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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여사 출판기념식 때 내외분과 작별인사(2008. 11. 11. 63빌딩 국제회의장)
 이희호 여사 출판기념식 때 내외분과 작별인사(2008. 11. 11. 63빌딩 국제회의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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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주

오래 전에 한 사주쟁이가 내 사주를 보고 풀이했다.

"당신은 동짓달 닭 띠로 늙도록 바쁘게 살겠으며, 큰돈을 벌지 못하나 말년까지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살 팔잡니다."

그때는 지나가는 말로 들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분의 말이 맞았다. 정말 나는 평생 바쁘게 살았다. 고교시절부터 돈을 벌며 학교에 다녔고, 대학시절에는 학훈단 훈련에, 교직이수에, 거기에 아르바이트까지 하였으니 대학생활도 고3 수험생 못지않게 바쁘게 지냈다.

교직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창작생활을 계속했는데, 고3 진학반 담임을 하면서도 주경야독으로 밤이나 주말에는 장편소설을 집필하여 오십견을 자초하기도 했다. 퇴직 후에도 강원 산골에서 얼치기 농사꾼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카메라를 메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곳곳을 쏘다니며 취재하여 기사를 송고한 뒤 그것을 모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세 차례 가서 한국전쟁 사진 2천여 매를 입수해 와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한국전쟁 사진집도 세 권이나 펴냈다. 그래서 그동안 펴낸 책이 서른 권이 넘는다.

나는 이즈음도 매우 바쁘게 지내고 있다. 지난 10월 6일부터 주2회씩 '박도실록소설' <들꽃>을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이다. 다른 때 연재는 초고를 쓴 뒤 그것을 바탕으로 연재했는데, 이번은 초고도 없이 매회 그때그때 날짜에 쫓기며 집필하기에 늘 참고문헌을 뒤지며 집필하느라 계속 긴장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즈음은 지난해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장편소설 <어떤 약속>을 대폭 손을 보아 <약속>이라고 개제하여, 한 출판사에서 내년 초에 출판할 예정이기에 마지막 교정으로 거기에도 혼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쉬고 싶거나 힘에 부칠 때는 산보를 한 뒤 대중목욕탕에 가서 온탕에 몸을 담근다. 그러면 피로가 달아나기 마련이다. 오늘도 오전 작업을 부지런히 마치고 산보 겸 목욕탕을 가는 길에 우편함을 열자, 성탄카드 한 장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겉봉투를 보자 이희호 여사가 보낸 것으로, 그분은 해마다 이맘 때면 빠트리지 않고 꼭 보내주셨다.

 이희호 여사가 보내준 연하장.
 이희호 여사가 보내준 연하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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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카드

사실 지난날은 연말이면 날마다 우편함에 성탄카드와 연하장으로 가득 찼다. 내가 교직에서 물러나고 강원도 산골로 내려오자 그 숫자가 차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즈음은 SNS의 발달로 성탄이나 연하 인사가 메일이나 문자로 대체되고, 또 사람 관계란 세월이 가면 자연히 멀어지는 게 인지상정이기에 나는 조금도 서운해 한 적이 없었다.

 청와대 시절에 이희호 여사가 보낸 연하장 겉봉투
 청와대 시절에 이희호 여사가 보낸 연하장 겉봉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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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희호 여사로부터 성탄카드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그 분이 청와대로 들어간 1998년부터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그제야 삶의 여유를 찾으셨나 보다. 그 뒤 내 집 주소가 서너 번 바꿔도 매해 빠트리지 않고 꼭 새주소로 보내주셨다.

이즈음에 보내주신 성탄카드의 겉봉 주소나 카드 속의 서명은 모두 인쇄된 것으로, 아마도 비서들이 수고했을 것이다. 올해 93세로 당신조차 가누기도 힘들텐데 어찌 친필로 다 보내겠는가. 하지만 그분이 청와대 영부인 시절에 나에게 보낸 카드 겉봉은 항상 당신 친필로 써서 보냈다.

당신은 나에게 책을 주실 때도 남에게 대필시키지 않고 직접 서명하여 우편으로 보냈으며 출판기념 때도 초대하여 전 현직 총리나 장관을 제치고 내 손을 먼저 잡아주셨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행여 독자 가운데 나와 그분 아들과 무슨 특별한 관계나, 혹 은밀한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제나 이제나 훈장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분 역시 정치인의 아내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신 걸로 알고 있다. 피차 그랬기 때문에 오늘까지 성탄카드가 내 집에 배달되었을 것이다.
(관련기사 :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남북 정치지도자들이 백성에게 사과해야

나는 오늘 온탕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어떻게 이번 성탄카드에 대한 답을 뭘로 할까 잠시 생각했다. 지난해는 내가 살았던 안흥찐빵을 택배로 보낸 걸로 답을 했는데 올해는?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이희호 여사가 내년 봄에 북한을 방문한다는 보도가 떠올랐다. 그래서 가시는 길에 격려의 말씀과 아울러 부탁말씀을 드리고 싶다.

내년 2015년은 해방된 지 70주년이요, 조국분단 70주년이기도 하다. 한 혈육이 생가지 찢기 듯, 타의에 의해 남북으로 헤어진 채 70년이 지나도록 서로 만나지 못하고 여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산다는 것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짐승보다 못한 야만의 짓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동안 남북 정치지도자들은 무릎을 꿇고 백성들에게 사죄해도 부족하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70년 전이나, 50년, 30년 전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이 동족을 헐뜯거나 비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남과 북은 타의에 의해 강제로 이혼한 부부와 같다. 이 부부가 다시 합치려면 서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상대의 잘못을 감싸며,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모든 고난을 감수하려고 할 때 재결합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잘못은 조금도 인정치 않고, 서로 상대방의 잘못만 침소봉대한다면 그 부부는 영원히 재결합할수 없을 것이며, 남과 북을 가른 철조망은 영원히 거둬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강대국 특히 세계 무기업자들이 노리는 꼼수에 어리석은 남북의 백성들이 계속 놀아나는 꼴일 것이다. 우선 남북 화해로 서로 군사비만 대폭 줄인다면, 공무원 연금도, 무상급식문제도, 노령연금지급문제도, 대학생 반값 등록금 문제도 점차 개선될 것이며, 북한의 기아문제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정말 눈에 훤히 보이는 큰길을 두고, 우리는 못난 겨레로 계속 오솔길에서 강자들의 꼭두각시로 서로 으르렁거릴 것인가.

신은미씨의 북한 여행기가 <오마이뉴스>에 연재될 때 나는 정독한 독자였다. 그 까닭은 내가 2005년 7월 20일부터 25일까지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참석한데다가 마침 소설 <어떤 약속> 중에 이산가족의 상봉 대목이 있었기에 이를 참고하고자, 특별히 북한말을 골똘히 공부하기 위해 그 여행기를 꼴똘히 읽었다. 사실 나도 2005년 7월 27일부터 10월 4일까지 23회에 걸쳐 '내 조국 북녘산하를 가다'라는 제목으로 북한 여행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바가 있었다.

신은미씨는 나보다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데다가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북한 구석구석을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그 현장감을 잘 전달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겨레, 한 동포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국의 화해와 앞날의 통일을 위해 끝내 참았던 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이 그것까지 쓰지 않았다고 그를 종북으로 모는 행위는 같은 겨레의 독자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판무식장이 시정잡배들이나 탈북자들이 쌍욕을 하고 흥분하는 것은 그나마 이해가 되나 정치인, 언론인 등 지식인조차도 그들과 함께 부화뇌동하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는 반이성적 행위다. 언젠가 조국 통일 후 오늘 그대들의 모습을 그대 후손이 영상이나 기록으로 본다면 얼마나 못난 조상을 두었다고 부끄러워하겠는가. 

 필자의 방북 때 안내원과 함께(평양, 2005. 7.)
 필자의 방북 때 안내원과 함께(평양, 2005.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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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말씀

이희호 여사님! 고령에 몸도 불편하신데 오는 봄에 나라와 겨레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북행하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이번 이희호 여사님의 북한 방문이 1948년 백범 선생의 북행처럼 장엄하게 느껴집니다. 다음은 백범 선생이 1948년 4월15일 경교장에서 남북연석회의의 한독당 대표 환송연에서 출입기자단에게 한 말씀입니다.

"나는 남조선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일생을 바쳐서 오로지 자기 동족을 구하고 국가를 사랑한다는 내가, 몇 해 남지 않은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기 위하여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동포의 지옥행을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1948. 4. 17. <자유신문>

다음은 1948년 4월 19일 평양에 도착한 백범 선생이 남북동포에게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입니다.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분단하는 외국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1948. 4. 22. <조선일보>

휴전선을 넘어 북녘에 가시거든 그곳 아이들 많이 사랑해 주시고, 그곳 사람들에게 '남녘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씀 꼭 전해 주십시오. 이희호 여사님이라도 나서서 어른으로 이 겨레의 불행을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씀 많사오나 이점전심 전달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부디 먼 길 잘 다녀오시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부디 옥체 보존, 건강하십시오.
2014. 12. 24. 원주에서 박도 올림

 청와대 재임당시의 연하장
 청와대 재임당시의 연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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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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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