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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 20일 오후 4시께, 국내 최대 규모의 용산 전자상가 옆을 지나가니 고층 건물이 보였다. 지하 7층·지상 18층으로 규모의 서울 용산 화상경마장(장외발매소)이다. 화상경마장 건물 앞을 지나가다 보면 빈 터에 천막 하나가 있다. 화상경마장 개장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농성하는 곳이다.

주민대책위원회 쪽 주민들은 24시간 순번을 정해 자리를 지킨다. 서로 돌아가며 하루에 몇 시간씩 앉아 있다. 일주일에 며칠씩 분담해서 릴레이 농성을 이어가는 중이다.

자식을 보호하는 건 부모로서 당연한 일

용산 화상경마장 개장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270일 넘게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 불편하고 비좁은 천막 내부 용산 화상경마장 개장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270일 넘게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 김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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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성심여자중학교에 다닌다는 A(41)씨는 지난 5월부터 천막에서 농성 중이다. A씨는 근처 보광동에서 살다가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사왔다. 학교가 좋다고 소문이 나 배정 받기 쉽지 않았다. 딸은 어렵게 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곳에 도박장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A씨는 아연실색했다. 

"주변 분위기 자체가 우리가 원한 것과는 다르게 만들어지잖아요. 만약 (화상경마장이) 개장하면 분위기가 많이 거칠어지지 않을까요? 자식을 보호하는 건 부모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요?"

A씨는 용산 화상경마장을 반대하는 여론이 어른들만의 견해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아이들이 더 반대해요. 실제로 저희 남편이 '개장하면 한 번 가볼까'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더니 아이들이 난리가 났어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하지 말라고, 아빠까지 그러면 난 학교 안 나간다고요."

마사회는 전국에서 30여 곳의 화상경마장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에게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는 곳이 많다. 대전 월평동 화상 경마장도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홍보에 주변 상인들이 개장을 찬성했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많은 상인들이 자리를 떠났다. 일부 상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경마장 유지에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6일 월평동 화상경마장 폐쇄 및 추방을 위한 주민대책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화상경마장이 생기고 15년간 월평동 삶의 터전은 파괴됐다, 경기 활성화는커녕 오히려 지역경제가 침체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마사회는 지난 6월, 주민 반대를 무릅 쓰고 용산 화상경마장을 기습개장했다. 총 18개 층 중 3개 층, 400명 규모로 제한한 임시개장이었다. 마사회는 임시개장한 3개월 기간 동안 외부인사를 영입하여 평가위원회(아래 평가위)를 구성한 후, 생활·교육·교통환경 등 17개 항목에 대해 관찰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인근 주민·학부모·학생을 대상으로 경마장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도 병행했다.

마사회는 지난 10월 31일, 용산 화상경마장에 시험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평가위는 부정적 영향보다 긍정적 요소가 더 크다는 결과를 내놨다. 평가위는 경마장 운영일과 비운영일을 비교한 결과, 범죄발생이나 쓰레기투기·학생 위협 등 14개 항목에서 경마장 운영일의 긍정 요소가 더 컸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를 총 9점 만점의 점수로 환산하여 4.1점의 결과가 나왔다고 발표했다. 점수가 높을수록 부정적 영향이 크다는 뜻이다.

반면 주민인식조사는 부정적 평가(주민 72.7%, 학부모 84.9%, 학생 84.8%)가 긍정적보다 훨씬 많았다. 이에 대해 마사회는 "설문조사 결과가 관찰조사보다 부정적으로 나온 이유는 1년 넘게 진행된 개장 반대운동에 따른 것으로, 경마의 부정인식에 기인한 감정적 결과"라고 평가했다.

마사회의 시험평가 발표가 있던 10월 31일, 용산 화상경마장 주민대책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반박에 나섰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광철 변호사는 "제대로 조건을 반영하지 않았음에도 4.1이라는 점수가 나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8~9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A씨 역시 마사회의 평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한 3개월 평가했지만, 이게 3개월 평가하고 결정될 만한 사안은 아니잖아요?"라고 반문했다. A씨는 "도박장 효과는 몇 년이나 몇 십 년에 걸쳐서 그 영향이 드러나는데, 3개월 평가하고 어떤 효과를 검증했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우려하는 점은 따로 있다. 서서히 장기간에 걸쳐서 변화할 지역의 미래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현명관 마사회장은 지난 12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 출석하여 "3개층이든 5개층이든 1단계로 연내에는 (개장)했으면 하는 게 희망사항"이라고 밝혔다. 대신 빌딩 공간의 상당부분을 지역주민에게 돌려주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마련하여 타협점을 찾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 용산구 등 행정기관은 주민 동의 없는 용산 화상경마장 개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제제할 근거가 미비해서, 마사회가 경마장 개장을 강행할 경우 이를 막을 수단이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마사회 측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A씨도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문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주민시설을 늘린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박장 공간을 늘리고 주민시설을 줄일 것이라 주장했다.

"우리 사회가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하잖아요. 돈이면 다 된다는 모습을 보여주면 도대체 사회가 아이들한테 가르칠 것이 무엇인가요?"

그는 이런 사회를 만들어 놓고 어른으로써 존경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A씨는 그게 걱정이라고, 아이들에게 창피하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집값 떨어질까 봐 농성하는 것 아니냐는 편견 섞인 얘기를 해요. 물론 자기 동네 집값 떨어지는 걸 좋아할 사람이 있나요? 하지만 만약 다른 공간으로 인해 집값이 떨어진다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거부감은 '도박장'이라는 것에서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더 큰 것을 걱정해요. 도박장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지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죠."

땅거미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오후 5시. 다음 순번인 성심수녀회 소속 수녀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 A씨는 자리를 떴다.

천막 근처에서 20년간 분식 노점을 하고 있다는 50대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는 경마장 개장 여부에 딱히 관심은 없다고 말했다.

"우리야 오가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장사가 잘되는 거라서 반대는 안 하지만, 그렇다고 뭐 찬성도 안 해요. 다만, 예전에 저기서 농성하던 어떤 아줌마가 우리 집에서 김밥 50줄을 주문시켜 놓고, 안 가져간 적이 있어요. 제가 자기들을 옹호하지 않아 기분이 안 좋았대요. 그래도 사람이 지킬 건 지켜야하는 건데…."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A씨의 우려대로 벌써부터 지역 사회 구성원 간 갈등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도박장으로 동네가 우울해지는 게 싫어요"

학생들은 도박장을 학교 주변에서 개장하려고 하는 어른들이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 교정을 바라보고 있는 성심여고 학생들 학생들은 도박장을 학교 주변에서 개장하려고 하는 어른들이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 김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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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경마장이 보이는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 사이를 걸어간 지 5분도 되지 않아, 성심여고 교정이 보였다. 학교보건법에 있는 학교환경위생 정화구역에서 35m 벗어나 있다. 학교 교정에서 경마장이 또렷하게 잘 보였다. 수많은 성심여중고 재학생들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면 경마장 앞을 지나가야 한다.

경마장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경마장이 개장하면 어떤 식으로든 교육환경은 변할 것이다. 그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사람들은 누구보다 성심여중고 학생들이다. 교정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경마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학교에서 아침에 비디오를 틀어주거든요. 경마장이 생긴 동네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그런 걸 보면 더욱 무서운 생각도 들어요. 저희는 지금 고3으로 올라가서 학교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거니까 그나마 낫지만, 이제 입학하는 후배들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워요. 학교에 정이 많은데…." (성심여자고등학교 2학년 B양)

"저희도 시위에 직접 나갔어요. 저희가 자발적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기사 댓글에 막 학교에서 동원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돼요. 학생회에서 주도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몇 시에 시위한다고 누가 학교에 붙여 놓으면 나가고 싶은 사람은 모이는 거예요. 6월 기습 시범개장 때 저도 밥 먹고 시위하러 갔거든요. 그럼 거기에 있는 아저씨들이 때리려고 위협하고 그랬어요. 되게 무서웠어요. 선생님이 위험하니까 저희보고 들어가라고 했는데, 선생님들만 몸싸움하는 걸 보고 저희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성심여자중학교 2학년 C양)

성심여자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D(16)양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D양은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개장하면 주민들을 직원으로 채용한다고 했지만, 아무리 돈을 줘도 다 도박으로 번 돈이잖아요? 그걸 전제로 하는 거니까. '뭐 하세요?' 그럼 '아 도박장에 다녀요'하는 게 자랑스러운 직장이 될 수는 없잖아요? 우리 동네에서는 도박장에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실업률이 적으니까 좋다고 해야 하나요?"

D양은 도박에 대해 돈을 잃어서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으로 이끄는 백해무익 이라고 말했다. 동네가 그런 식으로 우울해지는 것이 싫다고 덧붙였다.

"저희야 도박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아름답게 볼 수 있겠어요? 특히 저희가 야간 자율학습을 많이 하거든요. 저희 학교가 야간 수행평가가 많아서 밤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요. 하교할 때 골목으로 다니거든요. 그럼 지금도 무서운데 도박장이 근처에 있으면 더 무서워질 것 같아요."

마사회 측은 주민들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무술유단자를 경비원으로 고용하고, 성능 좋은 CCTV를 설치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서도 D양은 "남이 잃은 돈으로 수익을 내서 문화시설을 운영하는 건데,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옳은가요?"라고 되물었다. D양은 "이상하죠,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른들이 이해가 안 돼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성심여중고 학생들이 이 배지를 학용품과 가슴에 달고 있었다.
▲ 경마장 개장을 반대하는 배지 많은 성심여중고 학생들이 이 배지를 학용품과 가슴에 달고 있었다.
ⓒ 김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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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현 성심여중 부학생회장을 만났다. 그는 왼쪽 가슴에 달려있는 "화상경마도박장으로 부터 아이들을 지켜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작년에 경마장을 개장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학생들은 큰 문제로 인식을 했어요. 그때부터 우리끼리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어요. 만약 개장을 강행하면 학생회에서도 활발하게 문제점을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더욱 많이 마련할 거예요."

용산경마장을 방문한 20일, 마사회는 한 용산 주민에게 3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마사회는 김율옥 성심여중고 교장을 비롯한 주민과 성직자, 학부모 등 22명을 방해와 폭행, 집회와 시위에 관한 특별법 위반 등으로 고소·고발한 상태다.


태그:#용산, #화상경마장, #성심여중고, #장외발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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