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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 주말이면 남쪽 끝에서 시작하는 꽃물결을 따라 나도 함께 움직였다. 올해 봄은 허망하게도 직장 일로 꼼짝없이 밥 벌이에 저당 잡히고 말았다. 벼르고 벼르던 전라남도 강진여행을 가을에서야 시작했다. 여행 일정의 주요테마는 언제나 절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해 여행은 언제나 혼자 다니는 편인데 올해는 어쩐 일인지 일정마다 굴비 엮듯이 순서를 기다리며 동행이 따라붙었다. 덕분에 짧은 가을은 그들에게 저당 잡혀 낭비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숲길 백련사 옆의 동백숲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가는 숲길을 20여분 가량 걷다보면 다산초당에 닿는다.
▲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숲길 백련사 옆의 동백숲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가는 숲길을 20여분 가량 걷다보면 다산초당에 닿는다.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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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여 진 풍경에 마음이 고정되고 생각이 멈추는 강진

강진하면 지루하리만큼 따라 붙는 수식어가 '남도답사 일번지'다.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은 이라면 단연 무위사를 떠올릴 것이다. '북은 소월이요, 남은 영랑이라'라는 말이 있듯 시를 좋아하는 이라면 시인 영랑을 떠올릴 테지만, 무엇보다도 만덕산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 중 11년의 세월을 지낸 다산초당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또한, 해질 무렵 강진만 갯벌을 붉게 태우는 낙조도 빼놓을 수 없다. 백련사에서 내려다보는 강진만의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백련사 만경루 내 가을을 저당 잡은 동무(왼쪽)와 저당 잡힌 필자(오른쪽)
▲ 백련사 만경루 내 가을을 저당 잡은 동무(왼쪽)와 저당 잡힌 필자(오른쪽)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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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사찰마다 마치 유행처럼 진행되는 것 중 하나가 템플스테이다. 백련사도 템플스테이를 진행하지만, 여느 사찰들과는 차별되는 재미거리 한 가지가 있다. 보통의 템플스테이는 머물며 쉬어가는 형식의 '휴식형템플스테이'와 사찰문화체험 형식의 '체험형템플스테이' 두 가지로 나뉜다.

반면 백련사는 사찰 주변의 동백숲과 다산초당을 잇는 오솔길을 걸으며 쉬어가는 '휴식형템플스테이'와 완도군에 속해있는 생일도와 해남의 대흥사 북미륵암을 오르고 강진만의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2박3일의 일정으로 진행되는 '남도기행템플스테이' 두 가지로 나뉜다.

대부분의 템플스테이는 경내와 사찰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반해 백련사의 템플스테이는 주로 사찰 밖 일대를 소요하길 권한다.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감에 부족함이나 아쉬움이 없다. 모든 기행일정은 젊은(?)주지스님이 직접 동행하며 진행한다.

백련사에서 키우는 풍산개(정진이) 한 마리가 있는데 내가 만만한지 나만 보면 으르렁 거린다. 초가을부터 두 주에 한 번 꼴로 봤으니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녀석은 내가 싫은 모양이다. 배가 불룩하고 볼 때마다 대체로 누워만 있어서 새끼를 가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뚱뚱한 거란다.

뚱뚱하다보니 몸이 무거워서 주로 누워만 있는 거라고 한다. 그런 녀석이 무슨 일인지 보이지 않아 주지스님께 물으니 얼마 전 사고치고 절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사연은 그랬다. 신도가 데리고 와 절에 풀어놓은 애완견을 물어서 죽였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그 일로 하는 수 없이 정진이를 근처 농장으로 보냈단다.

정진이  아픈 듯도 보이고 죽은 듯도 보여 건드려보면 멀쩡하다.
▲ 정진이 아픈 듯도 보이고 죽은 듯도 보여 건드려보면 멀쩡하다.
ⓒ 일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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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키우는 개가 그랬으니 신도 분도 크게 뭐라 하지도 못하시고 '49제나 잘 지내달라'고 부탁하시기에 '49제는 꼭 지내 주마' 약속하고 댁으로 돌아가셨어요. 개 때문에 그렇게 머리를 숙이게 될 줄은 몰랐네..."
"스님, 개 49제요?"

난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주지스님 얼굴에 뿜을 뻔 했다. 그렇듯 상황은 순조롭게 끝나는 듯했다.

"어찌됐든 49제는 지내주기로 하고 신도 분이 돌아갔는데 저녁에 아들이란 자가 전화가 왔네. 죽은 개는 자식 같은 개라고, 자기 집에선 사람하고 똑같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합의금으로 300만 원을 요구하네... 그래서 그랬지. '처사님 집 개 죽은 건 정말 안타깝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처사님 집 개가 사람이면 우리 절 개도 사람이다, 우리 정진이 고소하고 정진이한테 돈 받아라' 했지요. 뭐..."

주지스님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던 합의금으로 예정에 없던 지출이 생겨 여간 난감한 게 아녔다고 한다. 합의금을 깎아 달라고 사정할 수도 없고 해서 신도분 중 친분이 있는 변호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개주인도 개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한 과실이 있음을 참작해 150만 원으로 합의를 마쳤다고 한다. 개 49제는 합의금 지불로 생략하기로 했단다.

절에서 쫓겨나 농장으로 간 정진이는 며칠을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개를 사람과 동일시 자식처럼 생각했다며 합의금을 요구한 개 주인보다 오히려 사고치고 쫓겨난 정진이에게 안타까움과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동백꽃은 매년 봄 3월이면 나무에서 절정이루고 4월이면 땅에서 절정을 이룬다.
 동백꽃은 매년 봄 3월이면 나무에서 절정이루고 4월이면 땅에서 절정을 이룬다.
ⓒ 일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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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주변으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름드리 동백나무숲이 큰 볼거리 중 하나다. 동백숲에 들어서면 남쪽의 따뜻한 기후 탓에 아직도 군데군데서 동백꽃을 볼 수가 있다. 동백꽃의 자태는 나무에 핀 모습보다는 바닥에 붉게 뒹구는 모습일 때 더욱 아름답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 부분)

동백꽃의 절정은 3, 4월이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 앞마당에 서서 올려다 본 하늘의 쏟아질 듯 새벽별을 어떻게 표현해야 그 아름다움을 전할 수가 있을까. 알퐁스 도데 <별>의 목동과 스테파네트아가씨가 함께였던 하늘의 별도 이러했을까. 지는 해가 아름답듯 푸르게 빛나는 새벽별이 더욱 아름다웠다.

백련사 아침풍경 동이 틀 무렵 백련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은 해무로 가득해 생각을 멈추게 한다.
▲ 백련사 아침풍경 동이 틀 무렵 백련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은 해무로 가득해 생각을 멈추게 한다.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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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별도 사그러 들고 동이 틀 무렵, 요즘처럼 일교차가 큰 때에는 강진만을 덮는 해무 또한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 장관을 이룬다. 한 바가지 눈물을 쏟아내고 보아야 할 아름다운 풍경이란 이와 같은 곳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강진만 일몰 한 바가지 눈물을 쏟아내고 보아야 할 강진만 일몰.
▲ 강진만 일몰 한 바가지 눈물을 쏟아내고 보아야 할 강진만 일몰.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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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도 중요하지만 여행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먹거리다. 문지방에 걸리듯 얼결에 들어가 앉아도 최고의 남도한정식이다. 내가 전라남도 지역의 사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남도식 사찰음식 때문이기도 하다. 백련사의 아침공양은 주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재료로 만든 죽이 나온다. 죽으로는 부족한 이들을 위해 항시 쌀밥도 준비되어있다.

공양간 공양주보살님의 음식솜씨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일전에 함께 동행했던 친구가 '몰래 데리고 나가서 한정식집이라도 차리고 싶다'해서 한 바탕 웃은 일이 있다. 입맛이 없어 이도저도 마땅치 않은 날이면 아삭한 식감의 보기만 해도 눈물이 시큰하게 고이는 묵은지가 먼저 생각난다.

지난여름부터 백련사 위의 토굴에서 지내고 있는 유명정치인 부부가 매일 점심마다 들러 공양을 함께 하는데 절에선 누구나 자신이 먹은 밥그릇은 자신이 직접 씻는다.

공양간  남도여행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먹거리다. 먹거리의 향연은 사찰음식으로까지 이어진다.
▲ 공양간 남도여행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먹거리다. 먹거리의 향연은 사찰음식으로까지 이어진다.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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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절대 빼놓아선 안 되는 것이 차다. 만덕산에 차가 많기로 유명해 다산이라 불러지기도 했지만, 야생에서 길러진 차의 맛과 향이 전국 제일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한 차례 동행했던 친구의 말을 빌자면 야생녹차만의 고유한 맛과 향이 있다고 한다.

"기존의 유명차밭 차들은 '녹차다'하는 감칠맛이 있어 좀 질리는데, 반면 백련사 차는 감칠맛 보다는 담백함과 순수함이 있어 그런지 계속 마시게 돼. 녹차(반야) 맛도 좋았지만 맛과 향이 순한 발효차(자하) 맛이 일품이었어."

주지스님의 차 내리는 솜씨가 한 몫했던 듯도 하다. 운이 좋아 주지스님이 한가한 때에 방문한다면 남보다 좀 더 많이 다양한 차 맛을 즐길 수가 있다. 야생차와 친환경으로 재배한 차 잎만을 골라 차를 만들다보니 공급되는 양이 적은 탓에 별도 구매는 백련사 만경다설에서만 가능하다.

차담  주지스님과의 차담 중.
▲ 차담 주지스님과의 차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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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방 곶감 익어가는 풍경 다도방에서 내려다 보는 강진 일대의 풍경은 세상 어느 별장이 부럽지 않다.
▲ 다도방 곶감 익어가는 풍경 다도방에서 내려다 보는 강진 일대의 풍경은 세상 어느 별장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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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백련사 뒤편 만덕산을 산책 중 산감나무 한 그루가 있어 감을 한 소쿠리 가득 따온 일이 있다. 산감이라서 그런지 크기가 애기주먹보다 작거나 대추알만한 크기의 감도 있다. 산감은 약으로 쓴다하니 술을 담글까 하다가 사찰에서 술을 담글 수는 없고 해서 껍질을 얇게 벗겨 실에 엮어 다도방 창가에 걸어 말렸다. 공양주보살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몫은 꼭 남겨놓으마 약속을 하셨고, 주지스님께는 내 지분만큼은 반드시 챙겨 달라 부탁을 했는데 얼마나 남아 있을지 궁금하다.

'스스로 견딜 수 없다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 심보선 시인의 시처럼 누구나 한번쯤은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다산정약용은 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숲길을 오가며 혜장선사와의 만남을 통해 유배생활의 막혔던 숨통을 틔우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한다. 짧았던 가을날을 저당 잡은 동무들과 내 막힌 숨통을 틔운 이곳 백련사와 강진 일대를 나 역시 일번지로 꼽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백련사에서 머물게 될 방은 옷가지들을 걸 수 있는 기다란 대나무로 만든 옷걸이와 괴팍해 보이는 나무테이블 그리고 이불 한 채만이 가지런하게 자리해 있다. 생각이 쉬고 싶은 이들과 추운 겨울이 지긋지긋한 이들에게 평균기온이 3, 4도가량 높은 강진을 이 겨울 피난처로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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