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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
 신용카드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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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미생> 15회를 보면 오 차장의 테스트로 장그래와 장백기가 물건을 파는 장면이 나온다. 그 둘이 지인들의 회사에 찾아가 부탁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 나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나도 영락없이 똑같은 실수를 했기에.

사회초년생 시절 나는 성공하고 싶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보고 나는 왠지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문득 빠른 성공을 위해선 영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장그래처럼 대기업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영업팀으로. 게다가 계약직. 잘하면 정규직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희망까지 품고서.

그렇게 나는 S 대기업 금융영업팀에 입사했다. 그 당시 금융업 쪽이 '떡고물'이 많다는 걸 어디서 주워 듣고 달려들었다. 대기업이라 그런지 서류전형에 몇 번의 면접, 합숙교육까지 받게 되었다. 그렇게 힘겹게 입사한 나에게 담당 지점장은 나와 같이 들어온 신입들에게 테스트를 시작했다. 아직 경험도 없으니 영업 경험도 할 겸 신용카드를 한 번 만들어가지고 와보라고. 오 차장의 테스트처럼 나의 테스트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용카드 한 10장 정도 만들면 될 거야. 나도 그 정도 한 것 같아. 편하게 해."

먼저 들어온 영업 잘한다는 선배는 나를 안심 시켰다. 귀가 얇던 나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단 1주일 만에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나와 같이 들어온 동기가 둘째 날인가에 신용카드 50여 장을 만들어 왔다. 그 주 마지막쯤 명문대를 나온 또 다른 입사 동기가 60여 장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왔다. 지점의 사무실 벽에 영업사원들의 실적표가 있었다. 그중에 나는 꼴찌. 1장도 못 만들었다.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눈치가 내 등 뒤로 꽂혔다. 그저 웃기만 해도 내 얘기를 하는 듯했다. 늘 회사를 탈출하는 꿈을 꾸는 직장인처럼, 그 순간 순간 나는 간절히 탈출을 꿈꿨다. 그런 상황에 눌려, '절대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나의 결심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런저런 노력을 하다 안 돼 나도 영락없이 장백기처럼 주변 사람을 찾았다. <미생>의 복사본처럼 장백기가 겪은 상황을 마주하기도 했고, '이런 걸로 연락하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다. 순간 '내가 무슨 마약상이나 다단계 직원인가'란 착각도 들었다. 장그래가 한국기원을 나오면서 무너진 어깨를 간신히 지지하며 내려오던 모습은 당시의 자존감 없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대기업 로고를 가슴에 다는 꿈... 나는 괴물이 돼 있었다

무능해 보이는 나. 정말 사표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자꾸 오기가 생겼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독을 품고 닥치는 대로 뛰었다. 정말 간절하고 절박하게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나에게 절박함은 매순간이었다. 인정 받아 정규직이 되려고 늘 절박한 장그래처럼. 나도 그 수치스런 상황을 벗어나서 인정받고 싶었다.

생각지도 않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에겐 기적과도 같은 20여 장의 신용카드를 간신히 발급받아 왔다. 지금 당장 높은 위치에 있어 잘 나간다고 해도 친구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이때 깨달았다. 반대로 별 볼일 없고 빈곤한 처지여도 나를 위해 뛰어주는 지인들도 있다는 걸 배웠다. 그 이후로 누구에게나 쉽게 거리 두지 않고 쉽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는 신중한 인간관계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동기들과 격차를 벌였다. 초기의 긴장감을 절박하게 느낀 나는 그런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회사에서 시키지 않아도 영업 준비로 수시로 밤을 새웠다. 어디를 다니든지 늘 금융 관련 책자를 끼고 살았다. 금융영업 실적은 점점 상위권으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근무 6~7개월 이후부터는 전국 상위권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실적으로 인해 아침 회의 시간에 박수를 받는 일이 점차 늘어나면서 나만의 호기도 생겼다. 지점에서는 실적이 좋으면 정규직이 될 거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해댔다. 나도 S기업의 마크를 내 정장 왼쪽 포켓에 달고 출근할 수 있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 듯했다. 수시로 밤을 회사에서 지새우고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늘 고민하고 연구했다. 퇴근 후 나의 술자리는 늘 스터디 같은 분위기였을 정도였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 금융대출 영업은 채권회수 업무와 같이 진행됐다. 나는 그것까지 적성에 맞았는지 '싸움꾼'으로 회사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손님들과 거친 언쟁은 일상이었다. 고성과 폭언, 조롱, 협박까지. 그저 나의 일상이었다. 수차례 전화기를 부수기도 했다.

그렇게 난 대기업의 편에 서서 내가 강자인 양 착각하고 약자인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인상도 험악하게 하고 다녀서 회수가 잘 안 되는 곳에는 꼭 나랑 같이 가려고 하는 직원들도 많았다.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다음엔 진짜 자살할 겁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의 주인공 강두(이정진). 강두는 악랄한 채권추심업자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의 주인공 강두(이정진). 강두는 악랄한 채권추심업자다.
ⓒ 김기덕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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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나의 불친절한 전화에 간혹 자신들의 상황이나 사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폭언이나 고성을 지르는 상대는 나도 맘 편히 화내며 그대로 응대했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나도 마음이 약하긴 했는지 사람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는 결제대금을 막을 수 있는데, 다음에는 정말 어려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다음엔 진짜 자살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자살할 겁니다."

통화를 하다 보면 간혹 상대방의 느낌이 전달된다. 이날은 유독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상대방의 흔들리는 목소리와 어깨가 나에게 전달됐다. 그날 더 이상 나는 수화기를 들고 있을 수 없었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어지러웠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시간을 멍하니 보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는 건가.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나서 그저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규직이 되어 '인간 대접' 받으려고 한 나는 무척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다른 약자들을 혐오하고 핍박하는 나. 과연 그런 내가 정규직이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것인가? 나도 대기업의 일개 계약직. 나도 약자이면서 대기업의 편에 서서, 내가 약자임을 망각하고 다른 약자를 핍박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난 그 허망한 정규직의 꿈에서 깨어났다. 어느 날 회사에서 직원들을 모아놓고 종이를 나눠줬다. 바로 계약직 근로계약서였다. 그때 나는 내 현실을 직시했다. 그 전까지 난 그저 계약서도 없는, 그냥 돈 좀 벌고 일 좀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계약직이었던 것이다.

회사가 어렵다는 핑계로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계약직. 정규직이라는 꿈도, 한 인간이라는 생각도 그 순간 다 날아가 버렸다. 나는 어쩌면 대기업의 종, 아니 대기업이 가진 권력의 사냥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휘둘리는 위험한 흉기였는지도.

그런 상황임에도 사표를 내기에는 망설여졌다. 내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금액이 당시의 나에겐 상당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가계대출 위기설 때문에 전면적으로 회사의 대출영업은 금지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표를 내기로 결정했다.

무심하게 버려지는 계약직... 아직도 진행형인 가슴 아픈 현실

하지만 나는 회사 안에서 서울시 채권회수율 1위에 육박했기 때문에 회사는 채권회수팀으로 어떻게든 보내려고 안달이었다. 나는 물론 거부했다. 결국 당시 계열사 중 자동차 대리점으로 발령을 내주기로 했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그건 바로 정규직이 되고 한 인간이 될 것이라는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나를 흉기로 쓴, 달콤한 희망 고문을 한 회사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장그래가 자신들의 동료와 같이 오래 일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랬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늘 즐거웠다. 담배 한 개비를 태워도 유쾌하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즐거웠다. 일을 쉬는 주말이 오히려 허전할 정도였다. 허나 그 가깝고 친하던 동료들은 한 순간에 다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상황을 겪고 나서야 대기업의 본모습과 계약직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당시 무수히 잘려나가는 계약직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약직은 사람이 아닌가 보다. 가족이라고 하더니, 그저 기업에서 필요할 때 쓰고,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인가 보다.'

그 시절 누군가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추운 겨울 술에 취한 나는 실업자의 신세이면서도 만세를 불렀다. 이제 그런 시절은 다 끝날 거라는 희망을 다시 한 번 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 희망이란 다시 한 번 깨져나갔다. 내가 기댄 슬픈 대통령은 혼자서는 무력했고 기득권은 막강했다.

나의 장그래와 같던 시간은 지나갔다. 하지만 드라마의 내용처럼 현실의 계약직 장그래의 상황은 아직도 가슴 아픈 진행형이다. 우리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현실이다. 불현듯 드라마의 조언이 스쳐간다. 익숙한 것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맞서고 헤쳐나가라는 <미생>의 조언.

정규직이란 당연한 꿈을 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기는 할까? 약자들에게 더 가혹한 겨울이다. 따뜻한 날이 빨리 오기를 희망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장그래는 나와 다르기를 꿈꿔본다. 그리고 내가 혐오한 수많은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그저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꼭 건강하게 행복한 세상 보고 사시길 기원드린다고.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그래, 나도 장그래였다' 응모글입니다



태그:#미생, #장그래, #계약직, #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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