구상 그 어디보다 아름다웠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이 끝도 없이 펼쳐진 모습이 지구상 그 어디보다 아름다웠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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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고도 한 시간 전에 겨우 체크인을 하니, 통로 쪽으로 지정했던 좌석이 창가로 바뀌어 있었다. 요청을 할만도한데 어쩐 일인지 나는 군말 없이 티켓을 받아 들었다. 도대체 몇 대의 비행기가 떠나는 것을 봤는지, 이미 한 차례 비행을 마친 기분이었지만, 막상 좌석에 앉고 나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한 행동이라고는 그저 창 밖을 보거나 의자에 부착된 스크린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온통 구름으로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창 밖의 풍경은 몇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으로 바뀌었다. 지난 7개월간 내가 방문한 어떤 곳에도 그런 풍경은 없었다. 갑자기 내 좌석을 변경한 카운터 직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7개월, 24개국.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프리카 원숭이에게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기도 하고, 10명이 넘는 흑인들과 밤새 술도 마시고, 3박 4일간 죽음의 혹한기 트레킹 끝에 어느 게이에게 키스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자 복잡한 기분이 계속된다.

내 인생의 꿈이었던 세계 일주를 서른 두 살에 해냈다고 생각하니 후련하기도 하지만, 아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들었고, 마침내 겨울의 한반도 모습이 창 밖으로 비칠 때 쯤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구에게나 지울 수 없는 사진이 한 장쯤 있다고 생각한다. 그 여행의 마지막 날, 비행기가 인천 상공을 날면서 찍었던 이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다.
 누구에게나 지울 수 없는 사진이 한 장쯤 있다고 생각한다. 그 여행의 마지막 날, 비행기가 인천 상공을 날면서 찍었던 이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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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총각. 한국에 오랜만에 왔나봐?"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한국인 할머니임을 알아챈 것도 그때였다. 그래. 그 복잡미묘한 기분은 그리움이었나 보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자랐던 곳,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대한 그리움. 여행을 떠날 때 인생 2막의 시작이라고 했지만, 지금도 내 인생은 2막이다. 여행과 인생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니까. 세계일주가 끝나던 날은, 스무 시간이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뜬눈으로 지냈던 유별한 하루였다.

(77회는 [사표쓰고떠난세계일주]의 마지막 회인 '세계일주 그 후의 이야기' 입니다.)

간략여행정보
북쪽의 몬테레이(Monteray), 남쪽의 캐멀(Carmel) 사이에 위치한 몬테레이 해안의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삼나무 숲 사이로 일주하는 도로가 바로 '17마일 드라이브'다. 이름처럼 총 길이 17마일(약 27km)에 달하며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 로드트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드라이브 코스며 타이거 우즈가 가장 사랑했다는 골프장인 페블 비치 골프장에서는 파랗게 빛나는 바다와 어우러진 그린 필드를 느낄 수 있다.

드라이브 코스로는 짧지만 입구에서 주는 안내지도를 따라 각종 전망대에 들리면서 주변 경관을 감상하다 보면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입장료는 차 1대당 8달러 정도이며(2013년 기준), 저녁 7시까지만 통행이 가능하다.



태그:#17마일드라이브, #트윈힐즈야경, #샌프란시스코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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