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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은 국사교과서에 효종과 함께 북벌을 추진한 정치가로 등장한다.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를 빼고서는 조선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초상화가 국보 2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삼천 번도 넘게 등장한다고 한다.

선조부터 숙종까지 여섯 임금을 겪으며 무려 83세까지 무병장수했다. 83세에 세상을 뜬 것도 자연사가 아니다. 숙종에 의해 사사(賜死)당했기 때문이다. 십 년도 더 전에 씌여진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어보면 삼백 년 당쟁과 공작정치의 역사도 만날 수 있다.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표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표지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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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주자(朱子)주의자

송시열은 사림의 대학자로 추앙 받는 인물이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학문을 전승했기 때문인데, 그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주자의 해석을 통해 완벽해졌다고 믿었다.

특히, 저자 이덕일은 송시열이 주자학 중에서도 예학에 치중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체의 학문 중에서 사회구성원이 자기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자신의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체제유지에 기여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송시열을 말하자면, 골치 아픈 당파와 당쟁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서인(西人)이었고, 서인의 족보를 따지자면, 시조가 율곡 이이인데, 그는 십만양병설, 그리고 대공수미법과 같은 합리적 조세정책을 주장했을 만큼 개혁적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런데 송시열은 오로지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에 몰두했다."

시민평등사상이 세계적 추세였음에도 양반을 조세와 병역에서 면제해 주는 시대착오적 행정과 정책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이 효종과 북벌(北伐)을 추구했다고?

송시열은 28세의 나이에 인조의 차남이었던 16세의 봉림대군(효종)의 대군사부(大君師傅)로 정계에 입문한다. 이후 정묘-병자호란을 겪게 되는데, 이는 이웃나라의 동향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위정자들이 저지른 당파싸움의 결과다. 정확히는 서인의 시대착오적 쿠데타인 인조반정의 결과로 봐야 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선조의 후계자로서 분조(分朝)를 이끌고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은 광해군은 만주족의 후금(청)의 동향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명-청 교체기에 등거리 외교를 펼침으로써 조선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한다.

"광해군의 현실적인 외교 정책에 반기를 들고 정변을 일으킨 서인들은 반정 후 급격한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선회했는데, 이것은 수많은 비극의 시작이었다."(p.43)라고 저자는 인조반정을 쿠데타로 평가한다.

저자가 언급한 '수많은 비극들' 중엔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 말고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소현세자, 북벌을 꿈꾸다가 급서하는 효종, 피비린내 나는 서너 번의 서인 남인간의 환국정치, 경종 독살설 등이 있다. 비극적 역사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주범은 서인이었고, 우암 송시열은 서인(당)의 영수였다.

결국, 병자호란은 인조가 청의 장수 용골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치욕과 함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두 아들을 청의 볼모로 보내면서 마무리 된다. 인조의 눈밖에 난 소현세자가 의문사로 세상을 등지고, 왕으로 추대 된 효종은 북벌에 총력을 기울인다. 이때 효종의 대군시절 스승이었던 송시열이 조정에 중용된다.

집권당이었던 서인은 지독한 문치주의에 빠져 신분에 맞는 예절이나 따지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과 의지에 반하는 인물이 등장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거나 유배 보내는 짓이 주업이었다.

저자는 서인이 내세웠던 인조반정의 명분이 친명배청이었으니 당연히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와 군비를 증강해야 함에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효종의 북벌을 방해한 인물이 바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환국의 시대를 연, 숙종

십 년은 더 너끈히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할 수 있다며 호언하던 나이 마흔의 효종은 종기 때문에 급서한다. 석연치 않은 죽음이었다. 수전증이 있던 의원이 침을 놓았기 때문에 효종은 피가 멈추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이다.

16세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서인과 남인을 번갈아 중용하는 이른바 환국(換局)정치를 단행한다. 당쟁의 격화는 남인과 서인의 양당구도에 변화를 가져온다.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었고, 서인이 남인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됐다.

"효종 사후 15년이 지나 명나라 출신의 장수 오삼계가 난을 일으키자 남인 윤휴는 효종이 북벌을 준비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며 청나라를 공격할 적기임을 알렸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과 윤휴는 청나라의 구조를 연구했다.

지배계층인 만주족은 한족이 대부분인 피지배층에 비해 고작 170분의 1밖에 되지 않으니 조선이 쳐들어가면 만주족이 내응할 것이라는 계산도 했다. 최소한 요동지방 정도는 되찾아 대륙을 향한 교두보는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숙종과 서인정권이 끝내 윤휴를 죽여버린 데에는 윤휴에 대한 반감과 함께 외교적 이유도 존재한다. 줄기차게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죽여버림으로써 청나라와 외교적 분쟁을 만들지 않으려는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p.307)라는 저자의 안타까움은 현재로 이어진다.

정권이 바뀌면 대북정책 또한 바뀌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정부는 힘겹게 마련된 개성공단을 닫아버리고 경제적 실익이 분명할 북한의 인력과 국토에 대한 기회를 중국과 일본에게 내주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숙종은 장옥정(장희빈)이란 궁녀 출신의 여인을 만나 훗날 경종이 되는 왕자를 얻게 된다. 문제는 여러 번의 환국을 통해 정권을 잡은 서인 정권 하에서 장희빈이 남인출신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종묘에 고하고 원자로 삼았는데도 송시열은 반대 상소를 올린다. 83세의 노구에도 사약을 받은 이유다. 임금이나 조선이라는 국가보다는 서인 그 중에서도 노론의 당익을 최우선에 두었던 송시열의 말로는 의외로 정치적 동반자로 여겼던 숙종에 의한 사형이었다.

"송시열은 '주자(朱子)학'으로 일가를 이룬 학자이긴 했으나 주자주의에 빠져 주자 외의 학문과 사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논리에 반대하는 동료 유생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인 최초의 유학자였고, 자당(自當) 서인이 정치공작으로 무수한 남인을 도륙할 때에도 모른 척했던 노회한 정치꾼이었으며, 효종의 북벌을 대비한 모든 정책을 교묘히 방해했으니 진정한 북벌론자도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독후감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이유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가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이란 1차 자료를 취합하고 있기 때문이며, 면밀한 고증 끝에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 청와대 적폐논란이 한창이다. 정윤회라는 인물이 비선(秘線)실세로 거론되고 온갖 권력암투, 인사전횡, 복지부동 등 고루한 용어들이 등장한다. 청와대가 툭하면 하던 '국기문란'이란 말이 무색해졌다.

조선시대 노론의 후예들은 오늘도 막강한 권력을 위해 득세에만 심혈을 기울인다. 애초에 국가나 국민의 안위 따위엔 관심이 없다. 좋든 싫든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지음, 김영사, 1판 1쇄 2010년, 1판 33쇄 2011년 10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한 인간을 둘러싼 300년 신화의 가면 벗기기, 전면 개정판

이덕일 지음, 김영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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