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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라디오 DJ 최동욱씨가 21일 오후 서초구 자신이 개국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 <라디오서울코리아> 스튜디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방송시작 첫 멘트가 "상업광고 없이 비영리 무보수로 드리는 헌신의 방송, 라디오 서울 코리아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이유에 대해 "과거 음악을 들어주신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매달 150만원씩 자비를 들여 인터넷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DJ 최동욱씨가 21일 오후 서초구 자신이 개국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 <라디오서울코리아> 스튜디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방송시작 첫 멘트가 "상업광고 없이 비영리 무보수로 드리는 헌신의 방송, 라디오 서울 코리아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이유에 대해 "과거 음악을 들어주신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매달 150만원씩 자비를 들여 인터넷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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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방송 DJ, 최초의 가요-팝송 순위 개발, 최초의 청취자전화 리퀘스트 프로그램 진행, 최초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최초의 자동차 전문기자.

'최초의 라디오스타' 최동욱씨의 이력이다.

내년이면 팔순을 맞이하는 그는 지금도 '현역' DJ로 활동중이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라디오서울코리아의 스트리밍 방송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여전히 소통하고 있다.

기자는 새 연재 시리즈의 첫 손님으로 21일 서초동 지하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나 그동안의 인생 역정에 대해 들어봤다. 27일 이사를 앞둔 터라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스튜디오를 빼곡히 채운 CD 1만여 장과 희귀 LP 2000여 장, 그리고 1890년부터 2013년까지의 차트 북과 팝 관련 원서들이 그에게 남은 자산이다.

'뮤직홀' 종업원에게 노래 제목 물으며 음악 들어

한국 최초의 라디오 DJ 최동욱씨가 1965년 <동아방송>에서 '탑툰쇼'를 진행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옛날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레코드로 제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DJ 최동욱씨가 1965년 <동아방송>에서 '탑툰쇼'를 진행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옛날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레코드로 제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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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와 방송의 인연은 고려대 국문과 재학시절인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TV는 물론이고 라디오도 귀해서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서울 종로의 '뮤직홀'로 나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음반을 틀면 칠판에 적어놓은 가수 이름과 제목을 보거나 지나가는 종업원을 붙들고 "지금 나오는 노래 제목이 뭐냐?"고 물어가며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최씨의 경우 대학시절부터 고려대 합창단 활동을 하고 클래식과 팝송 등 음악을 두루 좋아해서 악보에 메모해두는 습관이 평생의 업으로 이어졌다

종로2가의 디쉐네(Die schöne : 독일어로 '아름다운 여인')에 "미국에는 음악을 말로 소개하는 디스크자키(DJ)라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 일을 한번 해보겠다"고 제안해서 일을 따낸 것이 경력의 시작이 된 것이다.

종로 일대 뮤직홀 여러 곳의 DJ를 맡다가 1960년 KBS '금주의 히트퍼레이드' 작가로 발탁됐고,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DBS(동아방송) 라디오 PD 개국요원으로 특채됐다.

"당시 방송국에 음반이 없어서 뮤직홀에 있던 판을 가져다가 방송에 쓰기도 했어요. 레코드가 수입금지 품목에 올라있던 때여서 아마도 미군 PX나 암시장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나 싶네요."

1964년 여름 영국의 5인조 밴드 더 애니멀스(The Animals)의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House of the rising sun)'이 전 세계를 강타했고, 이 노래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만 해도 방송 마이크는 아나운서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이 강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팝송을 많이 알아도 직접 진행을 맡을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9월의 어느 날인가? 실력 없는 아나운서 하나가 그 노래를 '아니말스의 하우스 오브 더 리징 선'이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그동안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던 터라 내가 '이런 엉터리 방송은 내보낼 수 없다'고 방송에 내보낼 녹음 테이프를 폐기해버렸죠."

동아방송은 이 일을 계기로 그에게 DJ를 맡겼고, 1964년 10월 5일 한국 최초의 일간 팝 음악 프로그램 '탑튠쇼(Top Tune Show)'가 전파를 타게 됐다. 특히 매주 토요일 오후 5시와 7시 각각 방송된 '동아베스트 텐'과 '가요 앙코르'는 한국 최초의 팝과 가요 음악순위 프로그램이었다.

"음반이 정식 수입되지 못했는데 불법복제되는 '빽판' 판매량을 집계할 수는 없잖아요? 매주 200~300통 정도 오는 청취자 신청엽서로 순위를 매겼죠. 어쨌든 방송에서 팝송 들으려면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 지금의 AFNK) 채널 밖에 없던 터라 젊은이들 반응이 정말 뜨거웠어요."

탑튠쇼의 인기에 자극 받은 MBC도 1년 뒤 동일한 포맷의 '탑튠 퍼레이드'를 만들었는데, 지난해 5월 30일 별세한 원로 방송인 이종환씨가 당시 진행자를 맡았다.

1960년대까지 '죽어있던' 오후 시간대를 깨운 것도 최씨였다.

"당시 라디오 방송은 오전 9~12시, 오후 2~5시까지 방송 자체를 쉬는 '데드 아워'(Dead Hour)가 있었는데, 동아방송이 청취자 전화로 노래 신청받는 리퀘스트 프로그램을 시작했어요. 근데 이것도 노래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아나운서를 시키니 사담 밖에 더 하겠어요? 편성권자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최동욱이, 이것도 네가 해봐'라며 진행을 맡겼죠."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 안 나는데, 계엄령 치하에서 거리시위가 있던 날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청취자가 '지금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시위 학생들을 위해서 행진곡 하나 틀어달라'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 난리가 났지만 그래도 동아방송은 꿋꿋이 방송을 했어요. '세시의 다이얼'은 1966~69년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부) 청취율 조사 3년 연속 1위로 노력의 보상을 받았죠."

"수습기자 월급 1만 원 시절, 21만 원 받고 스카우트됐죠"

한국 최초의 라디오 DJ 최동욱씨는 요즘 라디오 방송에 대해 "라디오 본래의 기능은 사라지고, 아이들 중심의 잡담이 되었다"며 "DJ 역할이 중요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DJ 최동욱씨는 요즘 라디오 방송에 대해 "라디오 본래의 기능은 사라지고, 아이들 중심의 잡담이 되었다"며 "DJ 역할이 중요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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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는 베트남전쟁 반대나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시대였는데 현실참여적인 노래를 내보내는 데 별다른 제약은 없었나요?

"밥 딜런, 조운 바이에스(Joan Baez)의 노래도 다 틀었어요. 흑백 차별? 그런 것도 없었어요. 아레사 프랭클린의 'Respect(리스펙트)', 샘 쿡의 'A Change Is Gonna Come(어 체인지 이즈 고나 컴)'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다이애너 로스가 이끈 '슈프림즈' 노래 신청도 많았죠. 개인적으로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가 미국에서 유럽, 일본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수들의 보컬 능력, 음악의 완성도가 최고인 시대였다고 생각해요. 당시 대중음악의 황금기(Golden Music Era) 음악을 주로 소개한 것은 인생의 행운이었죠."

자정부터 오전 4시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던 1970년에는 방송 최초의 심야 생방송 '영시의 다이얼' DJ도 맡았다. 1971년 4월에는 '3년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TBC(동양방송)로 스카우트됐다.

"언론사 수습기자가 월급 1만~1만5천 원 받던 시절에 동아방송은 내게 21만 원을 줬는데, TBC에서도 딱 고만큼만 받았어요. 등 뒤로 '최동욱이 돈에 팔려갔다'는 소리 듣기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어요."

1975년 <서울신문> 기자로 변신해 영화, 방송, 가요, 레저 기사를 썼고, 1978년에는 동아일보가 만든 주간지 <스포츠동아> 창간 멤버로서 10년 동안 활약했다. 자가용 승용차가 귀하던 시절 대우 로얄 살롱과 포드 머큐리 세이블을 손수 몰며 한국 최초로 자동차 칼럼을 쓰고,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를 개발한 것은 지금도 보람으로 남는다.

그러나 1988년 <스포츠동아>가 폐간되고 방송환경이 바뀌면서 그는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방송계의 오랜 경력을 인정받은 덕에 영주권도 신청 6개월 만에 비교적 손쉽게 취득했다고 한다.

"<동아일보>가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게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주간지를 없애 버린 거예요. 대중문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시기에 오히려 이익을 낼 수 있는 매체를 없앴으니… 그렇게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없으니 지금 신문과 방송 모두 경쟁지들 중에서 3등으로 전락했잖아요? 아니, 4등이라는 말도 있어요!"

2003년 10월 20일 TBN(교통방송) 라디오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 '최동욱의 미드나이트 스페셜'로 방송에 복귀했고, 2005년 5월1일에는 인터넷방송국 '라디오서울코리아'를 개국했다.

"한 달에 인터넷회선 요금이 30만 원, 전기요금이 15만 원… 이것저것해서 매월 150만 원의 유지비가 나가는데, 점점 밑천이 거덜나네요. '이제 그만 접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하지만 전성기를 함께 한 팬들에 대한 서비스라서 마이크를 놓을 수가 없어요."

2011년 12월부터는 후배 DJ 박원웅씨 등과 뜻을 모아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에 올랐다. 라디오 마이크를 놓은 지는 오래됐지만, 라디오의 미래에 대해서는 걱정이 많다.

"라디오 주 청취 연령이 자꾸 내려가서 중학교 2학년에게 타깃을 맞추더니 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에 맞춰진 느낌이에요. 운전하며 라디오 듣는 자동차 운전자가 2000만 명 넘는 시대에 방송은 타성에 젖어 운전자를 저질 청취자쯤으로 여기고 있어요. 방송 3사보다는 CBS 같은 곳이 오히려 선곡을 잘 한다고 봐요."

실력을 인정해 줄 만한 후배 DJ들을 꼽아달라고 하자 김광한과 배철수를 얘기하지만 성에 썩 차지 못하는 눈치다. 인터뷰를 마친 뒤 기자를 배웅하는 그에게 "방송 DJ 1호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신 것 같다"고 하자 그가 답했다.

"무슨 일이든 처음 개척하고 시작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죠."

한국 최초의 라디오 DJ 최동욱씨가 21일 오후 서초구 자신이 개국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 <라디오서울코리아>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DJ 최동욱씨가 21일 오후 서초구 자신이 개국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 <라디오서울코리아>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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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욱이 걸어온 길
1936.5.13 서울 출생
1955 전주고 졸업
1960 KBS '금주의 히트퍼레이드' 작가
1962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3.4 DBS(동아방송) 라디오 PD 개국요원으로 입사.
1963.4.28~1967.3.4 팝 음악 프로그램 'Top Tune Show' PD 겸 진행
1964.10.5~1971.3.30 동아방송(DBS) '탑튠쇼' DJ
1964.4.1~1971.3.30 동아방송 '세시의 다이얼' DJ
1970.10.1~1971.3.30 동아방송 '영시의 다이얼' DJ
1971.4~1974.3 TBC와 프리랜서 계약.
1975 서울신문 기자 (영화, 방송, 가요, 레저 담당)
1978~1988 주간지 '스포츠동아' 기자 (영화, 방송, 가요, 자동차 담당)
1991년 봄 미국 이민
2003.10.20 TBN(한국교통방송) '최동욱의 미드나이트 스페셜'로 컴백
2005.5.1 라디오서울코리아 www.radioseoulkorea.com 개국
2010.2 '가짜영어 바로잡기 사전' 출간
2011.12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초대회장



태그:#최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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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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