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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청산리전적기념비(1999. 8. 제1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청산리전적기념비(1999. 8. 제1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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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만행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서북 간도를 비롯한 동삼성,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여러 독립군단이 활발한 항일운동을 벌이게 되자, 이를 저지하고 토벌하고자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 전투경찰을 남북 만주 각지에 소속한 영사관에 대거 투입하여 남의 나라(중국) 주권까지도 무시한 채, 우리 독립군과 항일단체 간부들을 검거 색출하여 무차별 사살했다.

일제는 중국 관헌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그들과 함께 '중·일 합동 수색'이란 이름으로 우리 독립군에게 무차별 탄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행히 중국 관헌 중에는 우리 독립군을 동정하거나 지지하는 인물도 상당수 있었기에 일제의 간교한 토벌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그러자 일제는 자기네 군경을 직접 간도에 투입하여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발본색원하려는 대규모 토벌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우리 독립군에 큰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장차 만주 침략 교두보로 삼으려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노렸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뒤, 마침내 1920년 8월에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여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한 일본군 제19사단을 중심으로 대규모 병력을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다.

하지만 간도 출병에 따른 국제적 비난과 그들의 불법성을 은폐할 적당한 구실과 명분이 없었다. 그러자 일제는 그해 10월 이른바 '훈춘(琿春)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훈춘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동부에 위치하는 도시로 서쪽은 도문시, 북쪽은 왕청현, 동쪽은 러시아, 서남쪽은 우리나라와 잇닿은 국경도시다. 룡정의 3·13 만세운동에 이어 1919년 3월 20일 훈춘에서도 우리 동포들이 대대적인 만세시위 운동을 일으킨 항일의 거점도시이기도 하다.

오늘의 훈춘
 오늘의 훈춘
ⓒ 김태국(연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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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사건

훈춘사건은 일제가 사전에 치밀하게 공작했다. 일제는 장강호(長江好)라는 중국 마적 두목을 매수하여 무기를 빌려준 뒤, 그들에게 1920년 10월 2일 새벽에 훈춘성을 기습 공격케 했다. 400여 명의 마적단은 중국군 70명과 조선족 7명을 살해하고, 일본영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 부녀자 9명도 살해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삼아 비상 대기상태에 있던 그들 동지대 토벌대 병력을 사건 당일 곧장 간도지역에 투입했다. 이들은 중국 당국과도 사전 교섭이나 연락도 없었다. 일본군의 작전 주목적은 조선의 독립군을 완전히 뿌리 뽑는 데 있었다. 이는 그들의 작전훈령에서 이를 명시한 대목이 입증하고 있다.

"조선 밖으로부터 무력 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 우리 독립군을 말함)에 대하여는 이를 섬멸시켜서 타격을 가한다."
- 김정주 편 <間島出兵史 上> 조선통치사료 4~5쪽

이러한 일제의 작전을 미리 감지한 우리 독립군단은 중국 측과 타협이 되어 일제와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나섰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백두산 밀림지대였다. 이곳은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 국내 진공작전을 펼 수 있는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아울러 험준한 산세에다 삼림이 울창한 천연 요새지로 우리 독립군이 은폐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우리 독립군이 백두산 밀림지대로 진군하는 도중, 1920년 10월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과 조우하여 청산리, 어랑촌 일대에서 1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청산리전투'는 이 일대의 여러 차례 전투를 합하여 일컫는 것으로, 백운평(白雲坪)전투·천수평(泉水坪)전투·어랑촌(漁郞村)전투·완루구(完樓溝)전투·고동하(古洞河)전투 등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있었던 우리 독립군과 일본 토별대간 10여 차례의 전투를 모두 일컫는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이 청산리 독립전쟁은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26일까지 천수평·어랑촌·완루구·고동하 등지에서 10여 차례의 크고작은 전투를 벌여 우리 독립군이 모두 승리한 참으로 통쾌한 전쟁이었다.

청산리전적기념비(2004. 5.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청산리전적기념비(2004. 5.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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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평전투

백운평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대한군정서군(大韓軍政署軍, 총재 徐一, 부총재 玄天默, 참모부장 李章寧, 사령관 金佐鎭, 교수부장 羅仲昭, 교관 李範奭 등)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지휘하여 치른 전투로 청산리대첩의 그 실마리를 열었다. 그해 10월 20일,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야마다(山田)연대의 주력이 화룡현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온다는 첩보를 현지 동포로부터 들었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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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사령관은 이 정보를 듣자마자 백운평 일대의 고지마다 독립군을 전투편제로 이중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거기에서 기다렸다.

백운평 전적지 일대는 백운평 계곡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우뚝 솟은 곳으로 오솔길이 나 있기에 일본군 주력 부대가 이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21일 아침 9시 무렵, 야스가와(安川) 소좌가 인솔하는 일본군 야마다 연대 전위부대는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줄은 전혀 낌새를 채지 못하고 이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이때를 기다리던 600여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이 10여 보 앞까지 이르자 김좌진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가 시작된 지 30여 분만에 우리 독립군은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일본군 전위부대를 거의 섬멸시켰다. 전위부대에 이어 야마다 연대 주력부대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기관총과 포를 앞세우고 돌격해 왔다. 하지만 이는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꼴로 지형에서 우위를 차지한 독립군의 방어에 일본군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청산리 일대의 산과 계곡들(1999. 8.)
 청산리 일대의 산과 계곡들(1999. 8.)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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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평전투

이범석 장군, 천수평전투에서 일본군 기병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범석 장군, 천수평전투에서 일본군 기병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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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평 전투를 치른 직후 밤새 이동 중이던 대한군정서군 독립군은 1920년 10월 22일 꼭두새벽인 2시 30분 무렵에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인근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를 들은 우리 독립군은 곧장 강행군을 계속하여 천수평에 이르렀다. 그때가 5시 30분,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으로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120여 명은 우리 독립군이 접근해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 야영지를 완전 포위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일본군은 모두 전의를 잃고 허둥대기만 했다.

이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중에서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전멸시켰다고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만루구전투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 홍범도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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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조선 독립군 토벌대인 동지대는 우리 독립군이 백운평전투 직후 갑산촌으로 이동하는 때에 그들 주력을 둘로 나눴다.

그 가운데 한 부대를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초멸하기 위하여 이도구에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의 두 길을 따라 완루구에 주둔 중인 홍범도 부대로 포위망을 좁혀 왔다. 이에 홍범도 장군은 예정된 저지선에서 그들을 맞아 전투를 개시하는 한편, 예비대에게 우회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케 했다.

북완루구로 진격하던 토벌대는 홍범도 부대의 이러한 전략을 모른 채 홍범도 부대의 예비대가 빠져나간 자리에 진입한 일본군 토벌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자기 부대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한쪽에서는 독립군으로부터,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네 토벌대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이들 동지대 토벌대는 홍범도 부대의 교묘한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자멸전(自滅戰)' 을 벌였다.

어랑촌전투 

어랑촌전투는, 1920년 10월 22일 아침부터 이 마을을 중심으로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이날 어랑촌전투에는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최대의 전력을 투입하였다. 독립군 측은 백운평·천수평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둔 대한군정서 600여 명과 완루구전투에서 승전한 뒤 이곳으로 이동해 온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부대 1500여 명이 총동원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은 동지대(東支隊) 소속의 보병·기병·포병 등 주력 5000여 명이 참전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견주어 병력과 화력 면에서 월등히 우세했다. 그럼에도 투철한 항일 의지로 무장한 우리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우리 독립군이 상대를 얕잡아 보며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고지에서 내려다보며 조준사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 기병대는 천수평 서쪽 고지를 따라 독립군의 측면 공격을 시도하였으며, 포병과 보병은 독립군 진영을 정면에서 맹렬하게 공격해 왔다.

상오 9시부터 다시 시작된 이 날의 일본군 공세는 해가 질 때까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하지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독립군은 일본군 공세를 적절히 차단하고, 신출귀몰한 게릴라 전술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오늘의 어랑촌 모습(2004. 5.)
 오늘의 어랑촌 모습(2004.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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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청산리전투에 포함된 전투는 23일 맹개골전투, 24일의 서구전투, 24~25일의 천보산전투, 25~26일의 고동하전투 등이 있다. 이 청산리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과 같은 불세출의 용장들의 전투력 때문이었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이들 전투지 인근에서 우리 독립군에게 밥을 지어주고, 군복을 만들어주고, 목숨을 걸고 일본군의 이동 정보를 알려준 우리 흰옷 입은 동포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오동·청산리대첩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금자탑이다.   

이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 장군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일본군 전상자는 1,000여 명으로 추산하였고,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일본군 사상자가 120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그:#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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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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