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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47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정권에서 만든 최대 조작간첩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47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정권에서 만든 최대 조작간첩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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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의 대표적인 조작간첩사건인 '울릉도간첩단사건' 피해자가 40년 만에 결백하다는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받았다.

11일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이성희 전 전북대학교 교수의 재심에서 검사의 상고를 기각했다. 울릉도간첩단사건 재심 첫 무죄 확정판결이다.

이에 따라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무죄 확정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전 교수는 1974년 2월 3일 갑작스레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갔다. 그는 영장 없이 체포돼 수십 일 동안 갇힌 채 조사받았다. 수사관들은 '간첩혐의를 자백하라'며 뺨을 때려 모욕감을 줬고, 잠도 재우지 않았다. 이 전 교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 조사에서 "수사관들이 각목으로 온몸을 1시간 정도 때려서 정신이 반쯤 나갔고, 온몸은 피와 내복이 엉겨붙은 상태에서 조서를 작성했다, 구타당하고 조서를 작성하기를 반복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법원은 그가 허위자백한 내용을 모두 증거로 인정했다. 1심 판결은 사형, 2심은 무기징역이었다. 이 판결이 확정됐고, 이 전 교수는 17년간 옥살이 끝에야 풀려났다.

울릉도간첩단사건의 피해자는 이 전 교수를 포함해 울릉도 주민과 일본에서 공부했던 전라북도 주민 47명이다. 그 중 3명은 사형에까지 처해졌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발표한 '간첩단'에 유명인사가 없었던 데다, 곧바로 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이 터지면서 사람들에게 곧 잊혔다. 피해자들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 전 교수는 이들 가운데 처음으로 진실화해위 문을 두드렸다. 그는 2006년 진실규명을 신청, 2010년 6월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는 재심사유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받아냈다. 간첩 조작까지 밝혀내지 못한 '절반의 진실규명'이었지만, 그는 곧 법정싸움을 시작했다. 2012년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김동오 부장판사)는 그의 간첩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그가 일본유학시절 호기심으로 북한에 다녀온 부분은 당시 사회상을 고려할 때 사회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었다며 일반잠입탈출죄가 성립한다고 했다.

그가 싸우기 시작하자 다른 피해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미 재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용희씨 등 20명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박인조씨 등 5명은 지난 10월 24일에야 재심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검사의 항소로 이들의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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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울릉도간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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