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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몇 번 여행한 적이 있다. 그 때 안 쓴 여행기를 갑자기 쓰고 싶어졌다. 기억을 되살려 쓴다면 이런 내용이 될 것이다.

'파리 시내에서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무슬림들이 주로 사는 동네가 있다. 아파트가 한국의 1970년대 시민 아파트처럼 누추해서 충격이었다. 나를 그곳까지 안내해 준 친구는 동네 안은 우범 지대이므로 들어가지 말고 멀리서만 보자고 했다. 파리 시내 거리에는 개똥이 많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으며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 점원들은 손님의 지갑을 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 삐걱거리는 계단을 통해 3층까지 걸어 올라간 호텔방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2년 전 가장 최근의 방문 때는 파리에서 프랑스 남부까지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가야 하는데 인터넷에는 있던 기차가 창구에서는 없다고 했다. 창구 직원과 실랑이 끝에 높은 사람이 온 뒤에야 마침내 그 기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파리 중앙역에서 말이다. 뒤떨어진 예약 시스템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역내에는 소매치기를 감시하는 역무원들이 순찰을 도는데 옷차림이 볼셰비키 혁명 당시의 러시아 사람들 복장 같다. 이 나라는 아직도 볼셰비키를 추억하는 좌파 국가임에 틀림없다. 한 번을 갈아타고 두 번째 탄 남부 프랑스의 시골 기차에서는 다른 승객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교양 없는 동네 아낙들의 시끄러운 잡담 때문에 귀를 곤두세우고 다음 역 안내를 들어야 하는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한국 TV에서 수다쟁이 이미지로 활동하는 프랑스인 이다도시는 그에 비한다면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런 나라에 살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연기 지도를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물론 진짜로 행복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프랑스 집권당의 간부 가족이거나 민중을 수탈한 자본가 가족으로 보였다. 전도연이 출연한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을 보면 그 나라 감옥은 인권 사각지대다. 요즘 페이스북에서 유행하는 '당신이 살기 좋은 도시는?'을 따라가다 보면 내 취향에는 프랑스 파리가 나오던데 사람들은 프랑스에 대해서 너무나 모른다. 모두가 속고 있다.'

내가 이런 여행기를 쓴다면 사람들은 뭐라 할까? 부정적이고 심성이 뒤틀린 사람이라고 부르겠지?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그 따위로 만사에 부정적이니 이제껏 조그만 교회나 목회하며 고생하지"라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싼 돈 들여 여행해 놓고 어두운 면만 보고 온 측은한 사람이라고 동정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고. <긍정의 힘>이나 <프랑스 제대로 감상하기> 같은 책을 선물해 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온 사회가 나서서 여론사냥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관광객의 여행기를 검증하는 사회

방북 재미교포 신은미씨가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통일토크콘서트 종북 몰이'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왼쪽은 희망정치연구포럼 황선 대표.
▲ 황선-신은미 '종북몰이' 기자회견 방북 재미교포 신은미씨가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통일토크콘서트 종북 몰이'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왼쪽은 희망정치연구포럼 황선 대표.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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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행 감상을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루아침에 '종북'으로 모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의 저자 신은미씨에 대한 비판인데, 요지는 왜 그 사회의 이면을 보지 않았냐는 거다.

신은미씨는 관광객이다. 비판하는 쪽에서도 관광객의 시선을 검증하는 것이 창피했던지 하루아침에 저자를 '종북 세력', '특정 세력과 연계'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매도한다.

만약 관광이 그 사회의 어두운 면을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라면 한국의 관광 상품도 다시 개발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현장도, 용산 참사의 현장도, 아이들이 성적 때문에 자살한 학교도, 경비원이 인격적 모독 때문에 분신한 아파트도, 국정원 직원이 댓글 작업을 하던 오피스텔도, 군인들이 적이 아니라 동료에 의해 맞아 죽은 내무반도. 모두 관광 상품에 포함시킨 다음에 신은미씨를 비판해야 한다. 이런 면은 안 보고 경복궁, 불국사를 돌아본 다음에 '원더풀'을 외치는 외국 관광객들의 시선을 비판해야 한다.

나에게는 신은미씨의 북한 관광기가 북한을 잘 묘사했는지 과장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남의 여행기를, 그것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우수도서로 선정한 책의 저자를, 온 사회가 나서서 검증하는 현상을 견딜 수가 없다. 내가 17여 년 전 한국을 떠날 때는 적어도 이러지 않았다.

지난 정권에서는 국격을 외치면서 나라의 격은 물론 나라의 곳간에까지 엄청난 손해를 입히더니 지금 정권은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유신 시절의 억압을 되살리고 있다. 이민 가서 살면서 무슨 억압이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주류 사회에 편입할 능력이 없어서 한인 사회에 터전을 잡고 살다보니 한국에 대한 관심을 끌 수가 없다.

나는 통일지상주의자도 아니어서 통일 운동가들이 남북을 두 개의 국가로 보지 않으려고 사용하는 '남녘, 북녘' 또는 '남부 조국, 북부 조국'의 명칭이 어색하고, 남쪽 대한민국이 늘 그리운 사람인데 내 나라가 역주행 하고 있다. 국격뿐 아니라 모두가 인격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삶의 격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삶의 격-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삶의 격-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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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예의도 격도 없이 돌아간다고 느낄 때 읽기 좋은 책이다. 독일 철학자 페터 비에리가 쓴 <삶의 격-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은행나무, 2014년)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관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접근한다. 철학자의 책이지만 난해하다기 보다는 다양한 예를 통해 독자 스스로 삶의 격을 고민하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독립성은 존엄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유럽에 실제로 있는 '난쟁이 멀리 던지기 대회'에서 던짐의 대상이 되는 난쟁이들의 독립적 선택이 존엄성과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모두 8개의 장에서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만남으로서의 존엄성'에서부터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까지 언급한다.

저자는 '만남으로서의 존엄성'에서 상대방을 깔보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해야 할 때 인정하지 않는 것도 존엄성의 훼손이라 지적한다. 우리는 갑이 을을, 남이 북을(북 역시 남을) 깔보며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듯 살아간다. 저쪽 사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체제적 우월성을 자랑하던 우리 사회가 인정해야 하는 것도 여론몰이가 무서워 인정 못하도록, 이 책대로라면 존엄성을 상실하도록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에서는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된 주체로 살아가라고 권하는데, 오늘 우리는 여론몰이에 자신을 맡긴 채 살아가면서 스스로 삶의 격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든다. 책의 한 부분이다.

독재 권력은 우리의 마음속까지도 무장해제하여 사상과 감정과 소망을 통제당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조지 오웰이 그려낸 <1984>의 세계에 이러한 것이 잘 드러나 있다. 고문 기술자인 오브라이언이 끌려온 윈스턴에게 말한다. "당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권력을 잡으려고 하지. 권력은 수단이 아니야. 목적이지." 당이 국민을 대신하려고 하며 억압하는 이유는 절대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이용해먹기 위해서다.

국민은 그 자체로서 손톱만큼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저 권력이 갖고 노는 고무공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국민은 굴욕을 받는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이 느끼는 무력감을 만끽하며 윈스턴이 그것을 인식하게끔 항상 신경을 쓴다. 그 어떤 잔혹한 신체적 고문도 마다하지 않고 시도하는 그가 괴물인 이유는 그 잔인성에 있다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굴욕을 가하는데 가히 천재적이기 때문이다. (44쪽) 

페터 비에리의 이 글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북한을 떠올릴 것이다. 그 사회는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그 사회를 닮아 가느냐는 말이다. 내가 지금 삶의 격이 훼손당할 만큼 굴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태그:#신은미, #종북,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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